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50화 (150/268)

< --   10. 상상력   -- >         * 150화 *

문을 열고 나오자, 익숙한 모습의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일정간격을 두고 좌우로 늘어선 문과 고요함이 있는 반듯한 통로였다. 바츠는 더그의 안달난 목소리를 애써 모른 척하며, 조심스럽게 복도로 발을 내딛었다. 바닥의 모래가 지글거렸지만, 발바닥만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다. 주위가 방금 전까지 난리를 겪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한 공기로 가득했다. 더그가 그 차분한 공기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바츠의 뒤를 바짝 쫓으며 좌우를 살필 뿐이었다.

좌우로 이어진 복도는 오른편으로는 벽을 따라 총 4개의 문과 함께 그 끝이 막혀있었고, 왼편으로는 오른편과 똑같은 모양의 공간이 고스란히 전사(轉寫)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다시 상대적으로 좁은 복도가 양옆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마치 맞대고 있던 양손을 천천히 좌우로 벌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츠는 고민도 없이 왼편을 향해 걸어갔다. 정확히는 중간에 계속 이어지는 복도를 향한 걸음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주변에 가득한 고요를 틈타, 어디선가 작은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꽤나 먼 거리였다. 바츠는 그 인기척이 들려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곳이 중앙 계단이 있는 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주위에서 뭔가에 대해 정신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대여섯 사람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화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바츠와 더그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이야기를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대체로 다들 흥분해 있었고, 한 사람만 그런대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와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 지금 몇 명이나 죽은 줄 알아?”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야. 그렇게 지시가 내려왔다고.”

“아니, 그럼 진작부터 그러지 이게 무슨 꼴이냐고! 난 이번에 내 동생과 동생의 아내를 잃었어! 놈의 칼날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형과 동생을 모두 잃었다고!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된 건지 설명이라도 해봐! 헌터는 우리들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게 뭐야! 이제 와서 뭐?”

“그건 칼리굴라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우리도 어찌된 일인지 모른다고.”

“내 아들은 어떻게 할 거야! 내 아들은 내게 전부였다고!”

흥분한 사람들이 유일하게 침착한 사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억울함으로 원망어린 얼굴들이었다. 그 사내는 사람들에게 시종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의 상황에 곤혹스러움으로 당황한 기색도 보였다. 그들이 윽박지르며 무섭게 달려들 것처럼 구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사람들에게 쩔쩔매며 진정하라는 말과 지시를 받았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와 대답은 사람들을 더더욱 격앙되게 만들었다. 일부는 서러움에 눈물을 훔쳤고, 아들을 잃었다고 울부짖던 여인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억울함을 사내에게 모두 토해내면서도, 그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눈치였다. 그저 속상한 마음에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바츠를 발견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바츠는 그때까지도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고, 그들은 바츠가 한 걸음만 크게 내딛으면 칼날에 닿을 거리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눈치 챘다. 유일하게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내에 의해서였다.

그는 바츠를 발견하고는 그 전에 얼굴에 내비치던 모든 감정을 한 순간에 놀라움으로 전부 바꿔버렸다. 커다란 두려움을 갑작스레 마주하게 된, 동공이 급격히 커지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런 놀라움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계속해서 소란을 피우다가, 뒤늦게야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가 커진 눈으로 굳어지자, 그제야 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린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여인은 울음소리 대신 비명을 질렀고, 남은 다른 사람들은 어쩔 줄 모르며 제자리에서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내뱉는데, 하나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들의 혀가 전부 마비된 것 같았다.

바츠는 그들 중 절반을 살해한 후, 남은 사람에게 칼리굴라의 행방을 물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서 가장 먼저 그 대답을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를 마저 살해할 생각이었고, 대답을 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그리로 안내하라고 할 참이었다. 하지만 바츠의 그런 생각은 미처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뜻을 접어야 했다. 나름대로 가장 침착하던 사내가 오히려 먼저 한 걸음 다가오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사 표현을 돕기 위해 들어 올리는 자신의 양 손이 마구 떨리는 데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말을 건넸다.

“자, 잠시 만요! 저희를 해치지 마십시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해일 겁니다.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울 수 있습니다.”

바츠는 잔뜩 겁에 질린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차례로 살핀 뒤에 대답했다.

“오해는 아닐 거야. 하지만 돕겠다는 그 말은 믿어보도록 하지. 나를 돕고 싶다면 칼리굴라에게로 안내하도록 해. 난 그 녀석에게 볼 일이 있는 것뿐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칼리굴라도 당신을 보고 싶어 하고 있거든요. 참말입니다. 당신을 안내해오라고 막 지시가 내려온 상태였습니다.”

바츠는 그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돌려 더그를 찾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총을 어깨에 견착하고는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언제라도 발포를 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보였다. 바츠는 그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잘됐군. 앞장서도록 해.”

