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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45화 (145/268)

< --   10. 상상력   -- >         * 145화 *

바츠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바로 몸을 돌려세웠다. 그녀가 문을 열었고 더그가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바츠는 그 다음이었고, 그녀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정면으로 좁고 칙칙한 굴절 계단이 보였다. 오랫동안 통행의 흔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가득 찬 습기로 검은 선태류가 계단과 벽에 칠하다만 염료처럼 군데군데 자라있었다. 또한 손길도 전혀 닿지 않아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크고 작은 균열은 물론이고 일부는 살점이 떨어져나간 팔뚝처럼 건물의 뼈대가 노출되어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버려진 공간이었다. 계단과 벽에 고른 부분이 거의 없었다. 형태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각 층을 우회할 수 있도록 만든 비상 통로죠. 이쪽으로 올라가야 되요. 이쪽으로 내려가면 지하로 갈 수 있는데, 거기는 나도 가본 적이 없네요. 빛이 없어서 가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정말 캄캄하거든요.”

조시안느가 뒤에서 문을 닫고는 계단 앞에 멈춰서 있는 바츠와 더그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위쪽과 아래쪽으로 난 계단을 차례로 가리켰다.

바츠는 그녀의 손끝을 시선으로 쫓으며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검을 크게 휘두르기 힘들만큼 협소한 공간이었는데도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가지 못했다. 밑으로는 당장 바로 아래층까지 밖에 가지 못하는 것 같았고, 위로도 기껏해야 한두 층까지 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바츠는 시선을 그녀의 얼굴로 옮기며 물었다.

“놈은 어디에 있지?”

“제일 꼭대기 5층이요. 방이 여러 개 있기는 하지만 놈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아요. 그 층에 다른 곳보다 두 배 정도 넓은 방이 4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죠.”

“바로 그리로 안내해.”

바츠는 그녀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문 밖 먼 곳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러자 조금 전 홀에서 마주쳤던 패거리로 예상되는 그들의 웅성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흥분된 목소리였다. 긴장감으로 인해서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꾸를 할 때마다 짜증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 짜증은 조금씩 가까워졌는데, 중간쯤에 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온 누군가의 외침에 의해서 멈춰 섰다.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꽤 다급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인기척이 다가오던 것과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반대쪽을 향해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이쪽으로 가까워질 때보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조시안느 역시 그 소동을 감지했는지, 눈동자가 한 차례 뒤쪽을 향해 곁눈질을 다녀왔다. 매우 빠른 움직임이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 것 같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게는 안 돼요. 이 통로는 3층까지 밖에 이어지지 않았거든요. 그 바로 위층으로 가기 위한 통로는 무너져서 막혀 있어요. 치워내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죠. 가로막은 잔해들의 크기가 꽤나 크거든요. 옮길 수가 없었어요. 가장 빠른 건 2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거예요. 바로 5층으로 갈 수 있죠.”

이번에는 바츠가 거부했다.

“그건 안 돼. 다른 방법을 찾아.”

바츠는 처음 입구에서 느꼈던 2층의 많은 인기척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은 그들의 패거리가 머물고 있었다. 2층으로 가게 되면 홀에서의 충돌보다 더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놈들이 보여준 화력을 생각하면 되도록 피하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웠다. 게다가 그들을 피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하더라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고립으로 인해서 목숨을 쉽게 내주게 될 가능성이 더 컸다. 놈들이 멈춰서는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서 총격을 가하면 마땅히 숨거나 피할 곳 자체가 전무했다. 제대로 된 저항도 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그녀가 입을 삐죽하며 대답했다.

“그럼 방법은 하나에요. 지금 이 통로로 3층까지 간 후, 거기서 위로 올라가야죠. 당연히 4층으로는 가려면 밖으로 나가 앞의 계단을 이용해야 하고요.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싫잖아요.”

바츠의 고개를 절로 갸웃거리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뻔뻔했다. 고작 이 정도 도움이라면 딱히 함께 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괜한 짐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더그보다는 그녀가 더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더그는 계단 앞에 서서 위쪽을 향해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전 놈들이 접근했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매우 안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전처럼 겁에 질려 긴장이라도 하는 것이 나아보였다. 그럼 최소한 자신의 몸은 보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를 도시 입구에서 비클레타와 함께 돌려보내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움직이도록 하지.”

바츠는 걸음을 뗐다. 더그가 가장 앞장서서 계단을 올랐고, 조시안느는 이번에도 가장 뒤였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작은 모래들이 사정없이 밟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지 지글거리는 비명소리를 냈다. 신경을 쓴다면 소음을 줄일 수 있을 테지만, 더그와 조시안느가 함께 하는 이상 의미 없는 일이었다. 둘은 바닥의 선태류로 인해 미끄러운 것만 신경 쓰고 있었다. 그나마도 가끔씩 발이 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더그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앞쪽을 살피며 발밑까지 신경 쓰느라 어느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 어려워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더그가 또 한 번 밀려난 발을 다시 위로 내딛는 순간 뭔가가 옆으로 튕겨나가듯 달아났다. 바닥을 수차례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얇고 날카로운 파공음도 일었다. 마치 팽팽하던 줄이 끊어졌을 때 나는 소리와 닮아있었다. 그리고 바츠는 그 소리의 정체가 정말로 가느다란 줄이 끊어지며 낸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그의 발밑에 머리카락을 휘두른 것 같은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뭐죠?”

