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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48화 (148/268)

< --   10. 상상력   -- >         * 148화 *

계단은 마치 다리가 부러진 테이블의 상판처럼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 쳤다. 바츠는 그 위에 서지 못하고 허우적거려야 했고, 몸이 밑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데도 허공 위로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아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떠받치는 것 같았다. 물론 비상 통로의 천장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통해 현실을 자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장은 급속도로 좁아졌고, 주변은 빠르게 솟구쳤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계단이 무너져 내리고 생긴 구멍을 통해 천장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 사이 밑에서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계속되는 것을 보니 한참동안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아주 요란하고도 둔탁한 굉음이 반복되었다. 바츠는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금 전 서 있던 곳의 붕괴로 인해서 아래층도 그리고 그 아래층도 또 그 아래층도 연속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진짜 빗물 대신 크고 작은 잔해비(殘骸雨)가 내리고 있을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었다.

바츠는 팔을 마구 내둘러보았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이었다. 여러 장의 담요에 짓눌린 것처럼 고통은 없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미 허공을 헤집고 거꾸로 올라갔을 만큼 힘을 쓴 것 같은데, 정작 팔의 움직임은 검술을 처음 배우며 완전히 녹초가 되었을 때처럼 느리고도 굼떴다. 기껏해야 팔의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인지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바츠는 팔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자,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불안감을 잔뜩 머금고 있는 다급함이었다. 바닥에 닿았어도 벌써 닿았어야 했는데, 그때까지도 계속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반드시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눈에 띄는 뭔가가 있었다. 표면이 검고 매끄러웠는데, 밧줄처럼 매우 길고 충분히 두꺼웠다. 어떤 용도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함께 추락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놓치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츠는 전혀 균형을 잡을 수 없는 와중에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줄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붙잡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를 하며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줄을 다시 놓치지 않기 위해 손에 두 번, 세 번 감았고, 머지않아 벽에 부딪힌 것 같은 충격을 온 몸으로 느껴야 했다. 특히 줄을 감은 팔은 어깨가 부서졌다고 생각될 만큼 섬뜩함이 느껴졌다. 다행인 것은 밑으로 하염없이 추락하던 몸을 고정시켜줄 만큼 그 줄이 자신보다도 먼저 어딘가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 줄을 붙잡은 팔과 어깨가 모두 무사하다는 사실이었다.

바츠는 가쁘게 차오르는 호흡을 제쳐두고 크게 한숨부터 내뱉었다.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더 이상 추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굉음이 점차 멀어지자,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움직여 찾아보았을 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뿌연 먼지 연기들이 계속해서 더 낮은 곳에서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적어도 건물의 가장 아래층까지 내려간 것 같았다. 어렴풋하게 새카만 어둠을 볼 수 있었다. 위로는 생겨난 지 얼마 안 되는 것으로 보이는 구멍 두 개가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늘어서있었다. 그 중 가장 위에 있는 구멍으로 반가운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집사님!”

바츠는 그 얼굴을 보자, 자신의 처지는 잠시 잊을 만큼 기뻤다. 오히려 그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더그,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건 제가 할 말이라고요!”

더그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짧은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옆으로는 좁은 콘크리트 벽이 있었고, 아래로는 커다란 구멍 주위로 일부만 남아있는 계단의 형체를 찾아볼 수 있었다. 3층 중간에 매달려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면으로 기껏해야 1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구멍을 피해서 바닥에 내려서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아보였다. 문제는 지금 붙잡고 있는 줄이 체중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가 였다. 위층 콘크리트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있는 줄이 상당히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불안은 이윽고 현실이 되었다. 몸을 흔들어 탄력을 얻은 뒤, 구멍을 피해 먼 쪽으로 뛰어내리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몸을 두어 번 구르자, 줄을 짓누르고 있던 콘크리트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며 바츠는 또 다시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해야 했다. 정확히는 줄을 고정하고 있는 콘크리트가 통째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바츠는 아차 싶은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3층에 난 구멍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대로 계속해서 추락하다가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콘크리트 덩어리가 어딘가에 덜컥 걸리며 줄을 놓치고 말았다. 바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던져졌고, 새카만 어둠이 삽시간에 주변에서 몰려들었다. 뒤늦게 따라 내려오는 잔해 일부가 그 사이로 몸을 감추는 것이 눈에 보였다. 바츠는 자신의 몸이 어딘가로 떨어질 때까지 놀란 가슴으로 그것들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몸뚱이는 어딘가에 크게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머리가 심하게 흔들리며 잠시 시야의 초점을 잃어야 했다. 머리를 연속으로 얻어맞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검은 어둠에 완전히 둘러싸인 후였다. 캄캄한 어둠이 빤히 바라보았다.

