< -- 9. 하얀 감염 -- > * 123화 *
“어서 오게.”
부사령관은 테이블에 먼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벽에 가까운 바깥쪽 자리였다. 그 사이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한 채 맞아주었다.
바츠는 그가 내내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약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무리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한쪽에 앉아있는 한 여인 때문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부사령관의 오른편에 앉아서 바츠를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기대감이 함께 묻어나고 있었다. 동시에 몸 어디가 가려운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자리에 진득하니 앉아있지 못하고, 안달난 사람처럼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저쪽에 앉아있는 부사령관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어떤 표정을 했을지 짐작해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건 왜 가지고 왔나? 그건 제이스에게 주고 이쪽으로 와서 앉게.”
부사령관이 애태우는 그녀를 애써 외면하고 바츠를 향해 자신의 왼쪽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한 여인이 다가가 바츠가 머리칼의 물기를 닦아내던 수건을 조심스럽게 받아갔다.
그녀는 어깨가 드러나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치마에 주름이 전혀 없는 밋밋한 옷이었다. 하지만 통이 좁아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잘 어울렸고, 검은색 끈으로 허리를 바짝 조임으로서 얇은 허리를 강조해 평범한 옷을 감각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바츠의 수건을 받아들고는 종종 걸음으로 방을 떠났다.
“어서 이쪽으로, 이쪽으로 앉게.”
부사령관이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긴 바츠에게 다시 한 번 자리를 권했다. 바츠는 그녀의 뒷모습이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덕분에 자리로 향하는 걸음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 다 느릿한 바츠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반대쪽에 앉아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도 걸렸다. 바츠가 슬쩍 눈길을 주었을 때에는 활짝 웃어주기까지 했다.
“음...혹시 샤워 부스에 고장이라도 있던가? 물기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군. 또 건조바람이 작동이 안 된 게로군.”
바츠가 겨우 자리에 앉자, 부사령관이 아직 물기가 여기저기 남아있는 바츠를 살피며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불만이 묻어나는 목소리보다는 막 자리에 앉은 테이블에 더 관심이 갔다. 자리에 앉은 사람이 고작 세 명뿐인 것을 감안하면 테이블이 지나치게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스치듯 보았을 때에는 그냥 크다고만 느꼈는데, 이렇게 자리에 앉아보니 그냥 큰 정도가 아니었다. 낭비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대했다. 테이블은 적어도 20명이 함께 자리에 앉아도 될 만큼 크고 긴 직사각형이었다. 아는 사람을 전부 불러와서 식사를 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케일리를 비롯해 친구들이 절로 떠올랐다. 그래서 부사령관의 말에는 그냥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하고 말았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인지하지 못한, 아무 의미 없는 응답이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바츠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부사령관을 향해 볼멘소리를 냈다.
“아빠, 그것 봐요. 내가 말했잖아요. 지난번에도 그랬다고요. 그것 때문에 약속에 늦었다고 했을 때 믿지 않으셨죠? 기회가 되면 꼭 고쳐주세요. 귀한 손님이 곤란을 겪잖아요.”
바츠는 그런 그녀와 부사령관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그녀는 부사령관에게 말할 때에는 슬픈 얼굴로 이야기했지만, 다시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에는 사라졌던 미소를 금방 되찾으며 돌아왔다. 입꼬리가 양쪽으로 길게 치켜 올라갔다. 부사령관은 그녀가 슬픈 얼굴로 이야기할 때에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바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바츠는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둘이 자신을 향해 무안해하고 있다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아직까지 딱히 불편을 느끼지 못한 바츠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때 갑자기 부사령관이 놀랐는지 어개를 한 차례 크게 움찔하며 말했다.
“아, 미안하네. 내가 정신이 없군. 인사하게. 이쪽은 내 딸, 카르멘이네. 그리고 카르멘, 이쪽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일리트시의 집사란다. 인사하려무나.”
카르멘이 악수를 하고 싶은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니 붙임성이 좋아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뻗기는커녕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시 앉아야 했다. 너무 서두른 탓에 일어나며 허벅지를 테이블 끝에 부딪히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테이블이 허공으로 잠시 날아올랐다가 내려선 것 같은 큰 소음을 냈다. 그리고 그녀는 누가 어깨를 힘으로 짓누른 것처럼 주저앉다시피 자리에 앉았다. 부사령관은 갑작스런 소란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 자리에서 엉덩이만 들고 반쯤 일어난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사령관을 향해 손을 내두르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바츠에게 내밀려던 손으로, 테이블에 부딪힌 자신의 허벅지를 필사적으로 문지르는 것과는 대조적인 행동이었다. 당장 밀려드는 통증보다는 악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얼굴에 더 많이 묻어났다.
