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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27화 (127/268)

< --   9. 하얀 감염   -- >         * 127화 *

그는 자신의 접시 위에 음식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이제서 급격히 배가 고파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음식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음식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테이블을 뚫고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멍한 눈빛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망설이는 것인지, 고민에 시간을 할애하며 지체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츠는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목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시간 대화를 이어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갈증을 쉽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손만 뻗으면 반이나 차있는 물 잔을 집어들 수 있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다. 조용한 방안의 침묵도 한몫 거들었다. 손을 뻗기 어려웠다. 하지만 훨씬 많은 말을 한 그는 전혀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입안이 완전히 말라버렸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자네, 사령관을 직접 본 적이 있나?”

바츠는 여전히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묻는 그의 질문에 의아함을 느꼈다. 이미 그건 대답을 들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는 이해를 못했다고 생각하는지 이제 와서 다시 한 번 지난 문제를 끄집어냈다. 조금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용기내서 물 잔을 집어 드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그가 그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시선도 바츠를 향했다.

“학교를 다니며 영상을 통해 본 것이 전부겠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령관의 존재를 믿고 따르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를 믿고 따른단 말이네. 자네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네. 그게 단순히 구호를 외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그 구호 말이네. 아무리 바보라도 의심은 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 의심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왜 그런 것 같나? 이곳에 사령관은 지금까지 딱 한명 뿐이었네. 최초의 사령관이 바로 그이지. 지금까지 의회에서 아르크를 이끌어 왔네. 부사령관인 내 자리와 다른 의회 의원들의 자리는 계속해서 바뀌어 왔네.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선출이 되지. 물론 그 후보들은 전부 레벨6 거주자들에 의해서 선정이 되네. 레벨6 거주자들이 투표로서 후보를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된 후보들이 다시 레벨4 거주자들의 투표를 통해 부사령관을 결정하네. 부사령관에게는 의회의 다른 의원들을 임명할 권한을 갖지. 레벨6 거주자들의 투표로 선정된 후보에서만이라는 제한이 붙지만 말이야. 어쨌든 사람들이 의심을 하면서도 의혹을 제기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사령관이 정말로 수백 년 동안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나? 물론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난 장담할 수 있네. 많은 수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네.”

바츠는 그가 늘어놓는 말보다는 갈증이 떠내려가며 남기는 시원함에 집중했다. 깨끗한 물이 식도를 타고 위로 흘러드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연거푸 마셨다. 목이 편안해졌다. 말을 마치고 지켜보고 있던 그가 헛기침을 통해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이미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괜히 모른 척 놀란 연기를 하며 물었다.

“어째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이죠? 사령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매우 불안해했을 텐데요. 무엇보다도 신뢰가 무너지지 않나요?”

부사령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바로 그래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이네. 자네 불확실성이 갖는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나? 그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면 자네가 그렇게 묻지 못했겠지. 과거 아주 오래 전에 종교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일종에 학문이네. 사람은 아무리 강하더라도 어딘가에 의존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지. 정확히는 대중이라고 해야겠군. 대중은 말이네, 혼자가 되면 매우 영리하지만 무리가 되면 바보가 되어버리거든. 의회는 진즉에 그 힘을 알고 있었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실체보다 실체 같은 허구가 훨씬 강하다는 것이었지. 체르노빌에 가려던 적이 있었지? 자네라면 체르노빌에 산다는 괴물과 헤러티커, 어느 쪽이 더 두렵나. 재밌게도 체르노빌의 괴물에게서 더욱 두려움을 느끼지 않나? 헤러티커는 눈앞에 보이는 공포인데도 불구하고 그만한 위화감을 주지 못하지. 하지만 그 눈앞에 있는 공포라는 사실이 오히려 두려움을 반감시키기도 하네. 최소한 확인이 가능하지 않나.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우고는 한다네. 그 상상력은 개인에게는 사실이 되어버리지. 그리고 그것이 전염이 된다면 진실이 되어버린다네. 우습지 않나?”

“그게 사령관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죠?”

“왜 상관이 없나. 사람들은 그 상상력을 통해서 사령관을 칭송하고 경외하게 되는데 말이야. 자신들의 구멍 난 의문을 멋대로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다는 말이네. 그리고 그것이 여러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면, 최초의 주장에 너도나도 편승하게 되네.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사령관께서 아르크를 세우시고, 아이기스로부터 지켜내셨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아르크를 지키고, 나와 가족 그리고 사령관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이것이 힘을 발휘하게 된단 말이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것은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어있지. 그 최초의 의문을 가지러 가기 위해 누가 노력할 것 같나? 그 상상력이 진실이 되어있을 쯤에는 다들 이것을 가지고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아르크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정당성을 가지게 된단 말이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지. 의문을 가지는 순간 소외받게 되는데, 누가 그런 모험을 하겠나? 그냥 함께 편승하면 최소한 불이익은 생기지 않는데 말이야. 그 상상력을 깨뜨리려면 사령관의 업적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나타나야 할 것이네. 그런데 그게 가능하리라 보나? 누가 아르크를 세운 그 엄청난 업적을 초월할 수 있겠나?”

바츠는 그가 말을 마치는 것에 맞춰 빈 잔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잔뜩 신경을 썼다. 부사령관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자신의 말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기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냥 피어나기 시작하는 고요함과 어우러질 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몸을 바츠 쪽으로 기울여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굴었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전과 모든 것이 똑같았다. 다만 상체의 기울기만 변했을 뿐이었다.

