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상상력 -- > * 142화 *
“내가 말하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죠?”
“내 짜증을 감당해야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낭비된 시간도 책임을 져야 할 거야.”
“난 당신이 보다 신속한 일처리를 원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날 데려가지 않으면 말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자신감을 되찾고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는데, 한결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 흥분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자신의 가슴 밑에 척하고 팔짱을 끼는 오만한 행동마저 보여주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그런 태도보다는 안쪽으로 바짝 모아지는 그녀의 가슴이 더욱 눈길을 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가슴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본 더그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호흡을 내뱉으며 몸을 반대쪽으로 휙 하고 돌려버렸다. 바츠는 그제야 그녀가 여유를 되찾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더그는 지금 그녀의 요염한 모습에 혼쭐이 나는 통에 한껏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극도의 긴장감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금은 단지 불편해진 아랫도리에 놀란 것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에게 언제든지 달아날 수 있도록 말은 해두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불행이 그를 먼저 찾지 않았을 때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이곳에 그를 홀로 두고 다녀오기에도 애매했다. 그는 함께 가든, 이곳에 남겨지든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워 보였다. 그는 아직 겁쟁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는 쭉 지켜보며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대체 따라가려는 이유가 뭐지? 진짜 이유 말이야. 복수를 원하는 거라면 그만 둬. 나와 함께 간다고 하더라도 놈이 당신의 손에 죽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라고.”
바츠는 그녀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슬픈 눈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당신도 내말을 듣지 않고 있군요. 말했잖아요. 난 그저 옆에서 놈이 죽는 것만 봐도 된다고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바츠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당장은 착각으로 인해서 쾌감을 느낄지 몰라도, 결국에는 자신의 무능함에 회의감이나 느껴야 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필요이상의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를 허무로 이끌 것이다. 바츠는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닫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보였다.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쪽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은 몰라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말이죠.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이해할 수 없겠죠. 마음먹은 대로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내가 주제 넘는 건 아니잖아요. 그저 놈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직접 두 눈으로 말이에요. 그게 그렇게 어리석은 일인가요?”
바츠는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온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집착하지? 놈들에게 당한 것이 그렇게 억울하고 분한가?”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츠의 눈을 한참동안 올려다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놈이 내 가족을 살해했거든요.”
바츠는 자신이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보다는 의무감이 더 묻어나고 있었지만, 그 의무감은 어떻게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함께 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도 않고 내키지도 않는 못마땅한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좋아, 함께 가도록 하지.”
바츠의 대답에 그녀가 기쁨에 겨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더그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게 만들었을 만큼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금세 다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그녀가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며 민망한 모습을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감격스런 감정을 한동안 온몸으로 표현했다. 가슴이 출렁이며 시선을 잡아끄는 것도 모를 정도 도취되어 있었다. 그저 함께 갈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무안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부터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출되고 있었다지만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더그가 연거푸 헛기침을 하면서도 곁눈질로 흘깃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양팔을 벌리고 바츠에게로 달려들기까지 했다. 자신의 들뜬 기분을 같이 나누고 싶은 눈치였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힘껏 밀쳐내 버렸다. 그녀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나며 넘어질 뻔했지만 따로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당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해. 어디까지나 당신은 내게 안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정말 이럴 거예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을 잇는 바츠에게 퉁명스런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바츠의 쌀쌀맞은 태도가 매우 서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용케 균형을 잃지 않았고, 바츠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었더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과는 다르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도 특별히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쓸데없이 피곤하게 굴지 마. 그 시간에 떠날 채비를 하는 게 더 낫겠군. 그대로 갔다가는 놈들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죽고 말거야.”
