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상상력 -- > * 143화 *
밖은 건물에 들어서기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 아직 밤이 되려면 시간이 꽤 남았지만,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회색빛 눈 때문이었다. 조금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밤을 빠르게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어떤 때는 왼쪽으로 그리고 다시 어떤 때는 오른쪽으로 휘몰아치는 눈발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발목 높이까지 쌓인 눈을 자신의 머리와 어깨에도 쌓아두며 바츠의 발길을 막았다.
바츠는 그들을 단 번에 알아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몰려들었던 주민들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반월 모양으로 건물을 빙 둘러싼 모습이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이곳까지 안내해주었던 그 사내도 보였다. 대부분 헐벗은 몸이었는데도 용케 견뎌내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정신들이 나갔어? 다들 돌아가! 단체로 얼어 죽고 싶어서 그래?”
가장 뒤에 따라 나온 조시안느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앞으로 튀어나가 앙칼지게 호통 쳤다. 방금 전 건물 안에서 보았던 사근사근하거나 요염하고 관능적이었던 여성스러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사내 못지않은 패기로 그들을 나무랐다. 이쪽저쪽으로 손짓을 하며 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꽤나 당찼다. 바람에 휘날리는 회색빛 눈과 꼭 닮아있었다. 나부끼는 그녀의 머리칼과 옷깃들이 그녀를 더욱더 역동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결국 각자 발길을 돌려 하나둘 흩어졌다. 그녀의 손짓에 내쫓기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들의 뒤통수에까지 소리를 질렀다.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왜 날 그렇게 봐요? 아까도 그랬잖아요.”
그녀가 다시 돌아와 물었다. 바츠는 이번에도 역시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만 한 차례 으쓱했을 뿐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건물 앞을 둘러싸고 있던 주민들과 비슷한 눈으로 바라봤다. 웃음기가 만발한 얼굴이라는 점만 달랐다. 그들이 잔뜩 굳어진 얼굴이었었다는 것과는 다르게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대답대신 어서 앞장서라며 다그쳐야 했다. 쓸데없이 몇 번이나 지연되는 것 같아 못마땅했다. 그녀는 기회만 되면 자꾸만 불필요한 언행으로 시간을 소요시켰다. 그녀를 데려가는 것이 괜한 짓은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바츠의 탐탁지 않은 기분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수다스럽게 변하며 점점 더 신이 나고 있었다.
“혹시 가슴이 보이지 않아서 서운한 거예요? 내 가슴 뚫어지게 봤었잖아요. 안 그래요? 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걸요? 그렇죠? 어때요? 정말 예뻤죠?”
그녀는 바츠를 안내하는 내내 잠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옆에 나란히 붙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더그가 뒤로 밀려난 채 소외되고 있을 정도였다. 가끔 돌아보면 그가 잔뜩 움츠린 채 묵묵히 따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깨에 건 자신의 소총은 덜렁덜렁 내버려두고 팔짱을 낀 모습이었다. 추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반해 바츠는 추위에서 나름 자유로웠다. 전에는 보통의 밤만으로도 으슬으슬 떨었을 테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모두 웜업 콘솔 덕분이었다. 슈트가 체온을 유지시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제법 추위를 잘 견뎌내고 있었다.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기는 했지만, 뒤따르는 더그와 비교하면 멀쩡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는 모습은 활기차 보이기까지 했다. 붉어진 얼굴로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말들이었다. 가끔은 묻기도 하며 바츠의 반응을 살피기도 했지만 바츠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바츠가 그녀에게 하는 말은 오로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것뿐이었다.
“이쪽이 맞나?”
곧게 뻗은 대로만 쭉 따라가고 있었지만, 종종 갈림길이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녀는 대답을 하고나서 또 다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부분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사랑스런 딸인 레이니를 꼭꼭 숨겨서 자신만 보고 싶다는 둥, 자신의 어머니는 못 생겨서 보기 싫다는 둥 시시콜콜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아무리 길어져도 바츠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바츠의 관심은 그가 있는 건물로 가까워질수록 점점 높아지는 주변의 건물들과 그 건물들 중 일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쏠려있었다.