바츠는 입에서 절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이 축 늘어져 힘이 없었다. 위쪽에 생겨난 구멍으로 쏟아지는 빛이 이곳의 유일한 빛이었다. 그마저도 충분하지 않아 그 주변만 겨우 훑어볼 수 있었다. 바츠는 늘어진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빛이 쏟아지는 구멍에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줄이 달린 콘크리트 덩어리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온 몸이 뻐근한 와중에도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엇보다도 어딘가에 떨어뜨린 카니지를 찾아야만 했다. 내내 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던 카니지가 손아귀에 남아있지 않았다. 관심을 잃는 동시에 함께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집사님!”

머리 위에서 더그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바츠는 고개를 들어 구멍을 통해 그의 얼굴을 찾아보았다. 그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머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그! 난 괜찮아요! 내가 한 말 기억해요? 당장 거기서 피해요!”

바츠는 그에 대한 또 다른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머지않아 그를 찾아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해왔다. 그가 자신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바츠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가 바츠를 연거푸 불러댔다.

“집사님!”

“어서요! 당장 그곳을 벗어나요!”

“기다리세요!”

“아니! 달아나라고요!”

더그의 얼굴이 구멍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 바츠는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절로 다급해졌다. 자신이 허둥대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카니지를 찾기 위해 급하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입에서는 절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젠장!”

그를 향한 걱정이 답답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빨리 카니지를 찾아 위로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카니지를 찾는 건 마음만큼 쉽지 않았다. 빛은 고작해야 구멍 주위가 전부였고, 검이 튕겨져 어둠 속 저편 어딘가로 굴러가기라도 했다면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구멍 바로 아래 수북이 쌓인 콘크리트 잔해에 깔렸다면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 더 나았다. 하지만 바츠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추락할 때보다도 더 필사적으로 카니지를 찾았다. 저 먼 곳에서 거친 총성이 다발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조급하던 마음이 매우 혼란스럽게 변해갔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중, 이상한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바닥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너진 콘크리트의 작은 잔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보다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양이 매우 많았다. 근처에 가득 깔려있는 것이 전부 다 뼛조각들이었다. 쏟아져 내린 잔해와 뒤엉켜있었지만 그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들이 눈에 익기 시작하자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인간의 뼈였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을 훑어보던 중 가까운 곳에 두꺼운 철창이 세워져 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모양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바츠는 급격하게 밀려드는 추위가 느껴졌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진하고 날카로웠다. 콘솔을 해제하면서 추위를 고스란히 느끼게 된 것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떨어지며 생겨났던 긴장감이 가파르게 풀어진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단순히 차가운 기온에 의한 싸늘함이 아니었다. 촘촘하게 바늘이 새워진 금속 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찔함이 느껴졌다. 바츠는 그 이유를 몸을 돌려세우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반대쪽에도 검은 어둠이 들어차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짙은 어둠이 구멍으로 흘러드는 유일한 빛을 피해 한껏 움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붉은 빛 하나가 번뜩이고 있었다.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빛이었는데, 조금씩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흔들릴 때마다 어둠에 붉은 잔상이 그려지고는 했다.

바츠는 그 붉은 빛이 매우 낯익었다. 여러 차례 보고 들은 것으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게 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은 놈이었다. 하지만 놈은 생각이 다른 듯 했다. 신중하다기보다는 느긋함으로 더더욱 다가왔다. 그리고 머지않아 구멍 근처를 지나며 모습을 드러냈는데, 예상과 다르지 않게 크고 더러운 그리고 흉측한 괴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헤러티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놈을 이런 곳에서까지 만나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떻게 놈이 이곳에 있는지 강한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놈이 있는 공간에서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놀라웠다. 눈으로 본 숫자만 적어도 20여명이 넘었다. 그들 외에도 남은 다른 패거리와 가족까지 하면 벌써 수십 명이었다. 양쪽이 서로에게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은 것 같아서 매우 신기했다. 정확히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바닥에 널린 뼛조각들은 분명 놈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득 등 뒤에 세워진 철장이 떠오르며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창의 존재 이유를 왠지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머지않아 확신이 되었다. 놈의 한쪽 안구가 완전히 뭉개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분명했다. 놈은 이곳에서 사육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들에게는 헤러티커를 포획해서 잡아 둘 수 있을 만한 역량이 있어 보이지 않았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온통 의문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당장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하는 놈을 피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놈이 막 내딛는 말에 뭔가가 채이더니 이쪽을 향해 빠르게 튕겨져 날아왔다. 주위가 어스름해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닥과 몇 번이나 충돌하며 일어나는 소리가 놈의 끔찍한 울음소리를 뚫고 들려올 만큼 맑고 선명하다는 것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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