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상상력 -- > * 136화 *
“네?”
바츠의 물음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겁에 질린 눈과 의아한 표정이었다. 바츠는 그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물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살았지?”
“모, 모르겠습니다. 5년?”
그가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뭔가 다른 기운을 감지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아마도 살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자 이상한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더 이상 겁을 먹지 않도록, 목소리에도 주의를 기울여 말했다.
“혹시 최근에 갈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른 여자 아이를 본 적 있나? 10살쯤 되는 아이지.”
그가 느릿한 속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별히 신경 써서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경직된 표정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말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작은 소녀를 목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서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서 그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질문을 바꿨다.
“그럼 이곳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을 아나?”
이번에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빠른 속도였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벨트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물건을 하나 꺼내 보이며 다시 말했다.
“좋아. 이게 무엇인지 알지? 애니밀이라는 거야. 피부에 부착하면 하루 정도는 거뜬히 보낼 수 있지. 난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어. 단지 작은 거래를 하고 싶은 것뿐이야. 지상에서는 흔한 그런 거래 말이야.”
그의 시선이 바츠의 손과 얼굴을 차례로 오갔다.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두 눈에 관심이 드리우고 있었다. 어색한 미소도 입가에 그려 넣었다. 안면근육이 고장 난 사람처럼 한쪽이 부자연스럽게 씰룩거렸지만, 바츠로서는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그가 다시 겁에 질리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해주면 이걸 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곳에 정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면 하나 더 주도록 할 거야. 어때, 나와 거래를 할 텐가?”
그의 미소가 점점 얼굴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광대를 타고 오르더니 눈 꼬리마저도 활짝 변했다. 여전히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묻어났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에 대한 반가움이 가감 없이 드러냈다. 바츠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 주었다. 그러자 그는 중간에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못미더운 것인지 바츠의 얼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바츠가 손으로 일어나도 좋다는 신호를 따로 보내줘야 했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얼굴의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의 노력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추위 때문인지 한쪽 볼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오로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바츠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몸을 완전히 일으켰을 때에는, 고르지 못한 자신의 검고 더러운 이를 환하게 드러냈다. 바츠는 그런 그를 확인하고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다시 길로 들어섰다. 더그가 뒤따라 나오는 사내를 향해 다시 한 번 총구를 들이밀었지만, 간단하게 손사래를 쳐서 말려 세웠다.
“설마 저 놈과 함께 가시려는 겁니까?”
더그가 눈앞의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적개심은 많이 거두었지만 여전히 총구는 그를 향해 있었다. 바츠는 그에게 다른 뾰족한 수가 있다면 말해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더그가 짧은 시간동안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총구가 어느새 바닥을 향하게 된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 마땅한 대안을 찾아낸 것도 아니었다. 당장 그보다 이 도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다고 넓은 도시를 막연하게 헤맬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그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서 먼저 불안해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츠가 이미 결심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바츠는 지난번 키예프 시티에서의 일을 통해, 대책 없이 도시를 헤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몸에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건강했더라도 그때의 소동을 피해갈 수 있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고, 생각이상으로 무기력하게 휩쓸렸다. 그저 대응하는 데에 있어서나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어쨌든 더그도 그것을 아는지, 결국 신경질적으로 발밑에 쌓인 눈을 걷어차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더그는 자신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보다 높은 확률을 가늠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함께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마음이 내키고, 내키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쪽입니다. 그곳에 가면 도시의 모든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죠. 지나는 칼맨이나 떠돌이들이 반드시 들리는 곳이니까요.”
사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굳이 앞장서서 걸었다. 애니밀을 얻겠다는 의지로 의욕을 높이고 있었다. 더 이상 자신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 모양이었다. 표정도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사내였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바짝 긴장한 채,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더그가 입 닥치라며 몇 번이고 윽박을 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를 이해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헌터들이 수다스러운 것과 같아보였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바람만 남아있는 황폐한 세상에, 홀로 침묵을 두르고 있다 보면 으레 생겨나는 병이었다. 바츠는 굵은 눈을 용감하게 헤치며 걷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안쓰럽게 보였다. 기름져 무거워진 머리카락마저도 사정없이 휘날리게 만드는 냉정한 바람 때문인 것 같았다. 바츠는 애써 기분을 떨쳐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걸으면 됩니다!”
