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35화 (135/268)

< --   10. 상상력   -- >         * 135화 *

“저기 보이십니까?”

더그의 비클레타는 수북이 쌓이기 시작한 눈 사이에서도, 그 흔적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옛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막힘없이 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한나절을 달렸을 쯤, 그가 속도를 조금씩 늦추며 앞쪽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츠는 달리는 동안 회색빛 눈이 만들어낸 렌즈의 얼룩을 손가락으로 닦아내고는, 그의 어깨너머로 그쪽을 주시했다. 그러자 이미 몇 차례 보아서 눈에 익은 사각모양의 표지판을 찾아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부식이 많았지만, 대체로 양호한 상태였다. 바츠는 그곳에서 이번에도 역시 숫자와 함께 고대어가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여전히 읽을 수 있는 것은 숫자뿐이었다.

‘Умань 75km, Одеса 261km’

더그가 곁눈질로 바츠가 표지판을 발견한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더 조금 남은 곳이 오데사 시티입니다. 아마 예전에 멀쩡할 때에는 방향을 나타내는 표시도 있었을 겁니다. 밑에 길을 봐도 알 수 있죠. 양쪽으로 나뉘지 않습니까? 우린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합니다. 직진을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 검은 물뿐이거든요.”

바츠는 대답대신 그의 한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어 차례 후려쳤다. 그가 놀라지 않을 만큼의 세기였다. 귀찮은 것은 아니었지만, 몸은 둘째 치고 얼굴이 추위로 아파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겪었던 한 밤중의 추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굳게 다문 입을 이리저리 옮겨보면 양쪽 볼이 뻣뻣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밤이 내리면 추위가 어디까지 강해질지 벌써부터 겁이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앞자리에 앉은 더그가 불어오는 찬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오는 내내 그에게서 약간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지 못하고, 습관처럼 수시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을 보면 꼭 추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습관을 방향을 바꿔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에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다른 때였다면 몰라도 오늘 같은 날은 굵은 눈 때문에 시계가 좁아 큰 의미가 없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지상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 자체로 불안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웅얼대기까지 했다. 그가 앞자리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강한 바람에 의해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듯 했다. 바츠는 그 불만이 좀 심해진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의 어깨를 한 번씩 주물러주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내려놓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그때만 잠시 진정했을 뿐,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는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지난번에 보았던 키예프 시티에 절반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처럼 높고 큰 건물들이 즐비하지도 않았고, 그로인한 압박감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리트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폐허의 흔적들에 가까웠다. 하지만 규모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곳은 적어도 그 낮고 작은 건물들이 끝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이어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십여 개의 높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키예프 시티와는 견줄 수 없었지만 일리트시보다는 훨씬 큰 도시였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도록 하죠.”

바츠는 도시 입구에서 비클레타를 세웠다. 그리고는 더그에게 가장 가까운 건물 안쪽에 비클레타를 숨기도록 지시했다. 비클레타의 소음으로 불필요한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함이었다. 더그는 착실하게 지시를 따르면서도 속삭이는 말투로 자꾸만 뭔가를 웅얼거렸다. 바츠는 그 중 딱 한마디만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제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는 불안을 쉽게 떨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건물 안쪽에 비클레타를 숨겨두고 나오면서, 앞에서 기다리던 바츠의 시선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바츠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입을 닫았다.

“왜 그래요?”

바츠의 물음에 더그가 대답은 하지 못하고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는,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쭈뼛거리기만 했다. 한눈에도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가 겁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불만을 꺼내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말들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린 이제 도착했을 뿐이에요. 먼저 돌아간다고 해도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더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며 바츠의 진짜 의도를 읽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지, 이내 포기하고는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답답함에 스스로에게 화가 난 듯 보였다. 물론 그마저도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여기는 넓지 않습니까? 우리가 찾으려는 건 작은 아이고요! 우린 매우 멀리 와 있습니다. 세상은 넓죠! 그 아이가 이곳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찾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요! 이곳을 언제 다 찾아보겠습니까?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또 다 찾아봤는데 없으면요? 우린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겁니까?”

바츠는 그가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그가 울지 않은 것이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로 인해서 입이 얼어붙었는지, 어물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울먹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어떻게 몇 년씩 지상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이미 걱정과 두려움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군가를 실어 나르거나, 어딘가로 달아나는 일뿐인 것 같았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알아요.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하죠. 그게 아니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추위를 뚫고 이곳까지 왔겠습니까? 그래서 말했잖아요. 먼저 돌아가도 좋다고요.”

