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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34화 (134/268)

< --   10. 상상력   -- >         * 134화 *

“그런데 분위기가 왜 저런 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테이블 위에 검은 천으로 덮어놓은 것, 그거 혹시 사람 아닌가?”

시장의 긴장된 목소리에 샤오밍이 조금 전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귀찮은지 설명하는 내내 싫증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러자 시장이 의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샤오밍이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상한데? 거긴 칼리에가 오지 않는 곳이지 않나? 거기에 나타났던 적은 거의 없었지 않은가. 정말 손에 꼽을 정도 겠군. 게다가 셀레나가 자주 순찰을 도는 지역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잖습니까!”

결국 샤오밍이 그에게 짜증 섞인 말로 시장을 밀어냈다. 시장이 서운한지 우는 소리로 왜 이렇게 민감하게 구냐고 따져 물었지만, 걸음속도를 올려서 그를 따돌리고 먼저 가버렸을 뿐이었다.

바츠는 얼떨결에 어색하게 남겨진 시장이 민망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샤오밍이 시장의 말대로 지나치게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멘디의 일 때문에 단단히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거기까지였다. 둘의 대화는 더 이상 없었다. 샤오밍은 벌써 샤워장을 통과했고, 시장도 뒤이어 샤워장에 들어섰다. 바츠는 그들에게서 관심을 접고, 안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자리에 앉아있는 장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처음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꼭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셀레나는 장로에게서 조금 떨어져, 바츠와 장로 사이 중간쯤에 서 있었다. 그녀 역시 장로가 계속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 보였다. 바츠는 그런 장로를 보자,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걸 밖으로 꺼내면 이곳을 전부 불태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운을 애써 짓누르며 말했다. 그 감정이 목소리에 날카롭게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신들은 정말 최악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정말 우리가 아니에요. 믿어줘요. 프리샤가 그랬어요. 그녀의 아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호출을 받고 왔다고요. 부사령관! 부사령관이 직접 그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어요!”

장로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평소의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가끔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신의 우아한 품위를 완전히 망가뜨린 적은 없었다. 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초라해졌다. 비굴한 표정이 얼굴에 그려졌고, 목소리는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핑계를 말할 때나 사용할 법한 톤이 되었다. 지금까지 봐온 그녀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녀는 스스로 특별함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이제는 처절함까지 묻어났다.

“스톡홀름 시티. 그곳에 가서 ‘닥터’를 만나봐 줘요! 그럼 다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그만해요. 내가 당신을 그냥 두는 이유는 내게 당신을 심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격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죠. 그를 위해서 기다려주는 것뿐이에요.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속에서 들끓는 뜨거운 기운을 그녀에게 모조리 쏟아내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는 손등 위에 내려앉은 눈처럼 녹아내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그제야 자리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고장 난 몸뚱이가 버거운지 진한 한숨도 있었다. 그 안은 체념으로 가득했다. 그 때문인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생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기력이 다한 것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셀레나가 다가가 그녀를 돕지 않았다면,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을 것만 같았다.

바츠는 그녀가 셀레나의 부축을 받으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입구에 다다랐을 때, 옆으로 길을 열어주었다. 장로는 입구까지 걸어오는 동안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었지만, 입구에 도착하자 별안간 고개를 돌리며 바츠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그 느릿한 걸음도 멈춰 섰다.

“부사령관이 뭐라고 하던가요? 그를 만났잖아요.”

바츠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봐 주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이제는 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츠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오히려 안달난 사람처럼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그가 뭐라고 했죠?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가 어떤 말을 하던가요? 그를 믿나요?”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대답 대신 방독면과 함께 걸려있던 하얀색 스카프를 내려서 건네주었다. 그녀가 스카프를 다시 머리에 뒤집어쓰면 그나마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그녀가 역겨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깊숙이 눌러 쓰길 바랐다. 그러자 그녀가 그제야 바츠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더 이상 자신의 주장에 목을 메지 않고 순순히 바츠의 마지막 호의를 받아드렸다. 그리고는 정말 얼굴이 전부 가려질 정도로 스카프로 머리를 덮더니, 벽난로 구석을 향해 눈치를 주며 말했다. 어느새 목소리도 차분하게 진정되어 있었다.

“프리샤가 가져온 물건이에요. 당신에게는 그녀의 첫 선물이 마지막 선물이 되겠군요.”

바츠는 그렇게 말하는 장로와 셀레나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벽난로가 아니라 그 옆에 놓여있던 축음기였다. 처음에는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다보니, 기존의 검은색 판은 원래 자리에 꽂혀 있는데, 축음기 위에 또 하나가 올려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로가 말한 프리샤의 선물은 바로 저것인 것 같았다.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밀려드는 호기심에 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축음기의 태엽을 감고 작동을 시켜보려고 했지만, 때마침 더그가 도착하는 바람에 그만 두었다.

