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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32화 (132/268)

< --   10. 상상력   -- >         * 132화 *

전진기지 안에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 나이가 꽤나 많은 여인과 옆모습만으로도 상당한 미모를 느낄 수 있는 여인이었다. 한 눈에 들어오는 둘의 모습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나이가 많은 여인은 매우 친숙한 얼굴로, 막 들어서는 바츠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반겨주었다. 바츠는 그녀의 간단한 습관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벽난로 앞 자리에 여유로운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한쪽 다리를 절고 항상 하얀색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다닌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하얀색 스카프가 방독면을 걸어두는 곳에 나란히 걸려있는 것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일리트시의 장로였다. 그에 반해 남은 다른 여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전진기지 밖에까지 흘러나오는 이질감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주방 쪽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싸늘하다고 느껴질 만큼 차가운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낯선 것만큼 호의적인 태도를 하나도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기세가 대단해서 헌터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라파엘’ 스타드와 견줘도 부족함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강인한 사내 같았다. 입고 있는 검은 옷 위로 그녀가 가진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바츠는 그녀의 부드럽게 굴곡진 몸매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그 옷이 헌터 슈트라는 것을 단 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 위로 자연스런 교태를 발산하면서도, 눈빛으로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특이한 매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머리카락이었다. 단출하게 묶어, 위로 말아 올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독특하게도 보랏빛을 머금고 있었다. 어둠속에서도 하얗게 눈에 띌 것 같은 얼굴 피부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녀는 투박한 옷과 허리춤에 검을 차고도 매우 우아하고 고왔다. 오히려 헌터 슈트에서 섬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장로님, 무슨 일이시죠?”

바츠는 방독면을 벗고는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1년이나 지냈던 곳인데, 오늘따라 낯설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두 여인의 분위기가 전진기지 안의 산소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장로가 아닌 다른 여인의 분위기가 그랬다. 절로 숨이 막히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눈초리가 발목에 족쇄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바츠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를 각별히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그 때문인지 대답은 장로가 아닌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내 아이는 어디에 있죠?”

바츠는 그녀의 냉정한 목소리에 다가가던 걸음을 그대로 멈춰 세웠다. 빠르게 시선만 장로의 얼굴을 다녀왔다. 장로의 얼굴에 미소가 새롭게 보였다. 반가움이 아닌 현재의 상황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는, 바츠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 몸짓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묻어났다. 고작 팔짱을 풀어내는 행동인데도 고혹적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게 무뚝뚝했다.

“당신이 일리트시의 집사죠? 난 프리샤에요. 테라치, 그 아이를 만나러 왔어요.”

바츠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머릿속이 환기되었다. 그녀의 말투나 분위기는 사실 놀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헌터들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나자,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특별하다고 느꼈던 까닭이었다. 단순히 그녀가 미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츠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빠르게 떠올려 보았다. 미사 훈련소 여자 아이들의 선망에 대상이자, 스타드가 거론 될 때면 항상 빠지지 않는 위상을 가진 헌터. 스타드의 막강함에 대등하게 비견되는 감각의 소유자. 그리고 오랜 친구테라치의 어머니. 그것이 바로 프리샤 그녀였다. 바츠는 그녀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니, 그녀에게 ‘아르크의 딸’이라는 별칭을 붙여줄 정도로 아르크가 자부심을 내비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냉혹한 헌터였지만 동시에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내 아이를 찾아줄 수 있죠?”

바츠는 그녀가 다시 한 번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장로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서둘러 아르크의 눈을 조작해 맵을 들여다보았다. 근처에 모두 4명의 코드가 있었다. 둘은 낯설고 둘은 익숙한 것이었는데, 앞선 낯선 코드는 위치상 버니에투와와 프리샤 그녀였다. 버니에투와는 지금까지도 아르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둘 중 하나는 전진기지 북쪽으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었는데, 아델리나의 것이었다.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어디론가 쉽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일리트시 동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아델리나처럼 그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녀와는 다르게 그 목적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곳을 살피고 있다는 것이 움직임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바츠는 마지막에 확인한 코드를 속으로 읊어보았다.

‘100-E.E.-41’

테라치 그였다. 그가 어제 이곳으로 오며 마주쳤던, 칼리에 잔당을 찾아보겠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의 위치가 표시되는 곳이 딱 그곳이었다. 그는 분명 도시 남동쪽으로 언덕이 있다고 말했던 그 곳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바츠는 그에게 이쪽 소식을 메시지로 전했다. 그리고 프리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그녀가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네요. 어디로 가면 되죠?”