“자네를 위해서 한 가지 더 말해주도록 하지. 크루엘라에 관한 이야기네.”

그가 미소를 보여주며 몸을 바로 했다. 으스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그것을 겨우 참아내고 있다는 것이 미소로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일부로 호흡을 고르며 텀을 길게 잡았다. 바츠가 애를 태웠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반 바츠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냥 그가 이야기를 하면 들어나 줄 생각이었다. 그도 그것을 느꼈는지, 쓸데없이 오래 끌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헌터가 조직된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아르크에서 헌터를 조직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을 한명 육성하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지 알고는 있나? 그들에게는 보통 군인의 열 배 이상의 비용이 드네. 물론 그만한 값어치는 하네. 그런데 우리가 굳이 그들을 육성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만한 노력으로 군인을 양성해도 부족하지는 않는데 말이야. 왜 수고를 하는지 아느냐 말이네. 우린 바보가 아니네. 아르크를 적대시하는 무리의 척결? 사실 그들은 헌터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아도 충분하네. 군인들을 더 육성하고 남는 비용으로 방어시스템을 손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그럼 지상에 남겨진 유산들의 회수. 이건 정말 중요하네. 아르크는 한정된 공간이고 그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니까 말이네. 하지만 이것들을 위해서 수고를 하기에는 헌터들의 가치는 턱없이 높네. 그런데도 우린 헌터들을 계속 육성하지.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집사까지 두면서 말이야. 난 그 이유를 말하려는 것이네.”

“그게 크루엘라 때문이라는 이야기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 지상에 크루엘라가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나? 내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겠는가? 그 무서운 전염력이 그 기세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네. 크루엘라가 지상에 나타난 지 벌써 수백 년이 지났네. 그때에 비해서 전 세계 인구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수만 남았지. 기껏해야 수백 만 정도일 것이네. 어쩌면 수십 만일수도 있지. 기록에 의하면 그때 인구가 100억에 육박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지.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었지. 그런데 지금 남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나? 어떻게 크루엘라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인지 말이야. 크루엘라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네. 모두에게 내려진 저주였지. 그런데도 아르크로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 일부는 살아남았네. 어찌된 일일까? 크루엘라 뿐만 아니라, 헤러티커까지 활개를 쳤는데 말이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바츠는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었군요.”

“바로 맞췄네. 크루엘라는 접촉은 물론이고 공기를 통해서도 감염이 가능했네. 모두가 피할 수 없었지. 그런데 사람들은 살아남았네. 왜 그 사람들에게는 감염이 의미가 없던 걸까? 의회는 그 이유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었지.”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그가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대꾸했다. 신이 난 사람처럼 흥이 느껴졌다.

“그렇지! 그들은 헤러티커만 피할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네. 오히려 굶주림이 문제였겠지.”

“그래서 전진기지를 운영했군요.”

“맞네. 아르크는 매우 안전하지만 그만큼 패쇄적이었지. 유전적인 문제도 의회를 고민하게 만들었네. 전진기지는 그런 문제들을 단 번에 해결해줄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네. 유전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부족해진 인력도 보충하고 말이네. 무엇보다도 그들 중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그 면역력! 그 면역력을 아르크에 퍼뜨리기 위해서였네. 동시에 헤러티커를 전부 처리만 할 수만 있다면,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걸 느꼈지. 하지만 그것은 군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네. 살해당하기 일쑤였고, 오히려 감염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속속 있었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헌터였네. 철저하게 신체를 단련한 병기를 만들어낸 것이지. 인간의 감각을 극대화 시킨 병기! 백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린 지금까지도 그럴 만한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네. 하지만 우린 확신하고 있네. 지금 딱 절반이네. 우리가 아르크에서 지내온 시간만큼 딱 한 번만 더 보내면 된다고 예측하네. 길어야 300년이네. 그 후에는 아르크 주민들 전부 면역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있을 것이네. 우리 후손들은 지상에서 무사히 살 수 있단 말이네. 크루엘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로 말이야. 물론 그때는 크루엘라가 거의 남아있지 않겠지. 대부분 면역력을 가졌을 테니, 감염이 의미가 없지. 남은 건 헤러티커뿐이네. 놈들의 직접적인 위협만 해결하면 되네. 그 사이 놈들이 가진 유전자를 통해서 변종이 생긴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헌터들이 그 전에 놈들을 섬멸하게 될 것이네. 물론 치료제가 먼저 개발될 수도 있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크루엘라가 고개만 내밀어도 우린 최소 70프로가 몰살당하고 말 것이네. 헌터를 끊임없이 육성하고, 연구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이지.”

바츠는 말을 끝내는 그의 얼굴에서 자부심과 자신감을 동시에 느꼈다. 한껏 달아오른 흥은 차차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비밀이 놀라움을 넘어 소란까지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츠에게는 소란은커녕 놀라움으로도 다가오지 않았다. 꼭 교재를 통해 수업을 듣는 것처럼 평범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가 늘어놓은 이야기들은 전부 대단한 것들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동요되거나 하는 감정에 변화는 없었다. 귀찮은 것처럼 시큰둥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따분한 수업을 듣는 것처럼 자신과는 동떨어진 일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진기지의 주민들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 같군요. 그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죠. 최소한 그 굶주림은 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럴 만한 가치와 자격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데요?”

부사령관이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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