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 상처 -- > * 154화 *
“1발? 2발? 그쯤 될 겁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불길해요. 매우 기분 나쁜 느낌이에요.”
바츠는 지금 느껴지는 감각이 위험을 알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스치는 바람들이 온몸을 휘감으며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마치 헤러티커를 마주보고 선 기분이었다. 바츠는 입을 열어 그 답답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허공에 바람을 그려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매우 빠르게 어딘가로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이 왜 저리 방정맞은지 알 것 같았다. 바츠는 그 기분을 더그에게 두 눈으로 전해주었다. 그러자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 만요! 저 놈들을 뒤져볼게요!”
더그의 손이 건물 주위의 시신들을 가리켰다. 처음 들어설 때 제압했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차가운 회색빛 무덤에 묻혀있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몸뚱이 위에 하늘에서 내린 회색 모래가 대충 뿌려져 있을 뿐이었다.
바츠는 더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을만한 것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더그의 도움이 절실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앞두고, 부정적인 대답으로 벌써부터 그의 기세를 꺾고 싶지 않았다. 그가 실망하고 불안해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풀이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사이 더그는 다급하게 그들의 회색빛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바람에 훌훌 날릴 정도로 가벼운 모래라서, 파내는 데에 어려움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다만 중간 중간 시린 손을 오물거렸을 뿐이었다. 멘디가 그런 그의 모습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행동을 역겹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바츠 역시도 시신을 뒤척이는 건, 언제 봐도 소름끼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따로 내키지 않았다. 처음 보는 광경일 그녀에게 이해를 구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였다. 물론 바츠는 더그를 이해한다. 그가 만약 그들의 다른 물건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자신이 함께 해주지는 않겠지만 눈 감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있어요! 탄약이 남아있습니다!”
그때 더그가 팔을 높게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총의 탄창이 들려있었다. 목소리가 밝은 것을 보니, 제법 양이 많은 모양이었다. 바츠는 다른 시신도 마저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멘디가 고개를 홱 돌리며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그녀에게 이해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써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 나름대로 판단하고 받아드리길 바랐다. 그저 그녀가 혐오스럽게 바라보며 한 발 옆으로 떨어지는 걸 씁쓸하게 느낄 뿐이었다. 그 틈에 더그는 시신들에게서 탄약을 모두 회수해왔다. 무려 20여발 정도나 됐다.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바츠는 그 탄약을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동시에, 이제는 꽤나 가까워진 그 위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어오는 바람이 칼날처럼 온 몸을 할퀴고 있었다.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살점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느낌은 더그와 멘디마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더그가 허겁지겁 자신의 소총을 어깨에 견착하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고, 멘디는 슬그머니 바츠의 뒤로 숨어들었다. 바츠는 그녀가 자신의 한쪽 허벅다리를 꼭 쥐는 것을 느꼈다. 그 정도로 눈앞의 위협은 대단했다.
“왔다...”
바츠의 시야에 드디어 위협이 실루엣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변해버린 어둠을, 거침없이 꿰뚫고 다가오는 인형이었다. 그는 따로 숨거나 애써 자신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너무도 당당하게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건장한 체격과 힘이 느껴지는 풍채가 얼핏 헤러티커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전에 느꼈던 감각을 종합해보면 정말 헤러티커 같았다. 하지만 곧은 걸음걸이와 바람에 펄럭이는 옷깃이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조금 전까지 전해지던 그 매서운 기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기운의 주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의 몸에서 자라나온 수십 개의 칼날이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난도질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흩날리는 눈발이 멍울진 것이 마치 그 때문인 것 같았다. 하늘에서 추락하는 거대한 눈덩이가 그의 칼날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렇게 느껴졌다.
바츠는 긴장감을 풀 수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에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더그가 몇 번이고 자신을 돌아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을 알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섣불리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동질감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앞에까지 다가와서야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강한 위화감을 풍기고 있었지만 전보다는 훨씬 덜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눈길을 끈 것은 그가 걸치고 있는 검은 슈트와 검은 망토였다. 그는 헌터였던 것이다. 바츠로서는 의아함을 감출 길이 없는 결과였다. 이전까지 느껴지던 위협은 결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헌터라지만 어떻게 그런 기운을 뿜어낼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 헤러티커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이런 느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마주보고 서서는 말했다.