바츠는 그녀에게 애써 웃어주며 고개를 까딱여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녀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싶었다. 그러자 그녀가 바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쪽 얼굴을 찌푸리다 말고 환하게 웃었다. 통증이 사라졌는지, 문지르던 손도 멈췄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이라도 바츠가 손을 내밀어주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기대를 들어주지 않았다. 애초에 둘이 자리에서 일어났더라도 악수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 놓인 테이블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앞으로 기울이고 팔을 쭉 뻗어야만 겨우 손이 닿을 정도로 넓었다. 인사치레는 이정도로도 충분했다. 부사령관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내둘렀다. 그리고는 바츠에게 말했다.
“자네가 이해 좀 해주게. 20살이 넘었지만 아직 철이 없네.”
“아빠!”
바츠가 응답할 겨를도 없이, 그녀가 부사령관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뒤늦게 바츠를 의식하고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살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바츠는 그녀가 몹시 화가 나서, 부사령관을 향해 눈을 사납게 뜨는 걸 전부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그녀에 대한 흉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관심 없었다. 단지 그런 그녀를 보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내숭이 없고, 말괄량이 같은 모습이 꼭 닮아있었다. 아델리나. 그녀는 마치 아델리나 같았다. 그녀에 비해서 수줍음이 더 많은 것만 빼면 영락없었다. 만약 그녀가 아델리나였다면 오히려 빤히 지켜보는 바츠를 향해 뭘 그런 눈으로 바라보느냐고 큰 소리를 쳤을 것이다. 아무 감정이 없는 시선이라도 상관없다. 아델리나는 자신의 무안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고집을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부끄러운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귓불이 붉어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검은 금발 사이로 붉어진 그녀의 귀가 도드라졌다.
“괜찮습니다.”
바츠는 뒤늦게 대답했다. 아델리나가 밖에서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쯤이면 교역이 끝났을 것 같았다. 무사히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고 있길 바랐다. 음식이 나온 것도 그때였다. 부사령관이 제이스라고 부른 여인과 그녀와 비슷한 분위기의 옷을 입은 여인 넷이 음식을 날랐다. 재미있는 건 그녀들이 음식을 나르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숙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음식이 다 날라진 후에야 부사령관의 수고했다는 말과 카르멘의 고맙다는 인사말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들은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한 차례 숙인 후 방을 나갔다. 바츠는 그녀들이 방을 떠난 뒤 부사령관이 둥그스름한 유리잔에 직접 따라준, 붉은 색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적시고 나서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많고 따뜻했다. 은으로 만든 원형 접시에 호밀 빵과 껍질 콩, 구운 옥수수 낱알 약간과 으깬 감자 조금 그리고 손가락을 쫙 핀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고깃덩어리가 놓여있었다. 냄새가 너무 좋았다. 특히 고기 위에 끼얹어진 검붉은 소스의 달콤한 향이 일품이었다. 바츠는 고기를 크게 잘라 입안으로 넣었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부사령관이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물었다.
“어떤가?”
“굉장히 맛있네요. 매우 신선하고요.”
바츠는 나르의 방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절로 떠올랐다. 그때 먹었었던 음식들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음식들이었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것들이었다. 그 이후로 다시는 맛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매우 신기했다. 하지만 지금 앞에 놓인 음식들은 엄밀히 말하면 그때보다 좀 더 나았다. 식감도 그렇고 신선도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부사령관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맛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나?”
바츠는 대답하기 전에 부사령관과 카르멘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는 있지만,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부사령관의 얼굴은 조금 음흉하게 보였다. 조금 전 기대감에 찬 눈빛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의 미소가 뭔가를 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에 반해 그녀의 딸은 고기를 자르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가끔씩 눈을 치켜뜨며 이쪽을 몰래 몰래 살피고 있기는 했지만 부사령관과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즐거워보였다. 바츠는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게 누군가?”
“친구들이요. 그리고 가족이죠.”
부사령관의 낯빛에 순간적으로 묘한 분위기가 스치고 지났다. 워낙 빠르게 지나가서 제대로 느낄 수는 없었다. 실망스러움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대답을 끝까지 들은 그는 바로 이전의 만족스런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가 말했다.
“그렇지, 가족! 가족이라면 꼭 함께 하고 싶을 것이네.”
“그럼 케일리를 초대해주시겠습니까?”
바츠는 그의 대답을 듣고는 쫓기듯 물었다.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레벨6에 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지만, 혹시나 하는 약간의 설렘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왠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흔쾌히 허락해줄 것만 같았다. 기껏해야 앓는 소리로 듣기 좋은 핑계나 듣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바람이 진짜 현실이 된 것이다. 그의 고개가 정말로 위 아래로 움직였다. 바츠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유리벽을 통해 이상한 광경이 눈에 띄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유리벽 가까이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뻣뻣하거나 투박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하고 세련된 옷을 입고 있었다. 가끔 부자들이 파티에나 입고 나타나던 그런 옷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일상에서 입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곳 거주자들에게 저런 옷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부사령관은 물론이고 그의 딸과 음식을 날라준 여인들 그리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스쳐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그들이 일리트시의 좁은 통로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주민들처럼,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바츠가 본 것은 헛것이 아니었다. 다시 보아도 그의 고개는 끄덕여지고 있었고, 유리벽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물론이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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