그녀가 안내하는 길은 인적이 점점 드물어졌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갔고, 주변 건물에서는 더 이상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버려져 텅 빈 도시 특유의 음산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자, 주변 건물 몇몇에서 특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대부분 5층 높이 이상의 건물들 꼭대기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정 간격을 두고 나름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 앞을 지나게 되면 어딘가를 향해 깃발을 흔들고는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전부 검은색 깃발을 흔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등장은 주민들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는 지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바츠는 그 모습이 몹시 신경 쓰였다. 추위에 몸을 떨고 있는 더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던 그녀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녀의 시선 역시 순간적으로 그곳을 다녀오고는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애써 태연하게 말을 멈추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바츠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바츠는 그녀에게 물었다.
“저건 뭐지? 아까부터 굉장히 신경 쓰이는 군.”
바츠는 그녀가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그들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그러자 그녀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한 번씩 옮기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칼리굴라의 수하들이에요. 저렇게 해서 정보를 본거지로 알리죠. 놈이 머물고 있는 빌딩 말이에요. 그곳으로 정보를 보내는 거예요.”
“무슨 정보를 보낸다는 거지?”
“당신이 가고 있다는 정보 말이에요. 지금 보세요. 다들 검은 깃발을 흔들죠? 헌터를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가는 방향 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죠? 거리까지 알 수 있죠. 헤러티커가 나타나면 빨간색 깃발을 흔들고, 그 외에는 노란색 깃발을 흔들죠.”
“그럼 내가 가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소리군.”
“그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이러면 당신을 데려온 의미가 전혀 없는데?”
바츠는 그녀의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가 불쾌했다. 기껏 도움을 줄 것처럼 말해놓고 이제 와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바츠의 시선을 느끼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난 건물 내부를 말한 거였어요. 저 큰 빌딩 내부를 전부 돌아다닐 생각이에요? 난 최대한 그에게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밖의 사정은 달라요. 샬롱부터 그가 있는 곳까지 어떻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겠어요?”
바츠는 그녀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어야 했다. 너무 황당해서 짜증조차 일지 않았다. 추위와 더불어 감각을 마비시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가 막힌 행동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와 함께 놈의 빌딩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외벽 여기저기에 하얀색 해골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정면에는 무려 3층 높이에 다랄 정도로 커다란 해골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밑 입구에는 소총으로 무장한 사내 둘이 지켜서고 있었다. 바츠는 그녀와 함께 그들 앞으로 정면으로 걸어가야 했다. 그녀가 그들의 총에는 탄약에 없다고 자신 있게 주장한 덕분이었다.
“뭐야! 뭐냐고! 조시안느? 조시안느! 대체 뭐하는 짓이야! 멈춰!”
그들은 일찌감치 바츠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총구를 높이 들어올렸다. 눈으로 보일만큼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눈치를 살피며 경계를 했는데, 점차 가까워지자 분위기가 점차 격앙되게 바뀌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조시안느를 발견하고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헌터와 함께 다가오는 것이 매우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양쪽의 거리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바츠에게 계속해서 안심하라며 앞으로 안내했고, 그들은 총구를 겨누고도 어쩌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정말 그녀 말대로 총이 빈 것 같았다. 그리고 바츠를 다시 한 번 놀라게 만든 그녀의 행동은 그때 나왔다. 그들과 완전히 거리가 좁혀졌을 때였다. 바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더그와 함께 걸음을 세웠는데, 그녀는 홀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들은 총구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 둘 중 한 사내를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지금이에요!”
