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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30화 (130/268)

< --   10. 상상력   -- >         * 130화 *

다음날, 바츠는 부사령관의 배웅을 받으며 레벨6을 떠났다. 그는 레벨5의 엘리베이터 앞까지 함께 해주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도 집요하게 따져 묻지 않았고, 서둘러 방을 바꿔주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바츠가 그의 무신경한 듯한 태도에 의아함을 느껴야 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달리 동요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단으로 침입한 그녀의 실수였고, 사고였다며 옹호해주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함께 온 하얀 정복을 입은 사내들이 싸늘한 눈으로 심판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마저도 간단히 물리쳤다. 바츠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검을 뽑아들 준비가 되어있었다. 대부분 쉰 살 안팎의 사내들이었지만, 그들을 모두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은 제이스 옆에 나란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살기등등한 시선을 한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가야 했고, 바츠는 다른 방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사히 떠나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게.”

그가 엘리베이터에 오른 바츠를 향해 기대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츠는 그의 짧은 한마디에 많은 것을 느꼈다. 특히나 그 기대에 자극을 받은 설렘이 진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홀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정도였다. 어젯밤 그 사건이 다시 떠오르며 오랫동안 만끽하지는 못하도록 방해했지만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다. 그건 부사령관의 말대로 사고였다. 정말 진실을 알고 말한 것인지 그저 보호해주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가 옳았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정말 사고였다. 그들의 의심스런 눈초리에 바츠가 불쾌해해야 할 일이었다.

바츠는 애써 그때의 일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계속 마음에 두면 기분만 심란해질 뿐이었다. 그리고는 황급히 레벨2에서 엘리베이터를 멈춰 세웠다. 아직 남아있는 그 설렘을 전해주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1층으로 향할 뻔 했지만 다행히 늦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는 바츠의 눈에 매우 낯이 익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막 레벨1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서 레벨2로 들어서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친숙함이 잊혀질리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설렘을 전해주고 싶은 얼굴이기도 했다. 때마침 케일리가 레벨2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딘가를 다녀오던 길로 보였는데, 정리가 전혀 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반쯤 감은 것처럼 보이는 눈으로, 정면이 아닌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걷고 있었다.

“케일리!”

바츠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관심을 끌었다. 그러자 그녀가 걸음을 멈추며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의아한 얼굴은 금세 놀라움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위해 양팔을 좌우로 크게 벌리며 이름을 다시 불러주었다. 그녀의 얼떨떨한 기분을 아르크 밖으로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지나던 사람 몇몇이 그녀를 대신해서 화들짝 놀랐을 정도였다. 그녀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 듯 보였다. 게슴츠레한 눈이 급격히 커졌고, 동공은 넓어졌으며 입꼬리는 광대를 위로 치솟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헤러티커에게 쫓기는 것처럼 전력질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온 몸으로 무섭게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겁을 주기 충분했다. 바츠 역시도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가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그녀를 품으로 안으며 꼭 붙들었다.

“바츠!”

그녀는 바츠의 품안에 안기자, 바츠를 부르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반복해서 감탄사만 내뱉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온전치 않게 계속해서 더듬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는 키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녀는 어느새 한참 작아져 있었다. 어깨도 작아져 있었고, 손도, 발도 그냥 모든 것이 다 작아져 있었다. 그녀가 매우 가녀리게 느껴졌다. 그 사이 그녀는 뚫고 지나려는 것처럼 바츠의 가슴에 얼굴을 마구 부대꼈다. 조만간 얼굴 한 곳이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녀가 금방 그만두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완전 밀착된 상태라서 고개를 억지로 뽑아내듯 치켜들어야만 했다.

“얼굴 좀 보자! 얼굴 좀! 바츠, 정말 너 맞지! 그렇지?”

바츠는 그녀의 호들갑스런 반응이 창피하면서도 너무 기뻤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반가움을 그녀를 내려다보며,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정리해주는 것으로 대신 표현했다. 그러자 그녀가 귀찮은 지, 고개를 가볍게 털어 손을 떼어내고는 활짝 웃는 얼굴로 바츠의 뺨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바츠 맞구나. 정말 맞아.”

그녀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했다. 불안정한 떨림이 그녀의 지금 감정이 어떤지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다시 한 번 추슬러주며 물었다.

“잘 있었어? 어디 갔다 오는 거야?”

그녀가 이번에는 바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손길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글썽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여전히 얼굴 한가득 미소가 가득한데, 눈시울은 급격히 붉어지고 있었다.

“레벨1 우리 집에 다녀왔어.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으니까. 내가 가끔 가서 청소를 하고는 하거든.”

바츠는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준 뒤에, 막 그녀의 눈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하는 눈물도 대신 훔쳐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갑작스러운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바츠는 그런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있던 시선만큼은 놓지 않았다. 물러나는 그녀의 얼굴을 통해 뒤늦게 뭔가 이상한 기분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애써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바츠의 시선을 피해낼 수 없었다. 오른쪽 눈두덩에는 퍼런 멍이 선명했고, 입술 한쪽에는 검은 멍도 보였다. 자세히 뜯어보면 왼쪽 뺨도 살짝 부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잘...지내고 있는 거지?”

바츠는 반가움으로 기뻤던 감정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전해주려던 설렘 역시 산산이 조각났다.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내둘러, 자신의 머리카락을 방금 전 품안에 안겼을 때처럼 엉망으로 돌려놓는 모습이 너무도 슬프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머리카락 뒤로 숨기고 나서 대답했다. 얼굴이 반 이상 가려졌다.

