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상상력 -- > * 149화 *
바츠는 놈보다 한 발 더 빠르게 다가오는 그 물체를 피하지 않았다. 그 실루엣만으로도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친숙한 물건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반가울 정도였다. 바츠는 그 실루엣을 발 앞에서 정확하게 낚아챘다.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감촉을 통해, 그것이 자신의 카니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나뒹굴러오는 카니지의 손잡이를 빈틈없이 잡아챘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온 놈을 막기 위해, 곧장 가로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놈이 박치기를 하듯 검을 향해 부딪혀왔다. 정확히는 놈의 활짝 벌린 주둥이와 카니지의 충돌이었다.
바츠는 놈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등 뒤의 철장으로 몰아붙여졌다. 거칠고 무거운 소음이 만들어지며 온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더불어 등을 따라 전해지는 고통에 눈앞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통증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견뎌내며 있는 힘껏 버텨 서느라 바빴다. 놈이 주둥이에 부딪힌 카니지를 그대로 씹어 먹을 것처럼 입에 물고는 억척같이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놈의 얼굴이 카니지를 사이에 두고 불과 10cm 앞에 놓였다. 그럼에도 놈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는 없었다. 그저 윤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뒤쪽 천장의 구멍으로 쏟아지는 빛이, 놈의 등 뒤로 쏟아지며 음영으로 어둡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친 숨소리와 붉은 눈은 오히려 더더욱 선명했다.
바츠는 카니지에 잘려 나오는 놈의 뜨거운 숨결로 숨을 쉬기 어려웠다. 고약한 냄새가 흡기구를 틀어막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섬뜩한 것이었다. 놈의 엄청난 힘을 견뎌내는데 바빠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가로로 들어 올린 검을 지탱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다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부동자세가 된 것이다. 놈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면 막아낼 도리가 없는 무방비 상태였다.
바츠는 그 섬뜩함에 식은땀이 등을 타고 내리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부풀도록 차오로는 김장감이 호흡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놈은 카니지를 입에 물고 앞으로 계속 달려들려고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미 양팔을 미친 듯이 내둘러도 모자란데 예상과 다르게 얌전했다. 마치 여유를 부리며 조롱을 하는 듯 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놈이 앞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몸이 이리 틀어지고 저리 틀어지며 움직일 때, 빛에 그려지는 놈의 실루엣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실루엣의 이상한 점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다시 봐도 놈의 양 어깨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깨끗이 잘려나가 밋밋해져 있었다.
바츠는 눈도 한쪽이 없고, 양팔도 없는 놈을 확인하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다른 때와 달린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밀기만 하는 놈의 힘을 이용해, 몸을 틀어 옆으로 빠져나오는 동시에, 놈을 반대쪽으로 휙 제쳐버렸다. 그로인해 바츠는 왼쪽으로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지만, 놈은 완전히 무너지며 철장에 부딪히고는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통쾌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바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둘러 자세를 잡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놈이 한참을 버둥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주변에 가득 눌러앉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것이다. 그러자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놈이 자신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친 숨을 연거푸 뱉어내며 붉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전 충격으로 조금 어지러운지 서 있는 다리가 살짝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고개를 멈추지 않았다.
바츠는 놈을 지그시 지켜보며 어둠 속으로 점점 더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등에 철장으로 생각되는 벽이 닿는 순간 조용히 숨을 골랐다. 놈이 어둠에 대고 괴성을 질러대는 것쯤은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호흡을 가다듬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칼끝으로 등 뒤의 철장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놈이 고개를 빠르고 정확하게 이쪽을 향해 돌리더니, 허겁지겁 달려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혼자서 미끄러지며 휘청했는데도, 그 저돌적인 기세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놈은 오로지 본능에 충실해져 있었다. 집착한다고 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어보였다.
바츠는 그런 놈을 피해 몸을 옆으로 잽싸게 빼냈다. 그러자 놈이 어둠과 크게 부딪히며 큰 충돌음을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붉은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바츠는 놈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볼 수 없었지만, 가쁘게 몰아쉬는 숨결을 느끼며 검을 깊숙이 찔렀다. 검이 흐트러짐 없이 곧장 어둠을 꿰뚫고 파고들었다. 동시에 놈의 분노에 찬 울음소리가 들렸고, 바츠는 그 사이 걸음을 옮겨 다시 처음에 섰던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놈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공간에 붉은 빛이 또 한 번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쪽 끝이 잔뜩 치켜 올라가 날카롭게 보이는 빛이었다. 밑으로 길게 붉은 눈물을 흘릴 것처럼 마구 일렁였다.
