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상상력 -- > * 141화 *
“이곳은 자유로운 곳이었어요.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죠. 어린 아이들을 사고팔고 하는 건 생각도 못하던 일이죠. 가끔 고약한 성격의 떠돌이들이나 무례한 노상강도들이 찾아오면 시끄러워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조용하고 평화로웠죠. 나름대로 말이에요. 하지만 그 놈이 나타나면서 달라졌어요. 놈은 근처를 떠도는 노상강도들과 떠돌이들을 끌어 모았죠. 그 수가 수십 명이었어요. 방금 당신이 열댓 놈을 처리했으니, 좀 줄어들었겠군요. 어쨌든 그렇게 무뢰한들을 모아서 단체를 만들었는데, 스스로 ‘프라이토리아니’라고 칭했죠. 그리고 자신은 ‘칼리굴라’라고 부르도록 했어요.”
바츠는 그녀가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한숨만 났다. 기대했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원하던 대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가 매우 못마땅했다. 이곳의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늘어놓은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헛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어떠한 실속도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소개를 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돌아섰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츠는 쉽사리 몸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를 외면하고 그냥 떠날 수 있음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전부 들어주고만 있었다. 그녀가 중간 중간 몸을 움직이며 가슴이 흔들리도록 만드는 행위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시선이 오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저 눈에 띄는 움직임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반응한 것뿐이었다. 물론 그녀의 가슴은 정말 예뻤다. 눈 덮인 언덕 위에 붉은 꽃 한 송이가 핀다면 그녀의 가슴이 절로 떠오를 것 같았다. 그 꽃에 가끔씩 실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옆에서 더그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매혹적인 움직임이 의식적으로 의도된 행동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가 길어지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관심을 떼지 못하도록 노련한 기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옆에 선 더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잃었던 기운을 끓어오르는 남성으로 채우고 있는 듯 보였다. 이곳에 올라온 이유는 이미 잊은 것 같았다.
바츠는 그녀의 영악함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애써 따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외면하고 몸을 돌려세울 기회도 충분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그녀의 그 요염한 몸짓보다도 그녀의 목소리에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하는 원망 때문이었다. 그녀의 그 원망어린 목소리가 발길을 계속해서 붙잡았다. 그녀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놈들은 잔인무도했죠. 먹을 것을 구하고 돈이 된다면 무슨 짓이든 했어요. 처음에는 이곳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보호비를 받아갔죠. 다들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정말로 외부로의 침입을 막는 데에 있어서 앞장 서주기는 했으니까요. 정작 그들이 침략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말이죠.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진 무력에 저항할 용기가 없었죠. 그래도 그들은 나름 돈 값을 했어요. 몇 번이나 우리를 대신해서 도시를 지켜주었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어요. 보호비는 점점 올랐고, 무려 30일마다 인간의 송곳니를 두 개씩 내도록 했죠. 알고 있어요? 인간의 송곳니 1개가 어금니 10개의 값어치를 하고, 어금니 1개가 프레이 앞니 10개의 값어치를 한다는 것 말이에요. 프레이 앞니 1개는 새끼손가락 5개의 값어치를 하죠. 그래서 가난하고 힘도 없는 사람들 중에는 새끼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치아가 고른 사람도 드물죠. 어쨌든 그건 매우 큰돈이에요. 이곳에서 술을 한잔 팔면 손톱 1개를 받죠. 손톱 50개를 모아야만 새끼손가락 한 개의 값어치를 하고요. 이해가 되요? 정말 터무니없는 요구란 말이에요. 그 보호비를 내지 못하면 도시를 떠나야 한다며 협박을 했어요. 그리고 다른 것으로 대신해도 된다고 말했죠. 그 다른 것이 뭔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우린 처음부터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죠. 결국 다들 들고 일어나고 말았어요. 하지만 놈들은 우리보다 강했죠. 우리가 가진 무딘 칼이나 몽둥이로는 어림도 없었어요. 그런 건 떠돌이들이나 노상강도들에게나 통하는 것들이었죠.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내가 가진 9mm권총이 고작이었어요. 탄약도 몇 발 없죠. 하지만 놈들은 훨씬 큰 총도 있었고 탄약도 많았죠. 무엇보다도 정말 날이 바짝 선 검을 지니고 있었어요. 우리는 간단하게 굴복해야만 했죠. 그래도 나름 성과는 있었어요. 보호비로 프레이 앞니 3개만 지불하도록 말을 바꿨거든요. 대신 놈들이 눈을 돌린 것이 바로 인신매매에요. 어디에나 부자들은 있고, 어디에나 노예는 필요하죠. 꽤나 큰돈을 벌고 있을 거예요. 게다가 작고 어린 여자아이들은 지상에서 매우 인기가 많죠.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여자아이들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거든요. 그래서 떠돌이들 중에는 일부로 여자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녀석들도 있죠.”