사내는 바츠와 더그를 도시 중앙 쪽을 향해 안내했다. 도시 밖에서도 볼 수 있었던 높은 건물들이 모여 있는 방향이었다. 도중에 몇몇 야인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황급히 달아나며 몸을 숨겼다. 생각에 잠겨서 길가로 나오다가, 뒤늦게 바츠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놀라자빠지는 사람도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혀끝까지 전부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극히 일부가 바츠와 더그를 안내하던 사내를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내의 걸음은 더욱더 자신감으로 차올랐다. 목소리도 전보다 높아졌고, 말을 거는 빈도도 크게 늘었다. 한 눈에도 그가 일부로 그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더그는 사람들이 눈에 띄면 띌수록, 건물들이 촘촘하게 늘어서면 설수록 더욱도 긴장했다. 총구가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않고 사정없이 움직였다. 휘몰아치는 눈발보다도 더욱더 바빠 보였다. 바츠는 사람들이 겁을 먹고 몸을 숨긴 것은 자신의 검은 슈트 때문이 아니라, 더그의 총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총구에 겨눠진 사람들은 그나마 슬쩍 내놓은 신체마저도 완전히 숨겨버렸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이목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보였다. 지치지도 않는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바츠는 사내를 따라 커다란 호수도 건넜다. 애초에 낮게 설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물이 차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면과 매우 가까운 다리를 통해 건너야 했다. 그마저도 처음에는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대부분 썩은 나무와 크고 작은 돌들로 위태위태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나름 유지보수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콘크리트와 철근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다행인 것은 유속이 빠르지 않았고, 다리는 생각보다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더그가 오랜만에 총구를 내리고 걸었지만, 잔뜩 긴장한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다리를 건너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아르크의 상업 지구처럼 거리를 끊임없이 서성이고 있었고, 길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하나같이 뭔가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허물어지고 텅 비어서, 초라하게 보이던 이전의 거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북적인다는 표현을 써도 괜찮을 만큼 생기가 넘쳤다. 주변 일대가 번화가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거리를 가로지르는 바츠를 발견한 사람들은 모두 양옆으로 물러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칼바람 때문에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들 놀라움과 긴장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집사님, 집사님. 괜찮을까요?”
뒤따르던 더그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뒤를 따라오지 않고, 나란히 옆으로 섰다. 바츠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앞서가는 사내를 따라갔다. 이보다 훨씬 큰 키예프 시티의 번화가가 궁금할 뿐이었다. 여기 만해도 어림잡아 100명은 훌쩍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그곳은 정말 대단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바츠를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바라보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된 더그의 지나친 경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찬바람과 굵은 눈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흡사 거대한 무리가 뭉뚱그려져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체온이 느껴진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일부 헐벗은 사람들조차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특히 가슴을 밖으로 드러내고 있는 몇몇 여자들은 추위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바츠의 시선을 끈 것은 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한 건물이었다. 외벽이 군데군데 무너져 흉물스러웠으나, 모든 건물들이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변 다른 건물들과 비교하면 훨씬 양호했다. 그 입구에 ‘조시안느의 살롱’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진 커다란 널빤지가 보였다. 그 널빤지는 입구와 함께 매우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붉은색 천이 걸려있었고, 녹색과 흰색 염료로 도배되어 있었다.
“여기입니다.”
사내가 멈춰선 곳도 그 건물 앞이었다. 그는 건물 앞에 나란히 세워진 비클레타 근처에 서서 건물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비클레타를 닮은 기계였다. 생김새가 굉장히 흡사했지만 묘하게 달랐다. 보다 더 허술하고 난잡하게 조립되어 있었다. 작동 원리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바츠는 자신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애니밀을 두 개 건넸다. 그러자 그것을 받아드는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만큼, 주변에 몰려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외마디 탄성을 질러댔다. 그리고는 더그에게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한 후 홀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문 앞에 도착하자 더그가 근심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지만 바츠는 오히려 그가 더 걱정이었다. 혼자 남겨진 그가 밖에서 무사히 견디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더그도 그런 사실이 우려스러운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제야 그의 근심어린 목소리가 더그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함께 들어가도록 하죠. 안에서 몸도 좀 녹이고요.”
바츠의 말에 더그가 고민도 하지 않고 서둘러 달려왔다. 더그는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바츠를 대신해, 총구를 들어 올려 뒤쪽을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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