“그럼 잘 지내고 있지. 너무 잘 지내고 있어. 같이 있었으면 널 엄청 배 아프게 만들었을 걸? 네가 약 올라서 만날 소리를 질러댔을 거야...”

그녀가 담담하게 건넨 대답은 둘 사이에 침묵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녀가 이미 예감을 한 듯, 애써 말끝을 끌어 올려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노력은 억지로 분위기를 잡아끄는 것 같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그 침묵에 정적을 더했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바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츠와 다르게 그녀는 중간에 몇 번이나 시선을 좌우로 옮기며 달아나듯 피했다. 그녀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나 하는 행동이었다. 바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왼쪽 뺨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몸을 던지듯 물러났다. 뒤늦게 자신의 그런 행동이 믿기지 않는지 억울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지만, 바츠는 이미 그녀의 행동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을 만큼 통증이 일었다. 정말 뭔가가 가슴을 난도질한 것 같았다. 자신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피비린내가 그녀를 겁먹게 만든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다. 뻗은 손끝으로 시선을 옮겨, 혹시 모르는 더러운 얼룩이 남았는지까지 확인해야 했다.

“미안...”

그녀가 민망해하며 스스로 자신의 볼을 바츠의 손아귀에 가져다댔다. 그마저도 한 차례 머뭇거렸다. 바츠는 그녀가 사과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무엇이 미안하냐고 따져 묻고 심정으로 가슴이 들끓었다. 하지만 따끔거리기 시작하는 두 눈 때문에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저 입을 열면 터져 나올 것 같은 서러움을 가까스로 짓누르며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니야.”

바츠는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볼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관심을 돌렸다. 자신의 목소리만큼 주의를 기울였다. 행여나 그녀의 살갗에 흠집이라도 날까 걱정하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로 신중했다. 하지만 바츠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또 한 번 살짝 놀라며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뱉어진 것인지, 양손으로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지만, 바츠의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바츠는 그녀가 아파하는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것보다도 지금의 행동이 더욱더 가슴이 아팠다. 양쪽 어금니를 모두 꽉 깨물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그럼, 일이 서툴러서 다친 거야. 레벨2는 레벨1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것도 많고 새로운 것도 많아! 너 프레이 등뼈 요리 먹어본 적 없지? 정말 고소하고 맛있는 거라고! 부럽지?”

바츠가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묻는 말에, 케일리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깨에 힘도 주고, 턱도 살짝 치켜들며 우쭐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가 필요이상으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과 부둥켜안으며 붉어진 눈시울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애써 무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케일리...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기다려 줄 수 있지?”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가파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보니, 설움에 목이 메고 있는 것 같았다. 마른 침을 연거푸 삼키며 다른 것도 삼켜버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애쓴 다음에 말문을 열었다. 결국 다시 한 번 구슬 같은 눈물을 볼로 흘려보내기는 했지만, 중간 중간 입술을 꾹 다물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끝까지 표현했다.

“물론이야. 네가 위대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네가 멋지게 돌아올 거라고 믿어. 그때까지 절대 힘든 일은 없을 거야. 기다릴게.”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전진기지에서 가져온 헤러티커 엄지를 손에 꼭 쥐어주었다. 모두 다섯 개였다.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극구 거부했지만, 바츠는 거의 반 강제적으로 건네주었다.

“갈게. 금방 돌아올 거야.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바츠는 손에 쥐게 된 헤러티커 엄지를 가지고, 끝까지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그녀를 애써 외면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옆으로 따라붙으며 사정을 하듯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통로 앞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슬쩍 밀치며,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도록 까지 했다. 그 때문인지 레벨1로 이어진 통로의 경사가 굉장히 가파르게 느껴졌다. 기어서도 충분히 지날 수 있는 곳인데, 오늘따라 멀고 긴 것 같았다. 이상하리만치 걸음이 무거웠다.

“바츠!”

바츠는 통로의 코너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돌아보게 되면 다시 달려가 그녀를 안아줘야 할 것만 같아서 걸음만 세웠다. 그러자 그녀가 조롱을 하듯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옷 좀 빨아 입어라! 구린내가 엄청 심해!”

바츠는 그녀의 조롱에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가슴이 왈칵해서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울먹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분명 눈으로만 울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차마 끝까지 돌아보지는 못하고, 고개를 정면에 둔 채 소리만 질렀다. 입안에 억지로 침을 고이게 만들어 집어삼키고 난 다음이었다.

“너, 너나 잘해! 너한테서는 썩은 냄새나!”

“뭐? 너, 거기 딱 기다려! 다시 말 해봐!”

바츠는 그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걷는 것으로는 따돌리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는 됐다. 그래서 바츠는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하도록 있는 힘껏 달렸다. 그녀와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느껴졌다.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걸음을 고작 세 발짝만 떼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레벨1에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 뒤에도 쉬지 않고 곧장 입구로 향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레벨6에 마련된 집에 가게 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막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던 두 명의 군인이 이쪽을 향해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추더니, 황급히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바츠는 그들이 보내는 정지 수신호를 보고, 천천히 달리던 걸음을 멈추며 둘의 얼굴을 살폈다. 한명은 작은 눈에 인상이 사납게 보이는 남자였고, 다른 한명은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금발의 여자였다. 두 사람 모두 어깨에 M16A4소총을 한 자루씩 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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