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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52화 (152/268)

< --   10. 상상력   -- >         * 152화 *

바츠는 그가 별다른 의미 없이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소란’이라는 단어에 은근히 힘을 싣고 있었다. 뭔가 트집거리를 찾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에게 대꾸는 하지 않고, 멘디의 손을 잡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특별히 서두른 것은 아니었지만 꾸물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막 걸음을 옮기는 바츠를 불러 세웠다.

“잠깐! 너무 매정하게 구는 군. 나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말이야.”

“거래가 끝난 것으로 아는데, 더 볼 일이 남은 건가? 우리 사이가 지나치게 긴밀해지는 것 같군.”

바츠는 몸을 그대로 세우고 고개만 돌려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꽂힌 카니지 뒤로 일어나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심상치 않았다. 조금 전 그의 목소리를 통해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불안이 엄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그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양쪽에 도열해 있던 사내들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길을 가로막아 선 것이었다. 놀란 더그가 총구를 들어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총구가 진득하니 자리를 고수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내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시로 걸어 들어올 때처럼, 총구를 한 곳에 쉽사리 고정하지 못했다. 한 번은 왼쪽을 다음은 정면을 그리고 지금은 오른쪽을 향해 겨냥했다. 누가 봐도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사내들에게 오히려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이런 귀한 물건을 주었는데, 그냥 보내주면 내가 뭐가 되겠어? 섭섭하다고.”

케니스가 카니지를 뽑아들며 말했다. 그는 아직 여운이 남았는지, 칼날을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이 묻어났다. 집착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감정을 입으로 꺼내놓았다.

“내가 대접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어? 내가 이 검의 위력을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 말이야.”

바츠는 한쪽 이마가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완전히 돌려세웠다. 그러자 그가 광대가 치켜 올라갈 정도로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말했다.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거든. 네가 가진 아르크의 눈과 슈트. 그것도 탐나는데 어쩌지?”

“구걸하는 건가? 아니면 가져가겠다는 건가?”

그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눈을 번뜩였다.

“빼앗겠다는 거지!”

바츠는 그의 기고만장한 자신감에 헛웃음이 났지만, 차분하게 그를 위해 경고를 해주었다.

“지상에 사는 녀석들은 정말 하나같이 멍청하군. 특히 이곳은 그 정도가 심해. 그게 가능하다고 보나?”

“확인해 보면 알겠지! 네 놈의 유일한 무기는 여기에 있으니까!”

그는 바츠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했다. 애초에 경고로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맞서 도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듯 했다. 바츠를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여 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그들은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각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꺼내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도끼부터 작은 망치와 파이프 렌치까지 다양했다. 모두 지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음에도 묘한 여유가 느껴졌다. 스스로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무기가 얼마나 위협이 되는 것들인지 잘 아는 눈치였다. 눈빛에 자긍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더그의 총구에 겨냥될 때에만 잠시 머뭇거릴 뿐이었다. 그들은 당당하게 접근해왔다. 더그의 총구가 무력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가 초조한 모습으로 타깃을 바꾸고 있는 탓이었다. 더그는 한 눈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생각을 드러내지 마라. 겁을 먹으면 그 감정이 온 몸으로 뿜어져 나온다.’

바츠는 현재의 상황으로 인해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 더그에게 부합되는 말이었다. 놈들은 그런 더그를 보며 오히려 기세를 세우고 있었다. 그를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쉽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당장 신경 써야할 것이 그 뿐만이 아닌 까닭이었다. 우선 자신도 돌봐야 했고, 멘디 역시 지켜야 했다. 신경 써야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멘디를 등 뒤로 숨기고 있기는 했지만, 잠깐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한순간의 실수가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때가 되었을 때, 마른하늘의 천둥소리처럼 터져나가듯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일제히 달려들었다. 손에 든 무기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휘두르기 좋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머리 위로 치켜들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등 뒤로 팔을 쭉 뻗었다. 전부 다른 자세였지만 크게 휘두르기에는 모두 좋은 거동이었다. 요란한 기합소리도 있었다. 멘디가 놀라서 몸을 움찔했을 정도로 힘이 실려 있었다.