그는 바츠의 의사를 확인하고는 자신에게 역정을 내던 그들을 자리에 남겨둔 채, 바츠와 더그만 근처 어느 방으로 안내했다. 반대쪽으로 이어진 복도를 따라가다가 중간에 코너를 돌고난 뒤였는데, 소총으로 무장한 사내 둘이 입구를 지켜서고 있었다. 그들은 바츠를 발견하고 총구를 들어 올리며 움찔했으나, 앞서 걷던 사내의 손짓에 금방 총구를 다시 내렸다. 그가 그 앞에 서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바츠는 그를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상당히 넓은 방이었다. 중간에 허물어진 것인지 아니면 허문 것인지 알 수 없는 벽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안쪽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는데, 주위에 10여명의 사내들이 둘러 모여서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분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 덕분에 그들은 바츠의 인기척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대화를 중단하고는 동시에 차가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겁을 먹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매우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유독 한 사내가 돋보였다. 테이블 너머에 앉아있던 사내였는데,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에 있던 사람 중 가장 크다고 느껴질 만큼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굵은 팔뚝과 딱 벌어진 어깨가 열심히 몸을 단련했다는 것을 대신 말해주었다. 그런 그의 손짓 한 번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좌우로 도열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서자 그가 말했다.

“이거 뜻밖의 손님이군. 정말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야.”

그의 태도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특별한 여유가 느껴졌다. 이전에 몇몇 사내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무지로 인한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정확히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목소리에서조차 전혀 떨림이 없었다. 그가 바츠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신호로 손을 거만하게 까딱이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아르크의 헌터하고는 우리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르크의 방침이 바뀌기라도 했나? 지상에서 벌이는 사업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특히나 헌터들은 야인들의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기로 했을 텐데? 우리가 먼저 도발을 하지 않는 이상 말이야. 안 그런가?”

“아르크의 방침은 여전히 그대로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그것과는 별도의 일이지.”

바츠는 그를 향해 신중한 걸음으로 다가가며 대꾸했다. 그들의 매우 침착한 모습에 오히려 긴장을 해야 했다. 그러자 그가 몸을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대며 말했다.

“궁금하군. 룰을 깨면서까지 우리를 공격해야 했을 만큼의 일이 무엇인지 말이야.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비난은 각오해야 할 거야. 알고 있겠지? 지상에서 아르크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한지 말이야.”

바츠는 심호흡을 하듯 한 차례 호흡을 고른 뒤에 말했다.

“전진기지의 아이를 데리러 왔다.”

“전진기지의 아이? 무슨 아이? 우리가 전진기지를 약탈이라도 했다는 건가?”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츠는 그의 태도를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노란 눈과 허리까지 기른 갈색 머리칼을 가진 10살짜리 여자아이지. 며칠 전에 이곳에 왔을 거야.”

“...그러니까...전진기지를 가출한 어떤 아이를 데리러 이곳에 왔다는 소리인가? 그 아이 때문에 우리 애들 여럿을 때려눕히면서? 재미있군. 야, 방금 저 놈이 말한 아이에 대해서 아는 놈 있어?”

그가 주변에 대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양옆으로 도열한 그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고는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눈으로만 쫓아 확인하고는 말했다.

“모른다고 발뺌은 하지 마. 너무 눈에 띄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울 테니까 말이야. 지상에서 여자아이 혼자 방독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뭔가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흔치 않지. 방독면은 매우 귀한 물건이니까.”

“이제야 생각이 나는 모양이군.”

“지난번 서울에 데려다 달라고 하던 고집불통 꼬마가 하나 있었지. 아무래도 그 아이를 말하는 것 같군. 전진기지의 주민이었나?”

바츠는 그의 물음에 별도로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대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니었다. 말을 마치고는 주위에 시켜 그 아이를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떠났던 사내가 다시 돌아왔는데, 손아귀에 낯익은 소녀를 붙들고 있었다. 소녀는 그의 손길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거칠게 잡아채며 바츠와 대화를 주고받은 사내 곁으로 가서 섰을 뿐이었다. 사내가 소녀를 향해 조용하라며 한 차례 큰소리로 윽박을 지른 후에 물었다.

“이 아이가 맞나?”

바츠는 그의 고성에 놀라 움찔하는 소녀에게서 비록 방독면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멘디가 분명하다는 것쯤은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짧게 보여준 사나운 성격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소녀는 멘디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반가운 마음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드는 바람에 바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표정이 조금 어두웠지만 큰 탈은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무사한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바츠가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눈빛만으로 용케 알아듣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제 계산을 해야 할 때 인 것 같군.”

“계산?”

바츠는 그를 향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계산. 잊은 건 아니겠지? 네가 이곳까지 오며 일으킨 소동들 말이야. 그로 인해서 우리가 얼마나 손해를 본 줄 알아? 그 손해에 대해서 배상을 해줘야겠어. 아이를 무사히 돌려받고 싶다면 말이야.”

바츠는 그의 음흉한 속셈에 절로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그녀를 위해서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가 더러운 이를 활짝 드러내며 말했다.

“헤러티커 엄지 5개. 그 정도는 받아야겠어. 설마 룰을 깨고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도 애니밀 몇 개 던져주는 것으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겠지? 게다가 녀석이 전진기지를 떠나온 거라면 실질적으로 주민도 아니잖아? 적어도 우리가 그 정도 보상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바츠는 그가 요구하는 액수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딱히 부담이 되는 금액은 아니었다. 헤러티커의 엄지라면 전진기지에 가득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애니밀 20개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사내는 어렴풋이 눈치 챈 것 같았다. 얼굴의 음흉한 미소가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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