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 하얀 감염 -- > * 126화 *
호흡을 가다듬던 부사령관이 들썩이는 어깨를 내버려두고, 바츠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이 많은 눈이었다. 가쁜 자신의 호흡은 잊은 것처럼 보였다.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그가 바츠에게서 보고 싶어 하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우월감을 느꼈다. 뭔가를 제압하고 승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을 오랫동안 만끽할 새도 없이, 그와 다시 대화를 이어가야 했다. 그가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호흡 때문에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누구에게 들었나?”
바츠는 그가 이토록 신중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막힘이 없던 그였다. 대화를 하는 내내 자신감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대답하기 싫은 가요?”
“알겠군...그녀로군. 그렇지? 그녀가 그러던가? 아르크에 백신이 있다고? 여러 음식들과 패치 형 식량인 애니밀에 들어있다고 하지는 않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그가 이제야 좀 진정이 되었는지, 몸을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한결 여유롭게 보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여유로움이 가쁜 호흡을 다시 되돌렸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를 체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을 늘어뜨리는 그의 태도에서 무엇인가가 크게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절로 튕겨져 나간 것이 아니라, 그가 의도적으로 내려놓은 것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자네 헤러티커 엄지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가? 그걸 달여서 마시면 수명이 늘어난다는 소리 말이네. 아르크 내부에 익히 알려져 있는 것으로 아는데.”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그럼 헤러티커 엄지로 사령관이 연명하고 있다는 소리를 한 번쯤 들어봤겠군. 그렇지?”
부사령관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가 의식적으로 힘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쓰윽 한 번 쳐다본 것이었는데 강렬하게 느껴졌다.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야 했다. 강하게 압박하는 긴장감이 아닌 대단한 호기심으로 인해서 애가 탔다. 이어질 그의 다음 말이 몹시 궁금했다. 그는 바츠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입을 땠다.
“자네에게 물어보지. 자네 사령관을 본 적 있나? 하다못해 봤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나? 사령관의 나이가 지금 몇이지? 100살? 200살? 자네가 생각할 때는 어떤가? 헤러티커 엄지가 정말 그런 효능이 있을 것 같나? 돌연변이 괴물의 보랏빛을 띄는 혐오스런 손가락 고기에, 그런 효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느냐 말이네.”
그가 바츠를 향해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추궁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츠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쏟아낸 질문들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질문들은 조금 전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더불어 또 다른 사실을 알려주는 말이었다. 바츠는 물었다.
“그런데 왜 헤러티커 엄지를 그렇게 찾는 거죠? 다들 광적으로 집착하지 않던가요? 고가임에도 얻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고 들었는데요?”
의도한 것이 아니었지만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본 그에게, 복수를 하는 것처럼 말이 나갔다. 동시에 그 역시도 헤러티커 엄지에 대해서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았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법 오래된 과거지만 아르크에서 스타드를 처음 보았던 그날이었다는 것을 생생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스타드에게서 헤러티커의 엄지를 받아드는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반응은 분명 놀라움이었다. 그러자 그가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의 귀여운 반항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법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가 솔직하게 대화에 임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가 사뭇 진지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들이 그렇다고 믿기 때문인지. 자네 레벨4 거주자들에게 주어지는 배급표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그들이 모아둔 양은 자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네. 레벨4 거주자들은 아무리 못해도 현재 레벨1 거주자들처럼 생활을 하라고 하면, 평생 동안 일을 하지 않고도 부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네. 왜 그러는지 아나? 그들에게는 그 배급표를 쓸 수 있는 기회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네. 레벨6이라면 다양한 문화생활과 오락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질 않나? 레벨6 거주자들을 제외한 아르크 거주자들 중에서 레벨6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네. 그들은 오로지 각 레벨의 상업지구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지. 기껏해야 가끔 특별한 음식을 구입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네. 물론 레벨1이나 레벨2 거주자들에게는 그것도 쉽지 않겠지.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이 저축한 배급표를 쓸 길이 그다지 많지 않네. 아무리 써도 한계가 있지. 그럼 그런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생각해보게. 자네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네. 그것도 지겹도록 말이야. 그런데도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여력은 있는데,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네. 그럼 자네라면 어떻겠는가? 그런 생활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웃기지 않나? 부족함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도 부족하다고 느낀다니 말이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단 말이네. 삶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지. 그런 상황이 닥치면 아르크로서는 매우 크나큰 손실이네. 어쩌면 불구가 된 거주자들보다도 더욱 골칫거리가 되겠지. 능률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은 그 전염 속도가 굉장히 빠르니까 말이야. 우리 그것을 미연에 방지해야할 필요가 있었지.”
