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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29화 (129/268)

< --   10. 상상력   -- >         * 129화 *

집안은 이미 어스름한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밝은 조명들은 모두 선홍(Scarlet)빛으로 바뀌었고, 곳곳에서 느껴지던 생기는 모조리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무거운 숨결만이 곳곳을 배회할 뿐이었다. 그리고 발자국은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조금도 서두름이 없는 침착한 기척이었다. 명령이 입력된 기계처럼, 헤매지 않고 제 방향을 찾아갔다. 중앙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섰고, 곧장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랐다.

바츠는 2층 가장 구석진 방에 잠들어 있었다. 덕분에 비교적 정확하게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머물고 있는 방에는 침대가 비록 하나였지만 전진기지의 침실만큼 넓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접시나 잡다한 물건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한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탐이 날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고작해야 약간의 흥미를 끌 정도였다. 바츠는 그랬다. 그런데도 발자국은 조금씩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목표가 분명했다. 문 앞에 도착하는 발걸음에 긴장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한차례 망설였지만 겁을 집어먹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바츠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 긴장감이 원하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는 걸 확신하고 나자 정신이 맑아졌다. 몽롱한 기운도 전혀 없었다. 잠든 적이 없었던 것처럼 또렷했다. 그 사이 방으로 들어선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졌다. 바뀐 분위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내딛는 기세가 한풀 꺾였을 정도였다. 중간에 두 번이나 머뭇거렸다. 하지만 바츠는 그 흐름을 계속해서 쫓으며, 원하는 거리로 접근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가 되었을 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동시에 나이트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카니지를 잽싸게 뽑아들어 휘둘렀는데, 허공을 가르는 칼날이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마치 그 조심스러운 행동을 비웃는 소리 같았다. 뼈까지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잔뜩 실린 힘에 도취되어 우쭐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만만하던 역량은 뽐낼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기껏 선보인 것이라고는 눈으로 쫓지 못할 만큼 빠르게 날아가, 상대의 목에 겨누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긴장감이나 베어버렸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였다. 그녀가 자신의 목에 겨눠진 칼날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말했다.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조금 전 느꼈던 긴장감이 착각이었다고 생각될 만큼 태연했다.

“당신이 정말 일리트시의 집사인가요?”

바츠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방안이 너무 어두웠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녀 등 뒤에서 비쳐지고 있는 복도의 홍등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식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녀의 생김새는 온통 새카만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칼을 만났나요?”

그녀가 좀 더 다가오기 위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칼끝에 힘을 실어 위협하며 그런 시도를 막았다.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늦은 밤, 어둠을 틈타 다가온 사람이 정직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목숨을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위협이 전혀 소용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죽은 사람의 냄새가 났다. 두려움이 없다기보다 의욕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목에 칼을 겨눈 것만으로는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굳이 다가오기 위해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순순히 자리에 섰다.

“난 제이스에요. 아까 식탁 앞에서 봤죠?”

“무슨 일이지?”

바츠는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칼날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난 칼의 딸이에요. 칼은 제 아버지죠.”

그녀의 대답을 들은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잡아 빼려다가, 칼끝의 무게를 느끼고는 황급히 멈춰야 했다. 대신 몸을 움직여 침대에 걸터앉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칼과의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찰나였던지라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그와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어렴풋하게 그가 가족을 언급했었던 적이 있는 것 같을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그 외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괜한 침묵만 만들어졌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처럼 살가운 태도와 목소리였고, 전진기지에 찾아온 헌터들이 늘어놓는 말처럼 정신이 없었다.

“집사님, 여긴 너무 아름다운 곳이에요. 세상 모든 아름다움이 모여 있다고 하는, 천국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거예요. 하지만 그 천국은 천사들이 사는 곳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요. 천사가 뭔지 아나요? 선의로 가득한 정의로운 존재들이죠.”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전에 손을 치우는 것이 좋겠군. 당신의 손가락이 전부 잘릴 거야.”

바츠는 그녀가 내뱉은 말보다도, 지금쯤 깊숙이 상처가 났을 그녀의 손가락이 더욱 신경 쓰였다. 어둠 속에서도 카니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칼날을 쥔 손에 오히려 더 힘을 주며 말했다.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은 아무래도 좋아요. 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돼요.”

