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상상력 -- > * 137화 *
“어서!...오세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앞에 섰던, 한 여인이 반겨주었다. 아니, 놀라주었다. 그녀는 안쪽을 둘러보고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활짝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는데, 바츠와 더그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급격히 굳어졌다. 끝에 내뱉은 말은 그녀가 했다기보다는 관성에 의해서 저절로 밀려나왔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목소리에 전혀 힘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뒤늦게 입가에 건 미소는 억지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 표정으로 고스란히 나타났고, 안내를 위해 안쪽을 향해 휘젓는 손짓은 관절에 강철로 만든 보호대를 찬 것 마냥 뻣뻣했다. 하지만 급격히 굳어진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에는 폐기물 처리장이 절로 떠오를 만큼 시끌벅적하던 내부가 덩달아 인색해졌다.
바츠는 경직된 그녀의 손짓을 뒤로하고, 중앙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보이는 바(Bar)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건물 안은 흥에 겨운 목소리들로 가득했다.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고, 땀 냄새와 더불어 퀴퀴한 냄새로 찌들어 있었다. 값싸고 천박한 냄새들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악취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 냄새들을 향기로 즐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흥에 겨운 소란은 점점 잦아들었다. 마치 잔뜩 움츠린 더그의 어깨 같았다. 10명이 둘러앉아도 넉넉해 보이는 원형 테이블이 빈틈없이 꽉차있고, 벽을 따라 늘어선 크고 작은 사각 테이블 역시도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손님과 접대부들로 가득한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차례로 입을 닫기 시작했다. 오직 위층에서 들려오는 유쾌한 웃음소리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들의 소음은 바츠가 있는 층의 소음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침묵이 전파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 집사님...”
건물 안이 완전히 조용해지자, 등 뒤에 바짝 붙어있던 더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에 자리한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2층 난간에서 내려다보기 시작하는 십 수 명의 시선들은 그 위화감을 배가 시켰다. 그는 총구를 들어 올려야 하는 오기마저 잊고 바짝 긴장했다.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나름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달랐다. 그들의 시선에서 그 어떤 위협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조금 짜증이 일 뿐이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주목된다는 것은 언제나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특히나 과거 아르크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면 기분이 언짢을 정도였다.
“무, 무슨...뭘로 드릴까요?...”
바에 다가서자 건너편에 섰던 사내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중간에 바츠의 어깨너머로 뒤쪽을 한 차례 확인하고, 2층을 향해 시선만 들었다 놓는 것이 보였다. 워낙 약삭빨라서 눈치 채기 힘든 움직임이었으나, 그 역시 더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그 의도가 너무도 쉽게 드러났다.
바츠는 그의 시선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물었다.
“아이를 찾고 있다. 10살 쯤 된 소녀지.”
사내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바츠의 어깨너머를 오갔다. 그러더니 별안간 어디서 자신감이 생겨났는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대답했다. 한 눈에도 한결 여유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라면 많지요. 여기저기 서빙 하는 아이들만 해도 벌써 5명입니다. 테이블에 손님들과 함께 앉은 아이들까지 하면 족히 30명은 넘고요. 그리고 이쪽은 정말 어린 아이입니다.”
사내가 고개를 까닥여, 바 저쪽 구석에서 마른 수건으로 잔을 닦고 있는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바츠는 그가 갑자기 여유롭게 태도를 바꾼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의 목소리에 여전히 불안감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는 지레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가 가지게 된 여유는 그의 것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바츠는 그가 고개로 가리킨 아이를 흘깃 쳐다보고 나서 다시 말했다.
“좋아. 우린 저런 아이를 찾고 있어. 정말 작은 아이지. 혹시라도 나와 말장난을 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군. 난 지금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거든.”
“말장난이라니요. 우린 이곳에서 아가씨들을 정말 아이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만! 거기까지야. 넌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돼. 내가 찾고 있는 아이는 혼자서 왔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 왔을 수도 있어. 혹시 내게 알려줄 만한 정보가 있나?”
사내의 시선이 또 한 번 바츠의 어깨너머를 다녀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츠의 으름장 때문인지 부드럽지 못하고 중간에 두어 번 버벅댔다.
“글쎄요...”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아이가 꽤 쓸 만한 방독면과 작은 검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야. 작은 검은 당장 버려도 상관없지만, 방독면은 그렇지 않지.”
“귀한 물건이니까요. 방독면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라면 눈에 띄었겠군요.”
바츠는 그가 호응해오자, 얼른 테이블 위로 애니밀을 하나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그가 선 방향 쪽으로 검지를 이용해 슬그머니 밀어 넣다가,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로 중간쯤에서 딱 멈췄다.
“그렇지. 아마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을 거야. 다 큰 어른도 아니고 꼬마가 혼자서 방독면을 쓰고 다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지.”
“아이기스거나 아르크 주민 그것도 아니면 전진기지의 주민들이겠죠.”
그가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바츠의 검지 밑에 깔린 애니밀에 시선을 고정했다.
“말이 좀 통하는 것 같군. 뭔가 알 수 있는 것 없을까?”