바츠는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샬롱에서 그녀의 손짓을 무시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강하게 들었다. 그녀가 미친 것 같았다. 그녀는 입구를 지켜선 사내 중 한명을 끌어안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바츠에게 남은 한 사내를 떠넘기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바츠는 절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남은 사내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드는 것으로 쏟아내야 했다. 그는 갑작스런 상황에 그녀를 향해 총구를 고정했다가 서둘러 바츠를 향해 옮겨야 했다. 하지만 바츠의 움직임은 그의 총구가 도착하는 것보다 좀 더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간 바츠는 뒤늦게 돌아오는 그의 총구를 다시 반대로 쳐내버리고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가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틈을 타, 카니지를 뽑아들어 그를 단숨에 베어버렸다. 그는 얼굴의 고통을 잊기도 전에 의식을 잃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로인해 바닥에 쌓인 회색빛 눈이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바로 근처에서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남은 한 사내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그녀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몸통을 팔과 함께 껴안은 채 악을 쓰고 버텼다. 바츠는 그런 그의 머리채를 뒤에서 잡아채 고개를 젖힌 후, 카니지로 목을 그어버렸다.
“악!”
그녀가 목을 깊숙이 베인 사내를 대신해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로 달아났다. 그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내리는 것에 놀랐다기 보다는, 그 피가 자신에게 튀기게 될 뻔한 것에 기겁한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 사이 벌어진 상처를 뒤늦게 양손으로 틀어막기 위해 애쓰는 그를 옆으로 내팽개치듯 넘어뜨렸고, 그는 바닥에 누워서 한동안 몸을 바둥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조용히 숨을 거뒀다. 바츠는 두 사내가 완전히 숨통이 끊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그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나를 화나게 할 작정이라면 당장 그만 두는 게 좋아. 당신의 그 철없을 만큼 멍청한 행동은 더 이상 참기 힘드니까!”
바츠는 그녀에게 아직 풀리지 않은 분노를 담아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발끈하며 대꾸했다.
“왜요! 그럼 어떻게 들어가려고 했는데요? 비켜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이라도 할 셈이었어요?”
바츠는 오히려 당당하게 구는 그녀를 보자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이들에게 탄약이 없었다지만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둘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녀는 물론이고 더그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크게 나무지도 못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뾰족한 방법이 없는 한 어찌되었든 한 번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그녀를 데려왔는데, 그녀는 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밖에서는 그랬다. 그저 흥분을 가라앉히며 새롭게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나 물어야 했다.
“저 소리는 뭐지?”
두 사내가 쓰러지자마자 어디선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소리였다. 가늘고 얇은 휘슬소리였는데, 그 진원지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건물들에 의해서 메아리가 심했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음이 너무 컸다.
“경보에요...위험을 알리는 거죠...”
바츠는 이제야 기세가 한풀 꺾인 그녀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울컥했지만, 미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얼굴이 안쓰러워서 한마디 하지는 못했다. 동시에 밀려들기 시작하는 두통을 삭히기 위해서 한쪽 이마를 문지를 뿐이었다. 대신 저 반대쪽 건물 위에서 검은 깃발을 흔드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럼 저건 뭐야. 지금까지 본 것과 다른데?”
바츠가 온 방향과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바츠를 발견했던 사람들처럼 깃발을 흔들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본 것과는 다르게 매우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그녀가 그쪽을 향해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헌터가 더 있다는 신호에요. 주변에 당신 말고 헌터가 또 있나 봐요.”
바츠는 그녀의 대답에 얼른 아르크의 눈을 들여다보았지만 특별한 코드가 보이지는 않았다. 현재 자신을 제외하고는 깨끗했다. 그렇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르크 눈의 전원을 꺼두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스타드도 그랬고 테라치도 그랬었다. 단지 음산한 날씨 때문인지 묘하게 불길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 문제였다. 꼭 헤러티커의 목표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되도록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리고 당신도 그만 총구를 내려요.”
바츠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시안느 너머로 보이는 더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저쪽에 서서 완전히 굳어진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너무 놀란 모습이었다. 그는 바츠의 목소리와 더불어 뒤늦게 그쪽을 돌아보는 조시안느의 시선을 받은 다음에야 총구를 내렸다.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를 먼저 다독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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