바츠는 일부로 발을 끌며 주변을 걸었다. 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흐늘거리는 걸음이었다. 그러자 놈이 코를 반복해서 킁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보다 좀 더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놈은 별로 의미 없는 킁킁거림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청각에 더욱 힘을 쏟고, 유일하게 남은 눈을 부릅뜨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었다. 하지만 놈은 그것을 모르는지, 붉은 눈을 활활 불태우면서도 계속해서 킁킁거렸다. 그리고는 적당히 가까워지자 다시 한 번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놈이 가진 무기는 날카로운 이빨과 강력한 힘 그리고 무모할 정도의 과감함이었다. 냉정함을 완전히 되찾은 바츠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불구자나 마찬가지인 놈에게 당할 바츠가 아니었다. 제때 빠르게 움직이며 놈의 옆구리를 베며 지나칠 뿐이었다. 뒤이어 울려 퍼지는 놈의 비명소리는 바츠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리는 사이렌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렌은 이후로도 한참동안 반복되었다. 놈의 건강한 다리가 지쳐, 달려드는 속도가 현격히 줄어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정작 놈을 쓰러뜨린 건 바츠의 칼날이 아니었다.
놈은 온 몸에 자창을 가득 새겨 넣고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그 근성과 체력이 절로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그 근성과 체력이 천장에 난 구멍에 걸쳐있던 콘크리트에 의해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정확히는 그 콘크리트에서 삐져나와있던 검고 매끈한 줄 때문이었다. 바츠가 이곳으로 추락할 때 필사적으로 붙들었던 그 줄이었다. 놈이 지친 걸음으로 바츠를 향해 터덜터덜 다가오던 중, 그 검은 줄에 발이 꼬이며 붙들린 것이었다. 놈은 검은 줄을 자신이 밟으며 팽팽하게 만들고는 거기에 스스로 걸리며 바닥에 얼굴부터 처박혔다. 바츠조차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놈은 비참하게 바닥에 쓰러졌고, 그 힘을 버티지 못한 콘크리트 더미는 놈의 몸통 위로 떨어졌다. 아무리 단단한 몸을 지닌 놈이라도, 수백 킬로그램에 달할 것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더미를 이겨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대로 깔리며 바닥에 처참하게 짓눌렸다. 놈은 자신의 등을 깔고 앉은 콘크리트 더미를 떨쳐내지 못한 채, 비명에 가까운 긴 울음소리만 연속적으로 내뱉을 뿐이었다. 왠지 처량하게 느껴지는 울음소리였다.
바츠는 그런 놈을 잠시 지켜보다가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놈과 직각으로 서서는 놈의 뒷덜미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두 번, 세 번 내리쳤다. 그래야만 놈의 목을 완전히 잘라낼 수 있었다. 놈의 점성이 강한 누런 피가 바닥을 천천히 물들였고, 방독면을 뛰쳐나오는 바츠의 숨소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더불어 멀리서 들려오던 총성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숨을 참으면 머릿속을 쿵쿵 울리는 심박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그리고 그때, 위에서 뭔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집사님!”
바츠는 고개를 들자, 저 위에서 더그로 보이는 사내가 자신을 부르며 길이가 충분하고 굵은 밧줄을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무사히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은 그가 내린 밧줄을 붙잡는 것이 먼저였다. 바츠는 그 줄을 붙잡고 올라가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올라올 때, 3층에서 조시안느가 이 줄에 걸려 넘어졌지 않습니까? 그게 생각난 것뿐입니다.”
더그가 스스로가 대견한지 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독면을 벗기면 그가 활짝 웃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거 말고요. 어떻게 거기까지 다녀왔던 것이냐고요. 탄약도 얼마 없었잖아요.”
“별 거 아닙니다. 좀 전 라운지에서 집사님이 쓰러뜨린 놈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놈들에게서 탄약을 좀 얻었죠. 탄약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처음보다 더 늘었습니다. 적어도 20발 가까이 남았을 겁니다.”