바츠는 애니밀을 누르고 있던 검지를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리다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빠뜨린 것처럼 그를 향해 튕겨 주었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빠져나간 애니밀은 그를 향해 직선으로 테이블 위를 달려 나갔고,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는 애니밀이 테이블 밖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날렵하게 받았다. 바츠는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손에 들린 애니밀을 바라보았다. 마치 꿈속에서 대단한 행운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바츠의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눈치를 보고는 연거푸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돌려놓았다. 전과 큰 차이가 없는 굳은 얼굴이었는데, 어색함까지는 지우지 못했다. 그가 말했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요. 여긴 보시다시피 사람들이 많아서요. 전부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그가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뒷목을 긁적이며 바츠의 얼굴을 살폈다. 방독면 때문에 표정을 훔쳐볼 수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시도했다. 바츠는 그런 그의 의도를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애니밀을 하나 더 꺼내놓으며 말했다.
“영리하군. 그 영리함이 내 기대에도 미쳤으면 좋겠군.”
바츠가 말을 마치자,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큰길을 따라 북쪽으로 더 가게 되면 커다란 건물들이 있습니다. 워낙 높아서 멀리서도 눈에 띄죠. 모두 넷인데, 그 중에 가장 높은 건물로 가면 됩니다. 하얀색 해골이 그려져 있어서 찾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칼리굴라 패거리들이 있는 곳이죠.”
“칼리굴라?”
“네. 진짜 이름은 모릅니다. 덩치가 산만한 사내인데, 몇 년 전에 이곳에 나타났죠. 지금은 이곳의 실질적인 지배자입니다. 사람들을 상대로 세금을 걷죠. 이곳에서 어린 아이들을 사고파는 장사도 하고요. 요 며칠 전에 특이한 아이가 하나 왔다고 하더군요. 작고 사나운데 비싼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온 건가?”
사내가 고개를 가로젓고 대답했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그런 곳에 스스로 갈 만큼 바보는 없을 겁니다. 칼리굴라 패거리들은 이 주변에서는 유명한 강도들이거든요. 저쪽에 그 패거리가 때마침 와 있네요. 자세한 건 저자들한테 물어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매번 와서 공짜로 얻어먹는 것도 피곤한데, 오늘따라 눈치를 엄청 주는 군요.”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츠의 어깨너머를 흘겼다. 그리고는 마지막에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는데, 장내가 고요했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바츠를 제외하고는 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다.
바츠는 꺼내놓은 애니밀 하나를 마저 사내에게 건네고 몸을 돌려세웠다. 사내가 내내 눈치를 살피던 곳이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테이블 앞이었다. 그곳에는 얼굴에 갖은 흉터를 새겨놓고 있는 건장한 남자 다섯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전부 자신의 무릎이나 바로 옆자리에 헐벗은 아가씨들을 끼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들의 시선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저런 눈은 이미 익숙했다. 그보다 신경 쓰인 것은 그들의 복장 여기저기에, 하나씩 새겨진 하얀색 해골들이었다. 방금 전 말로 들었을 때에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언젠가 한 번 본 듯한 인상이었다. 딱히 기억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츠는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더그가 작은 목소리로 몇 번 불러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그가 자신을 왜 부르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에 가까워질수록 더더욱 알기 쉬웠다. 그들이 함께 앉아있는 테이블 외에도, 인접한 주변 테이블에 앉아있는 다른 남자들 모두가 그들의 일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20명 남짓 되는 숫자였다. 그들 역시 하얀색 해골을 하나씩 옷에 그려 넣고 있었다.
“헌터가 이런 문제에도 관여하나? 우리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이 헌터들 아닌가? 그게 룰 아니었나?”
바츠가 다가서자, 그 중 가장 여유로운 자세를 하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다른 사내들이 허리를 세우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심지어 일부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만은 아주 차분하고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대며 한가로운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바츠는 그의 콧등에 난 흉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칼리굴라를 안다지?”
“제길, 왜 헌터가 우리 일에 관여하는 거야!”
그 사내 덕분인지 바츠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바로 옆자리에 있던 사내 역시 덩달아 자신감을 찾으며 대신 소리쳤다. 그는 한쪽 윗입술이 어딘가에 걸렸던 것처럼 위로 찢겨져 있었는데,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두었던 여자의 가슴을 보란 듯이 입으로 농락했다. 여자는 이곳의 접대부로 보였다. 겁에 질린 얼굴로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녀의 소심한 반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내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더 거칠게 그녀를 괴롭혔다. 바츠는 다시 말했다.
“그래,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헌터가 아니야. 난 일리트시의 집사다.”
바츠의 대답에 두 사내가 동시에 움찔했다. 특히 접대부의 젖가슴을 입으로 주무르던 사내의 모습이 도드라졌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따라 침을 질질 흘려 내리며, 슬그머니 시선만 옮겨 바츠를 살폈다. 콧등에 흉터를 가지고 있는 사내가 눈빛만 살짝 바뀐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놀란 기색을 보였으면서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여길 점령이라도 하려는 셈인가? 집사가 왔다면 최소 헌터 서넛에 무장 군인도 10명은 함께 왔겠군. 집사가 왔던 것이 20년도 넘었다고 들었는데...그때 이곳에 헤러티커가 다섯 놈이나 나타났었기 때문이었지. 왜? 헤러티커 군대라도 찾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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