바츠는 그녀에게 이곳에서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녀가 이미 자신의 방독면을 집어 드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다. 게다가 곁눈질을 통해 시야에 들어오는 장로의 얼굴은 차라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그녀의 미소가 슬슬 불쾌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함께 가도록 하죠.”

바츠는 다시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테라치에게로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전진기지와 그가 현재 있는 곳 중간쯤의 좌표였다. 정확히는 그가 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거리상 그 언덕이 눈에 들어올 정도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좌표에 도착해보니, 멀리 언덕이 보였다. 대충 1km 쯤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테라치는 아직 도착해 있지 않았다. 그가 있던 지형이 크고 작은 바위들로 가득한, 험하고 복잡하기 때문인지 늦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먼 쪽 지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테라치가 오게 될 방향은 아니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시선을 꽂아놓은 것으로 보였다. 방독면 때문에 그녀의 눈빛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만든 침묵이 그녀를 심란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는 그렇게 느끼기에 부족했다. 눈앞에 사정없이 휘날리고 있는 굶은 회색빛 먼지들의 영향이 큰 것이 틀림없었다.

바츠는 그 먼지들을 아르크에서 다시 나올 때 처음으로 목격했다. 그때는 그저 엉겨 붙은 먼지덩어리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리저리 치이다가 금세 사라지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진기지에서 빠져 나왔을 때 본 그 먼지들은 그 크기도 커졌지만 양도 훨씬 많아져 있었다. 지면을 희끄무레하게 뒤덮었을 정도였다. 메말라 거칠고 삭막했던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쓸쓸해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전보다는 훨씬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 위를 걸으면, 깨끗이 닦은 접시를 손끝으로 문질렀을 때와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신기했다. 뒤로 발자국이 생겨나기도 했다. 휘날리는 먼지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휘날리던 먼지들이 슈트와 망토 위로 내려앉으면 일부가 천천히 사라지며 액체로 변하는 놀라운 광경도 있었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서서히 얼음이 녹아내리듯 변해갔다. 촉감을 느껴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대신 슈트 위로 제법 많이 내려앉았을 때, 꽤 진한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얼음과 얼음물 같았다. 그런데 프리샤는 이 먼지들이 전혀 놀랍지 않은 모양이었다. 좌표에 도착할 때까지 덤덤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좌표에 도착해서 테라치를 기다리는 동안, 바츠가 그 먼지들을 계속 신기해하자 그제야 한 마디 했다.

“눈을 처음 보는 모양이죠?”

바츠는 그때서야 이것이 말로만 듣던 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작은 얼음 결정체들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는 눈! 비를 처음 보았을 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을 느꼈는데, 눈은 왠지 모르게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주었다. 때마침 테라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주변을 뛰어다녔을 것 같았다.

“테라치...”

그를 먼저 발견한 것은 프리샤였다. 그녀는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이미 고개를 그를 향해 돌렸다. 바츠는 뒤늦게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테라치는 그보다도 훨씬 전에 바츠와 프리샤을 발견한 눈치였다. 그는 뿌연 눈보라를 헤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힘차게 내리는 눈 사이로, 그의 망토가 정신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자 기분이 묘했다. 마치 헤러티커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특히 그의 방독면으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면 더더욱 섬뜩하게 보였다. 렌즈를 통해 그의 눈이 붉게 빛나기만 하면 완벽했다.

바츠는 그가 다나올수록 프리샤를 홀로 두고 옆으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의 괴이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프리샤와 마주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를 바라보는 프리샤의 시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츠는 그 시선의 열기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바로 앞에 두고 마주서고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더더욱 멀어졌다. 둘의 모습에 속이 불편할 만큼 울렁거렸다.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겨우 견뎌냈다. 3년 전,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지만 이룰 수 없었던 일이었다. 바츠는 그때가 다시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가 그때 무사히 돌아왔더라면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지 궁금했다. 케일리는 지금 레벨1에 살고 있었을까? 자신은 무사히 미사를 졸업할 수 있었을까? 그 어떤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시간은 너무 많이 흘러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테라치의 어머니는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외톨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바츠는 고개를 먼 하늘로 옮겼다. 검은 하늘이 흩뿌리는 회색빛 얼음알갱이들이, 어려운 만남을 축하하듯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매우 슬프게 보이는 것은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 회색빛 얼음알갱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냉정하고 악랄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는 허공과 지표면을 가로질러 세상을 조각냈고, 바츠의 허전한 가슴마저도 부숴버렸다.

바츠는 그 기분 나쁜 비명소리를 쫓기 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은 어두웠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테라치는 그 비명소리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가 그 비명소리를 쫓아내려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프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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