“일리트시의 집사...불편한 행동을 하는 군.”
“누구...!
바츠는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어째서 자신을 향해 그토록 무서운 기운을 토해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미세하게 느껴지는 특유의 냄새와 목소리가 기억 저편의 흔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스타드? 당신이 여길 어떻게...”
바츠는 말끝을 맺을 수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며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더그처럼 생각이 복잡했다. 조금 전 그 날카로운 기운은 진짜 살해 위협이었고, 숨통을 정말로 조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그가 뿜어내던 예기는 어느새 사그라지고 없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꼭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자신이 잘못 느낀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한 채로 남아있는 더그와 멘디를 보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길 군.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그가 덤덤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심란한 기색이 묻어났다.
“스톡홀름 시티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기억하는데...벌써 그곳을 다녀온 건가요? 그곳은 대체 어디죠?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당신은 이곳과 반대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북쪽으로 가야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질문이 많군. 그랬지. 하지만 중간에...아니, 그런데 너야 말로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여기는 전진기지의 관할을 벗어난 곳 같은데?”
“작은 사고가 있었어요. 일리트시의 주민을 데려가려고 온 거죠. 바로 이 녀석이에요.”
바츠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뒤에 숨어서 눈치를 보던 멘디를 보여주었다. 그녀가 그를 경계하며 앞으로 나서지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반 밖에 보여줄 수 없었지만 그가 알아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묘한 눈길로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바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군. 음...별다른 건 없는 모양이군.”
“무슨 말이죠? 대체 여기에 왜 온 거예요? 방금 그건 뭐였죠?”
“신경 쓰지 마. 내가 길을 잃었던 것뿐이니까...”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이쪽으로 다가올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물에 젖은 빨랫감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어깨가 처지거나 고개를 떨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공기들이 무거워져 침울해 보인 것이었다.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분위기는 항상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 상황 때문에 다르게 보였을 뿐이었다. 바츠는 다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이곳에 남기고 간 의문을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힘없는 걸음으로도 용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손등에 내려앉는 눈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뭐죠? 저 헌터가 ‘라파엘’인가요? 지금 그가 우리를 살해하려고 한 겁니까?”
더그가 겁에 짓눌려 푹 잠긴 목소리로, 그가 사라진 곳과 바츠의 얼굴을 정신없이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지금의 상황이 매우 황당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조차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것은 더그가 느낀 것처럼 자신이 살해당할 뻔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분명 살기를 띄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무 어두워서 목표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뒤늦게 예기를 도로 감추고 조용히 달아난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뭔가 개운하지 못한 기분으로 찝찝했지만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대신 과연 노련한 그가 목표를 혼동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의문이 피어날 뿐이었다. 그가 착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에게 숨져갔을 이들이 느꼈을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숨결이 절로 한가득 나왔다. 그런 바츠의 바지자락을 멘디가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 너무 추워...”
그녀가 벌벌 떨고 있었다. 지상의 추위에 노출된 채 긴장감이 풀리자, 오한이 밀려든 모양이었다. 바츠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 덕분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자 뒤늦게 엄청난 추위가 느껴졌다. 혼란스런 감정을 애써 접어 넣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당장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조시안느의 샬롱으로 향했다.
그녀의 샬롱은 한산했다. 종업원들이 테이블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들을 보자마자 바로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처음 보았을 때,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따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멍한 얼굴로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보였다. 바츠를 발견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조금 놀란 기색을 엿볼 수 있었지만, 반가움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말했다.
“무사했군요.”
“내가 할 소리를 하는군.”
“...미안해요.”
“됐어. 그저 사고였을 뿐이잖아. 그렇지? 하룻밤 머물고 싶은데, 방이나 구해줬으면 좋겠군. 비용은 충분히 지불하도록 하지.”
바츠는 그녀의 사과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굳이 섭섭한 기분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건너편 건물을 소개해주었다. 그녀는 그곳을 자신이 운영하는 여관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사람을 붙여 방을 안내하도록 했다. 1층에서 일하던 바텐더가 그였다. 바츠는 그를 따라 걸음을 돌리기 전에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 어머니가 이 말을 전해달라더군.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으니 행복하라고 말이야.”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처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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