그가 쑥스러운지 몇 번이고 고개를 갸우뚱대며 대답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소총을 손바닥으로 자랑스럽게 두드리기까지 했다. 바츠는 그런 그를 말없이 잠시 지켜보았다. 그가 그 이유를 물었지만 묵묵히 자신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가 민망해하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나름 참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더 이상은 힘든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 걱정을 하신 겁니까? 이래봬도 지상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저도 제가 겁이 많은 걸 알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놈들은 이미 집사님 덕분에 잔뜩 겁에 질린 상태였죠. 저보다도 더 겁이 많았죠. 그 수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바츠는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 큰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답답한 속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교만해서 그를 업신여긴 것 같아서 괜히 미안했다. 하지만 그도 바츠의 그 감정을 느꼈는지,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 갑자기 밀어닥치는 훗훗한 분위기가 낯 뜨거운 모양이었다. 바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목이 메며 칼칼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서둘러 화제를 돌리는 것으로 민망함을 덜었다.
“그러고 보니 조시안느가 보이지 않는 군요.”
“모르겠습니다. 무서워서 달아난 것 같습니다. 집사님이 추락한 걸 보고 잘못된 줄 알았나 봐요. 제가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도 경황이 없던 터라...아마도 그녀는 살고 싶었을 겁니다...”
더그가 급격히 침울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에 대한 아쉬움인지 아니면 자신이 책임감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죠. 우리끼리라도 갑시다.”
바츠는 굳이 미련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휑하니 뚫린 구멍을 피해 한쪽 가장자리로 바짝 붙었다. 구멍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5층으로 들어설 수 있는 문이었다. 번거롭게 조금 헤매게 될지도 모르지만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바츠의 손목을 더그가 뒤에서 덥석 붙들었다. 단순히 주의를 끌기 위함이 아니라, 힘이 꽤나 들어가 있는 묵직한 구속이었다.
“집사님, 우리...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안 되는 겁니까?”
바츠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츠는 그 이유를 따로 묻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왜 아이 하나에 그렇게 집착하십니까? 다른 헌터나 집사는 그러지 않는다고요. 그런 걸 본 적이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나 버릴 수도 있는 게 헌터들 아닙니까? 전 사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린 벌써 몇 번이나 죽을 뻔 했습니다. 죽기 전에 불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 아이가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래야 합니까? 집사님이 남다르게 좋은 분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그냥...그냥 아이일 뿐입니다.”
“더그, 더그는 방금 전에 조시안느처럼 달아나지 않고, 왜 돌아온 겁니까?”
바츠는 잠에서 막 깬 것처럼 꽉 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더그가 가슴이 답답한지 탄식을 내뱉고는 대꾸했다.
“집사님, 지금 집사님과 그 아이를 비교하시려는 겁니까? 그건 다른 겁니다. 집사님과 그 아이는 달라요. 그 아이는 그냥...그냥...그래요! 지금 밖에 내리는 눈 같은 겁니다. 하늘에서 한 가득 내리는 눈이요. 결국에는 바닥에서 전부 녹아사라지고 만다고요. 지금처럼 캄캄한 밤에 내리면 내린 줄도 모를 겁니다. 집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하지만 집사님은 아니에요.”
바츠는 더그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리며 말했다.
“더그,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지금 아르크에서 잠을 자고 있나요? 더그, 캄캄한 밤에 몸을 숨긴다고 내리는 눈을 피할 수는 없어요. 그저 보이지 않을 뿐이죠. 결국에는 따뜻한 불 앞에 몸을 말려야 하는 건 마찬가집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날이...너무 춥다고요...”
바츠는 잊고 있던 추위가 스멀스멀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몸서리를 강요하고, 등을 쓸어내리며 소름이 돋게 만드는 추위였다. 입김을 내뱉으면 뿌연 얼굴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더그,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좋아요. 그건 내가 이미 허락한 겁니다.”
바츠는 그 추위를 애써 참아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모두 거두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쪽 벽에 바짝 붙어, 가장자리를 통해 구멍을 지났다. 그리고 5층으로 연결된 문을 열었다. 더그는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한참을 머물러 있다가, 뒤늦게 그런 바츠를 황급히 쫓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집사님, 집사님!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 거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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