“그런 사실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 그리고 당신의 손가락이 바닥을 나뒹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바츠의 대꾸에 그녀가 입을 닫았다. 이제야 자신의 손가락이 걱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바츠는 보이지 않는 그녀의 시선이, 칼날을 쥔 손이 아닌 자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손가락에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바츠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그녀의 손가락이 반쯤 잘렸다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리를 숙이며 몸을 앞으로 쭉 밀어, 얼굴을 바츠에게로 가까이 가져다댄 뒤였다. 어쩔 수 없이 칼날을 쓰다듬듯 딸려오는 그녀의 손가락이 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짧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용감한 분이셨어요. 전진기지를 수십 년 동안 홀로 지키셨죠. 수많은 적들과 싸우셨어요. 마지막에는 ‘지야라’도 서슴지 않고 선택하셨죠. 하지만 마지막에 비겁해지셨어요. 우습게도 ‘지야라’를 떠난 것도 비겁했기 때문이에요. 이상하죠? 전 알아요. 그 모든 것이 우리 때문이라는 걸 말이에요. 우리가 아버지를 비겁하게 만들었어요. 우리가 다칠까봐 비겁해지시는 걸 선택하신 거라고요. 아버지는 우리 때문에 용기를 잃으셨죠. ‘그’도 마찬가지이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는 또 누구지?”

바츠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녀의 검은 눈이 온몸을 대신해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정했다. 흔들리는 두 눈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말짱한 정신으로 잠꼬대 같은 말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 잠꼬대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 이유를 물어봐달라고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애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명쾌하게 대답을 늘어놓지 못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불현 듯 나타난, 낮처럼 밝은 불빛이 밖에서부터 건물 안쪽을 마구 훑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러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문에 그녀는 하려는 대답을 멈추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바깥을 확인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전과 다르게 말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찾아주세요. 여긴 자유가 없어요. 레벨1에서 살 때에도 그랬고, 지금 이곳에도 없죠. 단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에요. 저들은 그런 것처럼 말하죠. 항상 그래왔어요.”

“왜지?”

“그래야만 자신들이 천국에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당신이 말하는 자유가 대체 뭐지? 모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걸 말하는 건가?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하는 소리인가?”

바츠는 헌터들이 가진 무력이 아무런 통제가 없는 자유를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그녀는 헌터가 아니었다. 지상에 나가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저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 고작이겠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신념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그녀가 대답했다. 말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유는 말이에요,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다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의사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럼 당신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마음대로 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바츠는 그녀에게 물으며 1층에서 들려오는 부사령관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가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의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대표로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넸다.

“그럼 당신은 당신의 생각을 마음껏 말하고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잔뜩 흥분한 사람처럼 토해내듯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바츠는 그녀가 조급해하면 할수록 더욱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답을 일부로 더 천천히 내놓았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 같았다.

“당신은 아직 몰라. 자유라는 이름이 폭력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당신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난 그것들을 여러 차례 보았지. 지상에 만연한 자유들은 하나같이 그런 것들이니까 말이야. 자유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적절한 통제 속에 놓인 자유가 질서를 만들지.”

바츠는 그렇게 믿는다는 말은 생략했다. 그러자 그녀가 서두르느라 가빠진 호흡을 한차례 고르고 대답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그 통제라는 수단에 속아서 자신을 가두고 있는 거예요. 그 질서가 과연 혼란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 있나요? 그건 대체 누가 만든 거죠? 자신의 생각을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제발, 자유로워지세요. 그리고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그 사이 사람들의 말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대여섯은 넘는 소리였다. 동시에 반대편에서 카르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방문을 열고 나온 카르멘이 막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갑작스런 소란에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제이스 역시 그들의 기척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조급해하던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속삭이듯 읊조리는 목소리였다. 죽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더욱 강해졌다. 두 눈의 흔들림도 완전히 사라졌다.

“자유를 위하여.”

부사령관과 함께 올라온 사람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타고 이제 문 앞에 근접했다. 곧 안으로 들이닥치기 직전이었다. 복도부터 차례로 밝은 조명이 켜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칼날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바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더욱 놀란 건 막 안으로 들이닥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들이닥치는 순간 방안에는 밝은 조명이 들어왔고, 뼈가 드러나 손을 벌벌 떨며 바닥을 붉은 선혈로 흥건하게 적시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방안은 소란으로 어수선하게 변했다. 기존에 있던 침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가장 앞서 들어온 부사령관이 창백해진 얼굴로 바츠를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불러대며 옆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다른 사람들은 바츠를 경계하며 각자가 허리춤에 가지고 있던 검에 손을 올렸다. 그들은 모두 하얀색 정복을 입고 있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부사령관이 놀란 목소리로 바츠에게 물었다. 그 틈에 하얀 정복을 입은 사내 중 하나가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와, 바닥에 쓰러진 제이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바츠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도둑...이었습니다.”

“도둑이라고? 물건을 훔쳐가는 그 도둑을 말하는 건가?”

그때 문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몰려든 사람들 어깨너머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기웃거리던 카르멘이 제이스와 붉게 변한 바닥을 발견하고는 놀란 것이었다. 바츠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카르멘에게로 향했다. 카르멘은 함께 나란히 서있던 한 여인의 품에 안겼다가 반대쪽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여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부사령관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카르멘의 뒤를 쫓아갔다. 부사령관이 카니지를 쥐고 있는 바츠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래, 잃어버린 물건은 있나?”

바츠는 이제는 더 이상 움직임이 없는 제이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글쎄요...여기에 없는 물건이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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