더그를 필두로 나란히 계단을 오르던 모두가 걸음을 동시에 멈췄다. 바츠는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묻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역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눈동자가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바츠는 그의 눈빛을 확인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카니지를 팔을 쭉 뻗어 그의 발 바로 앞에 거꾸로 꽂았다.  낡고 균열이 많았던 터라 칼끝은 계단을 뚫고 제법 깊숙이 꽂혔다. 그리고 그렇게 거꾸로 꽂힌 카니지에 바로 옆 벽면을 통과하며 별안간 날아온 넓적하고 납작한 황갈색 금속이, 더그의 정강이를 노리고 달려오며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검을 쥐고 있던 바츠의 손이 욱신거렸을 정도였다. 둘이 부딪히며 만든 파열음이 계단을 따라 통로에 가득 울려 퍼졌다. 동시에 더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양발을 모두 지면에서 떨어뜨리며 균형을 잃고는 저 밑으로 굴러 떨어졌을 정도였다. 조시안느는 그를 피해 날렵하게 몸을 한쪽 벽에 밀착했다. 하마터면 그녀 역시도 계단을 함께 구를 뻔했다. 무엇보다도 굴러 떨어진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금방 멀쩡한 다리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어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바츠는 카니지에 와서 부딪힌 금속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녹으로 얼룩진 금속이었지만, 이미 그 전에 한쪽을 정교하게 갈아서 날을 세워놓았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바츠는 검을 뽑아내 그 금속을 후려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게 뭐지?”

“덫 같은데요?”

바츠의 물음에 조시안느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줄 알아?”

바츠는 마지막 인내심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애써 짓누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금속을 긴장감이 전혀 없는 얼굴로 살펴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뒤늦게 바츠의 시선을 느끼고는, 불쾌한지 미간을 찌푸리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놈들이 만든 거라고요.”

바츠는 그녀의 발뺌하듯 내던지는 대답을 듣고는, 한차례 크게 숨을 들이켠 후에 다시 길게 내뱉어야 했다. 이마 한쪽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질 만큼 간지러운 것을 참아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런 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는 걸 말하는 거라고. 이곳에 대해 잘 안다고 한 건 바로 당신이었으니까.”

“몰랐다고요! 길을 아는 거랑 뭐가 있는지 아는 거랑은 전혀 다른 문제에요! 몇 번이나 말해야 하죠?”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자신이 자꾸만 신뢰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 모양이었다. 매우 억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보다 훨씬 더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밑에서 몸을 겨우 일으키고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는 더그가 눈에 들어오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방금 다리를 잃을 뻔했고, 계단을 구르며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운이 좋게도 그 무엇도 해당이 되지 않았지만, 아찔한 순간이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바츠는 그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꾸 나를 화나게 하는군. 내가 겁나지 않는다고 말했지? 그게 사실인지 이곳에서 확인하고 싶나?”

“그게 아니라...정말 몰랐다고요...정말이에요...”

그녀가 어깨를 움찔하며 대답했다.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눈이 번뜩 뜨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목소리 역시 순식간에 기운을 잃었다.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할 만큼 힘이 없었다. 부릅뜬 시선도 그녀의 기운만큼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마음 같아서는 한참동안 불만을 토로하며 그녀를 몰아세우고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에서 케일리의 모습이 겹쳐 보여 차마 그러지 못했다. 완전히 힘을 잃고 시무룩해진 모습이 너무도 처량했다. 시선을 뒤쪽으로 옮겨 더그를 살피는 것을 대신하며 애써 기분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괜찮아요?”

“네. 엉덩이랑 목이 조금 뻐근하지만 크게 지장은 없습니다.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그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상황을 대처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봐온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도 고개 숙인 조시안느의 뒷모습 때문인 것 같았다. 그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몇 번이나 그녀의 뒤통수를 곁눈질로 살폈다. 물론 그녀는 그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침울해진 얼굴로 바츠의 발등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둘을 제법 시간을 할애해 다독여야 했다. 침체된 분위기로 나아간다는 건, 여기서 돌아가는 것만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겪지 않아도 될 위기를 유발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경계를 늦추지 말고 항상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도 강조했다. 더불어 이제부터는 자신이 앞장서겠다고 말하며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나마 최선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3층까지 가는 동안 무려 6차례나 더 부비트랩을 마주해야했다. 대부분 죽음과 직결되기보다는 불구를 만들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였다. 무릎 아래를 노리는 것들이 많았다. 다행인 것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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