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상상력 -- > * 131화 *
“바츠, 맞지?”
바츠가 앞에 멈춰 서자, 둘 중 인상이 사납게 생긴 사내가 한 발 다가서며 의심스런 눈으로 물었다. 바츠는 그의 행동에 잠시 경계심이 일었으나, 얼굴 곳곳에 묻어나는 익숙한 느낌에 금방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가 눈치를 살피며 묻지 않고, 자신 있는 태도로 억지를 부리듯 굴었다면 그를 알아보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기억대로라면 지금 그의 모습은 익숙한 얼굴과 다르게 조금 낯선 행동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속으로 가볍게 원망하며, 허탈한 웃음으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가 그제야 조심스런 눈빛을 거두고 덩달아 활짝 웃었다.
“역시 맞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뭐라고 했어! 녀석이 맞을 거라고 했잖아. 이야! 검은 옷 좀 보라고!”
그가 신이 나서 바츠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한 차례 가격하더니, 옆에 선 여자를 돌아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바츠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지훈, 잘 있었어?”
그가 바츠가 내민 손을 바로 잡지 않고, 즐거운 눈으로 잠시 내려다보며 망설였다. 처음 보는 물건을 바라보는 것처럼 호기심과 기대감이 잔뜩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그리고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손을 마주잡지 않고, 손바닥으로 엄지를 낚아채듯 감싸 쥐며 붙들었다.
“당연하지! 너야 말로 잘 지냈어?”
바츠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기는 했지만,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만남에 얼떨떨한 기분을 지우기 힘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심란했던 기분 때문인지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그 우울한 감정이 그와의 만남이 반갑지만은 않도록 방해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가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칫 떨떠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어색한 태도였는데, 그는 자신의 기분 좋은 감정으로 모두 덮어버리고 있었다. 바츠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잡은 손을 당겨 자신의 어깨를 맞잡은 바츠의 어깨와 부딪히도록 만들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 바츠는 그와의 만남에 불만이 없었지만, 크게 기쁜 티를 내기는 어려웠다. 매우 반가워해야 할 일이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따끔거리던 눈동자와 목구멍의 감각이 아직까지 남아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그의 요구에 순순히 반응해주며, 그가 섭섭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는 남은 다른 손으로 반대쪽 어깨를 강하게 토닥여줄 정도로,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얼굴에 드러난 환한 표정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바츠는 애써 목소리에 힘을 줘 대답했다.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그러네. 집사가 되었다지? 정말이구나. 진짜 멋있다.”
바츠의 대답에 그가 부러움과 대견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며 말했다. 바츠는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이 너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부담감으로 약간 짜증이 일었다. 기분이 민감하게 변해 있었다. 어수선한 기분이 작은 것도 날카롭게 받아드리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에게 괜한 불만을 쏟아내기 전에, 아쉽지만 서둘러 자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옆에 섰던 금발의 여자가 지훈의 옆구리를 찔러대며, 관심을 끄는 바람에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지훈이 놀란 듯 돌아보고는, 장난기 넘쳐나는 얼굴로 그녀를 소개했다.
“바츠, 누군지 알겠어? 기억해? 테라치만 보면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애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지훈의 장난스런 조롱에 그녀가 발끈하며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그러자 그가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온 몸을 배배꼬며 옆으로 물러나더니, 혹시라도 또 얻어맞을까봐 벽에 기대며 등을 감췄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통증으로 잔뜩 일그러지는 분노나 억울함 대신 즐거운 기색을 그려냈다. 그는 지금의 분위기 자체에 매우 신이 난 듯 보였다. 그 사이 그녀가 바츠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기억이 잘 안 아니?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그때는 내가 되게 조용했었으니까. 나야, 아네트. 2학년 때 바로 네 옆자리였지.”
바츠는 그녀가 내민 손을 잡으며, 자신의 서운함을 입술을 쭉 내밀거나 한쪽 볼에 공기를 살짝 집어넣는 등으로 애교스럽게 표현하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동글동글한 눈과 코 그리고 얼굴 전체에 얼룩덜룩하게 피어난 주근깨가 그녀를 발랄한 소녀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훈의 간단한 장난에도 얼굴을 붉혔을 만큼 수줍었다. 바츠는 붉어진 그녀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보자,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미사훈련소에 다닐 때, 자신이 있던 1반이 아닌 2반에서 2학년으로 승급한 아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지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비록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그녀와는 특별한 추억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크게 반가움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냥 과거의 인연을 마주친 것에 대한 약간의 기쁨에서 그쳤다.
“어, 그래. 반갑다.”
그녀도 바츠의 그런 마음을 느꼈는지, 어색하게 내뱉는 대답에 무안해했다. 옆에서 등을 벽에 문지르고 있는 지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훈은 그때까지도 통증을 삭히기 위해 차가운 벽에 기대고 있다가, 그제야 이쪽을 향해 다시 다가왔다. 아직 통증이 남아있는지, 얼굴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뒤늦게 그녀의 손찌검이 서러운 모양이었다. 그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아네트가 테라치한테 편지를 전해주고 싶데. 음...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할 게! 사실 어제 오늘까지 빅애스를 개방할 예정이라는 통보 때문에, 아르크 내부 군인들 대부분이 지금까지 경계 근무를 서고 있어. 뭐, 다들 불만이 많지만 어쩌겠어. 그런데 그 이유가 일리트시의 집사 때문이라는 거야. 그가 오늘 떠난다고 하더라고. 우린 왠지 그게 너일 것 같았어. 네 이야기를 들었거든. 네가 집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말이야. 누구한테 들었더라? 아, 맞아! 벨리타한테 들었어. 벨리타가 연구원이 된 건 알아? 어쨌든 그런데 때마침 이 녀석이 테라치한테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거야. 네가 전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말이야.”