“그냥 아이일 뿐이잖아요. 그냥 아이일 뿐이라고요.”

더그가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로 하소연을 하듯 대꾸했다. 얼핏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압니다. 그래서 온 겁니다.”

바츠는 그에게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에 걸고 있는 소총과 넉넉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유용할 정도의 탄약을 가지고, 뭐가 그렇게 무섭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관뒀다. 오히려 그가 더 의기소침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길을 따라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그런 바츠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걸음을 돌려서 다시 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츠가 그럴 기미가 전혀 없자, 뒤늦게 서둘러 달려왔다. 어쩔 수 없다는 걸 느꼈는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뱉은 뒤였다. 대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총구를 높게 들어올렸다. 적들에게 포위된 사람처럼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바츠는 그런 그가 우스웠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오히려 강도가 달려들 것 같았다. 그를 좀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따로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그때 막 아르크의 눈으로 도착한 메시지나 확인했다. 벨리타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2시간 전에 보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안부를 전하기 위함인 줄 알았다. 왔다간 것을 어떻게 들었는지,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특히 케일리와 지훈은 만나고 갔으면서 자신은 찾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섭섭해 했다. 그녀의 투정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미안함이 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내용은 그 기분을 거짓말처럼 빼앗아 갔다.

‘아참, 혹시 케일리에게 특별한 이야기 들은 것 없어? 아니면 조금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케일리...뭔가 이상해. 얼굴에 난 상처들 보았어? 사고였다고 항상 말하지만, 지난 2년간 마주칠 때마다 그녀의 얼굴에서 상처가 없던 날을 본 적이 없어. 물론 매일 마주쳤던 것은 아니야. 하지만 얼굴에만 상처가 난 것이 아니더라고. 팔과 다리는 물론이고 온 몸이 다 멍으로 가득했던 것으로 보였어. 가끔은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남편이 못된 짓을 하는 것 같아. 몰랐는데 그 남자 여자 편력이 있다고 하더라고. 소문으로 들은 거라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분 나빠. 그 집에서 여자 비명소리를 들은 사람도 많다고. 다들 수군거리고 있지만, 따로 말을 꺼내지는 않는 것 같아. 그 비명소리가 케일리의 것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의 어미니 것은 아니라는 건 분명해. 정말 기분 나쁘다고. 걱정 돼. 케일리가 잘 지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겠지? 별 일 없었으면 좋겠다. 너도 마찬가지고. 건강하게 지내.’

바츠는 메시지를 끝까지 다 읽고 나자, 바람이 더 세게 불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옷깃을 스칠 때 들리는 소리가 비웃음으로 들렸다. 정면에서 불어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하지 못하는 자신을 바람이 조롱하고 있었다. 덩달아 눈발도 더욱 굵어지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앞을 살피지 못하게 방해하며 도발하는 것 같았다. 둘의 심술궂은 장난에는 오로지 모멸감만이 존재했다. 카니지를 뽑아들고 싶은 충동을 억세게 씹어내며 그대로 삼켜버렸다. 워낙에 메마르고 거칠어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가슴에 얹히며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더그가 소리치며 주의를 끌지 않았다면 숨이 막혔을 것 같았다.

“집사님!”

그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바츠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곧장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며, 그의 총구가 겨눠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든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가 성인 어깨 높이까지 쌓여있었는데, 그 뒤에서 눈만 내놓고 이쪽을 훔쳐보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더그의 목소리만큼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의 윤곽만으로도 그가 비쩍 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독면도 쓰고 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얼굴이 갖은 얼룩으로 더러웠다. 바츠는 낯선 그의 등장보다도 더그 때문에 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야인인 모양이네요.”

더그의 잔뜩 치켜 올라간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더그는 쉽게 총구를 거두지 않았다.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발포할 기세였다. 바츠는 더그에게 손끝으로 기다리는 신호를 주고, 비쩍 마른 야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질린 얼굴로 두 눈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뒤로 벌러덩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츠는 건물 잔해 뒤로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자 그 뒤에 주저앉아있던 그가 순식간에 다가온 바츠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십시오!”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손이 닳도록 빌기까지 했다. 바츠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를 내려다보며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더그에게 괜한 봉변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신 때문에 그가 봉변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바로 앞으로 몸을 엎드리며 말했다.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죄송합니다! 전 정말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전 눈이 없습니다! 전 바보입니다! 전 여기서 사는 놈팡이일 뿐입니다!”

바츠는 그런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곳에서 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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