바츠는 단발의 총성과 함께 가장 빠르게 접근하는 사내를 향해 몸을 비틀며 발을 뻗었다. 그는 머리 위로 치켜든 자신의 손도끼를 휘두르기도 전에 바츠의 발차기에 복부를 얻어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얻어맞는 순간 양 발이 동시에 떠올랐을 만큼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대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바츠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둘 가까워지는 그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대부분 손에 쥔 무기를 제대로 휘둘러보기도 전이었다. 그들은 얻어맞은 자리를 부여잡고 자리를 이탈하기 바빴다. 충격을 금방 회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일부는 그대로 실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바츠는 그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더그가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바츠보다도 더 빨리 저항을 시작했다. 바츠가 신호로 생각한 단발의 총성은 그의 총구에서 뿜어진 것이었다. 그는 이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제법 정확한 사격솜씨를 발휘했다. 그 주변에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만 세보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세 명이나 쓰러뜨렸다. 총성은 고작 5번 밖에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바츠가 눈으로 확인한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의 소총을 둔기로 삼아 달려드는 그들과 용감하고 능숙하게 맞섰다. 무려 두 명이나 쓰러뜨렸을 정도였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달라보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미 그는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한 상태였다. 바츠가 무너져 내린 계단 밑으로 추락했을 때, 밧줄을 가져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홀로 해낸 일이었다. 비록 그는 운이 좋았다는 말로 겸손했지만, 운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바츠는 쓰러뜨려야 할 대상이 아직 둘이나 남아있었지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더그를 향한 신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를 믿음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믿고 관심을 옮긴 곳은 안쪽 테이블이었다. 카니지를 들고 있는 케니스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츠는 그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그 모습에 놀란 케니스는 황급히 카니지를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바츠의 무릎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테이블에 내딛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탄력을 이용해 곧장 또 한 번 뛰어올랐다. 그러자 그가 휘두른 카니지는 허공을 갈랐고, 바츠는 그가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에 내려서며, 그의 얼굴을 걷어 차 버렸다. 그는 얼굴에 정면으로 바츠의 발차기를 얻어맞고는 뒤로 나자빠졌다. 완전히 틀어져있던 상체 때문에 고목이 쓰러지는 것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가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을 내뱉었다.

바츠는 바닥에 쓰러진 그의 옆으로 내려서며, 그가 떨어뜨린 카니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부여잡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그의 손등을 칼끝으로 노크를 하듯 두드렸다. 그러자 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손을 치우고는 말했다.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통증과 충격으로 아직 몽롱해 보였다.

“자, 장난이었다고! 그냥 장난 좀 쳐 본거야!”

그는 말을 하는 동안 완전히 주저앉은 코로 인해서 쏟아져 내리는 피를 몇 번이고 뱉어내야 했다. 다량의 혈액이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가며 입안을 지속으로 틀어막았다. 그가 입을 열고 숨을 쉴 때마다, 뿜개처럼 안개를 만들어내고는 했다. 아주 붉은 안개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충격으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며, 자꾸만 정신이 현기증으로 흐릿해지고 있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데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눈치였다. 손가락을 쫙 편 양손을 들어 올려 보이기까지 했다. 어림없는 짓이었다. 바츠는 그의 행동은 물론이고 그 어떤 말도 믿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생각이 변했어. 나라고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에? 그, 그럼! 그렇지! 그렇고말고!”

바츠는 그가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서둘러 맞장구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이미 제정신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에게 말했다.

“혹시 조시안느라고 알아? 번화가에서 술집을 하는 여자인데.”

“조시안느? 프레디의 딸?”

“네놈이 그녀의 가족을 헤쳤다지?”

바츠의 물음에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기억을 해내지 못하는 듯 보였다.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는 지금 대화를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뒤늦게 물었다.

“무,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 웃으라는 소리지, 이 병신 같은 새끼야.”

바츠는 그의 얼굴을 짓밟듯 다시 한 번 발로 걷어차고는, 그의 머리가 바닥과 부딪힌 후 튕겨 오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카니지를 휘둘렀다. 그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던져진 돌멩이 같았다.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테이블에 가서 부딪힌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매우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그의 얼굴을 결국에는 뭉개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을 손쉽게 제압했다는 사실로 뿌듯했다. 더그가 그 사이 자신이 외면하고 남겨둔 남은 둘을 깔끔하게 때려눕힌 상태였던 것이다. 그의 선전이 너무도 반가웠다. 게다가 멘디 역시 아무런 상처도 없이 무사했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비록 더그가 스스로도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놀란 얼굴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멘디가 순간적으로 휘몰아친 거친 몸싸움에 당황해서 양팔을 각각 접어 올린 상태로 손을 둥글게 말아 쥐고 있는 모습이 여전히 불안하게 보였지만, 마음을 놓기에는 충분했다.

바츠는 그 둘이 있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자신도 함께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것처럼 부푼 가슴에 질식하고 있는 멘디를 달래주었다. 그녀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바츠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뒤에,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바로 해주었다. 그리고는 한쪽 어깨를 살포시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에 올려 조금이라도 빨리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창백해진 얼굴의 그녀가 손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과 감각으로 안정감을 느끼길 바랐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그녀가 금방 호흡을 고르게 가다듬기 시작했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났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곳의 소란을 들었는지, 밖에 총을 들고 서 있던 사내들이 안으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들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총구를 세우고 있었다. 바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방아쇠를 당긴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의 목숨도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단 둘이 아니라 대여섯의 일행과 함께였다. 그들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둘과 똑같은 총기를 가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들이 자신과 더그 그리고 멘디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것보다도 유일하게 맨손으로 모습을 나타낸 그에게로 관심이 갔다. 정확히는 그녀였다. 그녀는 가장 앞으로 나와 서기 위해서 그들 사이를 헤치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적의가 없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었다. 뒤늦게 맞서서 총구를 들어 올리는 더그를 향해 손을 뻗어 진정시키기까지 했다. 그녀가 앞에 나와서며 말했다.

“당신이 일리트시의 집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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