바츠는 그녀의 불평은 가볍게 무시하고, 그녀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그녀는 상의를 아예 입지 않은 반라의 몸이었다. 발목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우단 치마를 입고 있었을 뿐이었다. 밖에 나가게 되면 얼어 죽기 딱 좋았다. 머지않아 어둠도 내릴 것이다. 눈이 내리는 지상의 어둠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욱더 들뜰 뿐이었다. 바츠의 지적을 교태가 흐르는 야릇한 미소로 받았다. 동시에 한쪽 치맛자락을 허리까지 끌어올리며 자신의 도담한 안쪽 허벅지를 보여주었는데, 그곳에는 검은 밴드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밴드에는 작은 총이 고정되어 있었다. 아까 말한 9mm권총이었다. 그녀가 그 총을 뽑아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내 몸은 내가 지켜요.”
바츠는 그녀가 자신의 총을 얼굴 바로 옆까지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둘러야 했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표정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10살 철부지로 보였다. 그러자 그녀가 흥이 묻어나는 콧방귀를 뀌고는 관능적인 눈으로 흘기며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당신 정말 귀엽게 생겼어요.”
바츠는 뜬금없는 그녀의 도발적인 말투에 울컥 가슴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억울한 모함을 당했을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짓누르며 진정하긴 했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끈하는 감정을 거칠게 방독면을 뒤집어쓰는 것으로 대신 표현했다. 그리고는 차갑게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는데, 뒤에서 그녀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신경을 더욱 자극했다. 순간적으로 다시 몸을 돌려 세워 으름장을 놓고 싶었으나, 막 스치는 더그를 보며 생각을 접었다. 더그가 고개만 돌린 눈을 깜빡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웃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지, 돌아보지 않아도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경박한 몸짓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 다행이었다.
바츠는 더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욱 경쾌하게 변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애써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외면했다. 바로 뒤를 쫓는 더그의 발소리에나 집중했다. 목재계단을 울리는 그의 발자국소리가 중간에 두어 번 머뭇거렸다. 그녀의 퇴폐적이거나 육감적인 몸짓에 아직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가 자극하기 위해 일부로 그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뜻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진심이라고 생각될 만한 진지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녀를 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애써 쓴웃음으로 쓰린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금방 기분을 풀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요!”
1층에 막 내려섰을 때였다.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자신을 버려두고 간다고 생각했는지, 허겁지겁 달려와 사정하듯 외쳤다. 그녀에게서 애원하는 목소리로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왠지 통쾌한 기분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한껏 좋아지는 기분으로 돌아보자, 그녀가 2층 난간에서 애를 태우는 얼굴로 초조하게 손을 뻗고 있었다. 조금 전 조롱하던 그 여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준비하고 오라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앞에서 더그와 함께 잠시 머물렀다.
그 사이 1층은 아까의 소동이 제법 지워져 있었다. 정확히는 지워지고 있었다고 해야 했다. 아직 바닥에는 혈흔이 제법 남아있었고, 깨지고 부서진 집기들이 한쪽에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애니밀을 줍기 위해 한때 경쟁했던 사람들로 보이는 일부가 열심히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몇몇도 함께였다. 그리고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반대쪽에는 2층에 있던 사람들로 보이는 일부가 소동의 영향을 받지 않은 멀쩡한 자리를 차지한 채, 술과 여흥을 마저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품안에 안은 접대부들의 가슴이었지만, 문 앞에 선 바츠도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따금씩 문 쪽을 향해 시선을 옮기고는 했다. 일부는 접대부의 가슴보다도 더 관심을 보였다. 여인의 알몸을 탐닉하는 것처럼 눈으로 바츠의 온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긴장감과 더불어 호기심이 잔뜩 묻어나는 눈길이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어색하게 시선을 거두고는 했다.
“가요, 이제.”
조시안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바츠가 그들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위에 소매가 긴 청색 데님 조끼를 걸치고 왔는데, 안에 프레이의 가죽과 털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상의를 받쳐 입고 있었다. 프레이의 가죽이 많이 두껍지 않아서인지, 그녀의 맵시가 잘 드러나고 있었다. 기존에 입고 있던 검은색 치마와 꽤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다만 방독면까지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앞에 도착한 그녀가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바츠가 안타까워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꺼림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애써 모른 척 고개를 가로젓고는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그가 뒤를 바짝 쫓았고, 그녀는 그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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