“사람들을 속인 것이군요.”
“속이다니! 자네 잘못 생각하는 것이네. 그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통치라고 불리는 것이네. 자네는 아직 모를 것이네. 하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야. 반드시 알게 될 것이라고 믿네. 내 이웃이 된다면 분명하네.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면 이해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네. 아르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이 다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같을지 몰라도, 자세히 뜯어보면 다 각자의 개성대로 철학을 가지고 있지. 그런 그들의 불만을 일일이 최소화하고 응집시키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나? 나와 의회는 이들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줄 의무가 있네. 그게 바로 통치네.”
바츠는 그의 말대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직 인지 앞으로도 영원히 일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가 협잡꾼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짓에 동조한 의회는 모리배였다. 관리자들도 일부는 가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이들의 농간에 놀아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미 한참 전에 불쾌해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레벨6의 실체를 눈으로 보았을 때, 그때 이미 그를 고깝게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전혀 예상 밖의 세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바츠는 애써 불쾌한 감정을 감추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헤러티커의 엄지를 만들어낸 겁니까?”
“자네가 무슨 의미로 그렇게 묻는지 아네. 내가 권력에 집착해서 사람들을 농락하고 유린했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나를 비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난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네. 자네도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이네. 우린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네. 삶에 대한 의미를 말이네. 그들이 고장 난 기계처럼 망가지길 원하나? 기름칠을 하고 유지보수가 가능한데, 그것이 고작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손을 놓을 것이냐 말이네. 나를 비난하고 싶나? 비난하게. 그건 내가 있는 위치에서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니까 말이네. 하지만 나를 막고 싶은 것이라면 그냥 용인하지 않겠네. 난 나와 의회가 지금까지 지켜온 것들에 대해서 전혀 후회하지 않으니까 말이네. 그리고 혹시 헤러티커의 엄지로 인한 감염이 걱정되는 것이라면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연구원들을 통해서 수천 개를 분석하고 나서, 들여온 것이니 말이야. 놀랍게도 크루엘라가 전혀 검출되지 않더군. 배탈을 일으킬 만한 세균이 묻어나기는 하지만 끓는 물에 넣으면 안전하네. 게다가 어느 정도 약효도 있더군. 소화를 돕거나, 혈압을 낮추거나 하는 것 말이네.”
그가 대답을 끝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포크와 나이프를 한쪽으로 정리했다. 음식을 전혀 입에도 대지 않았으면서도, 만찬을 즐긴 사람처럼 매우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대화와 함께 식사를 끝낼 생각으로 보였다. 하지만 바츠는 문득 밀려든 의문으로 아직 대화를 끝마치고 싶지 않았다. 연구원들이 헤러티커의 엄지를 연구했다면 알려진 효능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텐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벨4 거주자들이 계속해서 찾는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바츠는 그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봐온 모습 중에서 가장 편안한 모습이었다.
“물론 알고 있겠지. 하지만 레벨4에 거주 하는 사람들이 연구원들뿐인가? 관리자도 있고 레벨1이나 레벨2에서 머물던 거주자들도 있지. 누군가는 알면서도 약효 때문에 그냥 소비하기도 할 테고, 누군가는 설마 하는 마음이겠지. 또 다른 누군가는 효능이 없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고 말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구입하면 다른 이웃들에게 대화거리가 생긴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네. 자네는 이해가 잘 안되겠지?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큰돈을 주고 사서는, 고작 하는 것이 이웃과 대화라니 자네에게는 한심해 보이겠지. 하지만 사람은 말이야,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네. 매우 복잡하지. 정확히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하지. 그래서 어려운 것이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을 인정받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거든. 내가 한 말을 벌써 잊었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단 말이네.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네. 우리 앞에 놓인 고기가 돼지고기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소고기라고 믿고 있었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소고기라는 말이지.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그 어떤 근거를 가져다대도,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유리한 것만 보고 듣는다네. 즉, 자신의 생각에 오류를 만들어낼 근거는 애초에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지. 일종에 사치품이라고 생각하면 쉽겠군. 오랜 과거에는 반짝이는 돌들을 비싼 돈을 주고 거래했다고 배운 적 없나? 누군가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입장이 바뀌면 또 달라지는 것이지.”
바츠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지금까지 나눈 그와의 대화 대부분은 공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완전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입장이 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들의 삶인 것일 뿐이다. 헌터들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이상 따져 묻지 않고 질문을 바꿨다. 부사령관이 지쳤는지, 길게 한숨을 내뱉도록 만드는 질문이었다.
“그럼 사령관은 어떻게 된 거죠? 의회처럼 새로 뽑으면 되는 일 아닌가요? 왜 다시 뽑지 않았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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