지훈이 숨도 쉬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듯 빠르게 말을 하더니, 마지막에는 아네트에게로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때까지도 바츠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떼고는 품안에서 작은 편지를 하나 꺼내놓았다. 바츠는 그 편지와 아네트 그리고 지훈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지훈이 바츠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집사면 헌터들을 전부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사실이야?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일부로 계속 이 근처를 순찰 돈 것도 그 때문이고...미안하다. 서운한 건 아니지?”
바츠는 그가 잔뜩 미안한 기색으로 눈치를 보는 걸 보자,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진한 한숨이 절로 생각났지만, 그건 가까스로 아껴둘 수 있었다. 고개를 가볍게 가로젓고 그녀가 내민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가 반가워했던 것이 진심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어려운 일도 아닌 걸. 게다가 때마침 테라치가 근처에 와 있어. 잊지 않고 전해주도록 할게.”
“정말? 정말이야? 정말이지? 고마워!”
아네트가 오늘 본 것 중 가장 밝은 표정으로, 양손을 깍지 끼고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어깨에 메고 있던 자신의 소총에 옆구리를 얻어맞을 때까지 정신없이 뛰었다. 그녀는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잔뜩 찡그린 미간과 어우러지는, 그녀의 눈가와 입가의 미소가 귀여웠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자, 심란한 기분이 조금 진정되는 걸 느꼈다. 케일리도 언젠가 저렇게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동시에 그런 그녀를 씁쓸한 얼굴로 지켜보는 지훈을 보자, 지난번 테라치가 건네준 작은 쪽지 하나가 생각났다. 바츠는 그것을 꺼내서 지훈에게 보여주었다.
“너 이거 읽을 수 있지? 이게 무슨 뜻인지 알려줄래?”
지훈이 아네트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쪽지를 받아들었다.
“이게 뭔데?”
“모르겠어. 난 그 글자들을 읽을 수 없거든.”
그는 쪽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하고 나서도, 옆에서 얻어맞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어루만지고 있는 그녀에게 몇 번이나 시선을 주었다. 그녀가 민망한 표정으로 괜찮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매우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그 네가 잘하는 고대어 맞지?”
“음...일단 한글은 맞아. 그 고대어. 이거 어디서 난 거야?”
그가 드디어 시선을 바츠에게 옮기며 되물었다. 바츠는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괜한 심통에 그냥 뭉뚱그려 대답했다.
“그냥 주웠어. 밖에는 이런 종이들이 엄청 많이 돌아다니거든.”
그가 다시 한 번 쪽지를 들여다본 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누군가한테 말하는 것 같은데...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그래, 수수께끼. 그대로 읽어줄게 들어봐. ‘난 내가 어떤 나를 만나더라도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차례로 끝까지 힘을 합친다면 다시 내가 되는 걸 알아요. 내가 그 나를 또 한 번 재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으리라 믿고요. 난 당신이 바보 같은 짓을 하길 원하지 않아요. 그건 허황된 망상일 뿐이에요. 우리에게는 아직 충분한 기회가 있어요. 당장 당신의 고집을 꺾어요.’ 라고 되어 있어.”
바츠는 자신이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의심부터 들었다. 심각할 정도로 복잡하게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수없이 등장하는 ‘나’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쪽지를 직접 읽은 지훈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쪽지에 한참동안 고정했다. 그 사이 몸을 추스른 아네트도 슬그머니 다가와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녀 역시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애초에 그녀는 쪽지를 읽을 줄도 몰랐다.
바츠는 그 쪽지를 다시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작별인사를 간단히 하고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더 들여다본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계속 지체할 수 없었다. 빅애스는 이미 필요 이상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지훈과 아네트도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지훈은 뜻하지 않은 어지러운 문제로 넋이 나갔는지 멍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주었고, 아네트는 자신의 편지가 테라치에게 무사히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을 뿐이었다. 바츠는 뒤늦게 아네트가 테라치를 꽤나 좋아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동시에 벨리타가 생각났다. 그녀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그녀와 만남은 다음으로 밀어야 했다. 이미 샤워장을 통과한 뒤였다. 그리고 빅애스를 통과하기 직전, 아델리나와 버니에투와가 불현 듯 생각났다. 바츠는 그 앞에 경계를 서던 군인에게 물었다.
“혹시 어제 온 헌터들이 돌아갔나?”
“어제? 아, 그 둘이 함께 온 헌터들 말하는 거지? 여자 헌터는 돌아갔지만, 남자 헌터는 아직이야. 되도록 서둘러주었으면 좋겠군. 알잖아. 크루엘라와 헤러티커는 정말 무섭다고.”
바츠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지상으로 향하는 언덕을 올랐다. 비라도 내렸는지 평소보다 훨씬 쌀쌀했다. 그리고 언덕을 완전히 오르자, 하늘에서 회색빛 가루가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짙은 먼지처럼 보이는 것이, 지상의 칼바람에 맞춰 이리저리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슴이 갑갑했다. 아까 지훈에게 내뱉지 못한 한숨을 지금에서야 있는 힘껏 토해냈다. 가슴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전진기지에 돌아온 바츠는 입구에서부터 낯선 기운을 느끼고 바짝 긴장해야 했다. 처음 느끼는 이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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