바츠는 이제야 그녀가 이토록 오랫동안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꾸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했던 이유도 납득이 됐다. 그녀는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자신의 요구를 늘어놓은 뒤에 변명하듯 말을 잇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에 대한 합당한 명분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에게 그간 많은 설움을 당한 모양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까 바텐더의 탐탁지 않았던 반응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미루어볼 수 있었다. 꽤나 괴롭힘을 당한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녀는 도와달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 같았다. 앙갚음을 하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복수에 자신이 함께 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바츠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어떻게든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으로 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그녀의 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미안함이 생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편승한 복수를 한다면 별로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건 온전히 그녀의 복수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더욱더 냉정하게 굴었다.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었고, 그것이 그녀의 가치였다. 그녀는 여기서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술을 팔고 마시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이미 말했지. 난 당신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니야. 이곳을 도우러 온 것도 아니지. 당신들은 내 관심 밖이다. 당신들의 일은 당신들끼리 해결하도록 하라고. 난 단지 당신에게서 그 ‘칼리굴라’라는 녀석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은 것뿐이야. 믿기 어렵겠지만, 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특히 혼란스러워질 정도라면 정말 질색하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방해되지 않을 거예요. 나 하나쯤은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요. 그냥 놈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예요.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녀가 바츠의 단호한 목소리에 갑자기 조급함을 느꼈는지, 방금까지 가지고 있던 여유와 교태를 훌훌 털어버리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덕분에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은 크게 요동쳤고, 더그가 마른 침을 매우 어렵게 삼키는 소리를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뭘 해야 나를 데려가 줄 건가요? 대가는 지불할게요. 뭘 원하나요? 내 딸을 줄까요?”
그녀가 애원하듯 말했다. 본능적으로 이번이 아니면 자신이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따라나서기 위한 의지를 뜨겁게 불태웠다. 못된 요구를 하더라도 전부 들어줄 것만 같았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당신의 딸은 내게 필요 없는 것이야. 당신은 내가 바랄만한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지.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내가 놈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나 알려주면 돼. 게다가 방금 전에는 아이를 사고팔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들과 다를 것 없이 구는 군.”
“파는 게 아니에요. 당신에게 주는 거죠. 당신은 그 아이에게 당신의 씨를 주면 돼요.”
바츠는 그녀의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대답에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사그라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만큼 절박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고 대꾸했다.
“그다지 반갑지 않는 소리군. 요구를 하고 대가를 지불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는 것이 옳은 것 아닌가? 하지만 당신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을 내놓고 있어. 오히려 내게서 더 얻어가는 일만 하려고 하는군. 난 장사꾼은 아니지만 바보도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아?”
“당신 혼자서는 힘들 거예요! 아마 로비에서 발목이 잘리고 목이 따이고 말겠죠!”
그녀가 자신의 뜻대로 잘 되지 않자 화가 났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그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말려야 할 정도 격앙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호언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조금 전 1층에서의 난리를 벌써 잊은 것으로 보였다. 불편해지던 심기가 그녀에 대한 비웃음으로 괜한 즐거움이 되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그 기운을 느꼈는지, 자신을 부여잡은 사내의 손길을 거칠게 쳐내고는 더욱더 발끈하며 소리쳤다.
“당신은 그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대체 누구지? 얼마나 비밀스럽기에 나에게 겁을 주려는 건지 모르겠군. 그가 헌터보다 대단한가?”
바츠는 흥분한 그녀의 모습에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녀가 숨이 찬 사람처럼 거칠게 콧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나름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몰라요.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모두 그를 ‘칼리굴라’라고 부를 뿐이에요. 그가 그렇게 시켰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있는 건물 사정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죠. 그의 패거리 중에서도 몇 명만 알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나죠.”
바츠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조금씩 들뜬 던 기분을 단 번에 잠재웠다.
“드디어 나와 다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인 것 같군.”
“여자가 이런 곳에서 아무런 대비도 없이 장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작 세금으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느냐고요.”
그녀가 바로 전 흥분을 모두 잊고, 이제는 얼굴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자극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내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군. 난 그런 것에 관심 없다고 했잖아. 대답을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군. 그래서 당신이 그곳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가?”
“물론이에요. 아주 잘 알고 있죠. 놈들의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낱낱이 알고 있죠.”
“그럼 그걸 말해. 자꾸만 대화가 반복되고 있어서 난 지금 매우 짜증이 나려는 찰나였거든.”
그녀는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입가에 묘한 미소를 걸었다. 이제야 뭔가 자신의 뜻대로 되고 있는지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동시에 새침한 표정으로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려세우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겼는데, 그로인해 흔들리는 깨끗한 가슴 때문인지 매우 음흉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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