방독면을 막 벗는 더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이미 이곳에서 돌아간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대충 이야기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그의 커다란 눈에 긴장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런 두 눈으로 바츠를 한차례 다녀간 후, 곧장 테이블 위에 누워있는 검은 흔적에 고정했다. 그는 그곳에서 시선을 쉽게 떼지 못하고 굳어졌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시신을 보는 것이 처음이 아닐 텐데, 꽤나 의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겁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또 그렇게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그가 어깨에 걸고 있는 소총을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기는 했다.

바츠는 그런 더그를 다독여, 그와 함께 프리샤를 전진기지 밖 근처에 묻었다. 그가 그냥 묻게 되면 프레이가 몰려와, 뜯어먹게 될 것이라고 해서 불에 태운 후 남은 잔해를 묻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녀의 검붉은 카니지를 꽂아 표시해 두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아르크의 눈으로 그녀의 사망 소식을, 그녀가 속한 전진기지로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서쪽 전진기지인 보르쉬치에 속해 있었다.

“아르크의 딸이 죽다니...”

더그가 그녀의 묘소 앞에 서서 침통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그대로 얻어맞으며,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뒤집힌 흙 위로 다시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광경과 함께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가슴 깊이까지 밀려드는 숙연함이 지금을 처량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흩날리는 굵은 눈방울과 방독면을 통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뿌연 입김이 분위기를 더했다.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가슴이 무거웠다. 허무함! 그래, 허무함이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바츠는 그 허무함에 자신이 물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더그가 바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돌려세우며 말했다.

“프리샤가 가진 감각은 스타드조차도 범접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네요. 상대의 기척은 귀신같이 알아차려도, 자신의 죽음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걸까요?”

바츠는 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당장의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그를 비롯해 그와 같은 사람들이 헌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헌터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높은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들도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언급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위안을 삼고 싶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바츠는 괜히 헛웃음이 터졌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정작 본인조차도 인간임을 포기할 때가 있었다. 그 어떤 인간도 다른 사람을 수십 명씩 살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낱 인간으로서 이해를 바란다는 것이 정말 우스웠다.

바츠는 크게 숨을 들이켠 후, 길게 내뱉는 것으로 머릿속을 완전히 털어냈다. 감상에 젖어있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프리샤가 다시 살아날 리도 없었고, 테라치가 보통 때처럼 돌아올 리도 없었다. 하루 빨리 고대어로 적힌 수수께끼를 풀어, 놈들의 불순한 계획으로부터 아르크를 지켜내 공헌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이 설한을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멘디를 찾아야 했다. 더그조차도 기껏해야 조금 두께가 있는 가죽옷을 껴입고 몸을 떨기 시작했는데, 그 작은 아이가 변변치 않은 모습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벌써 얼어 죽은 것은 아닐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바츠는 조용히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뒤에서 더그가 따라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일부로 그가 추월해 갈 수 있도록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덕분에 더그는 금방 바츠의 옆을 지나쳤고, 저쪽에 준비해두었던 비클레타에 먼저 올라탔다. 바츠는 그가 비클레타를 완전히 작동시켰을 쯤에야 도착했다.

“오데사 시티로 곧장 갈까요?”

더그가 비클레타 뒤 자리에 올라타는 바츠에게 물었다. 바츠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던데요?”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아닙니다. 그곳은 있습니다. 원래 지명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남쪽으로 하루 종일 가게 되면 옛 도시 터가 있는데, 그곳을 오데사 시티라고 부릅니다. 정확히는 남쪽이라기보다 동쪽으로 좀 더 가야하지만 그곳이 맞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은 곳인데 칼맨도 드나들기 때문에, 그곳에 정착한 야인들도 있죠.”

바츠는 더그의 말을 듣자 어쩌면 멘디를 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보다도, 역시 시장은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불신부터 느꼈다. 그는 정확히 아는 것도 없이 매번 자신의 생각만 내세웠다. 지난번과 조금 전만해도 그랬다. 사람들이 칼리에를 보았거나 그들이 나타났었다고 말하는데도, 그는 자신의 좁은 식견으로 내내 아니라고 부정만 했다. 그럼 테라치가 헛것을 보고, 프리샤가 칼리에가 아닌 아르크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는 부사령관이 말했던 하찮은 수준의 지식으로 스스로의 고집에 갇혀있다는 말에 딱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너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그를 찾아가 한 소리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심란한 기분에 그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대신 더그에게 최대한 서둘러 보자는 말로 재촉함으로서 마음을 다잡았다. 멘디를 찾아야 하는 일이 한시라도 더 급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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