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 상처 -- > * 156화 *
“그만 돌아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없어. 당신도 알잖아, 나를 쏜다고 해도 아무 의미 없다는 걸 말이야. 놈을 대신해서 날 살해한다고 정말 분이 풀릴 것 같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당신의 목적은 이미 실패했어. 그 구차한 핑계거리마저도 말이야. 당신에게 허무를 가져다 줄 거야. 죄책감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르지. 차라리 날 함정으로 밀어 넣는 동안 적당한 때를 골라 패거리들과 함께 달려들지 그랬어? 그럼 마음이 좀 더 편했을 텐데 말이야. 설마 내가 계단 밑으로 추락해서 끝났다고 생각했나? 당신은 그저 나약한 고집불통일 뿐이야. 멍청이일 뿐이라고.”
그녀는 바츠의 신랄한 힐책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한 눈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 등 뒤에 섰던 랜턴의 검은 흔적이 그녀의 얼굴로 스며들었다. 불그스레한 그녀의 눈 밑을 새카맣게 물들였다. 핏기를 잃고 숨져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그 모습에 겁을 먹은 랜턴의 불꽃이 몸서리를 치면, 그녀의 표정이 수십 수백 개로 나타났다. 일렁이는 불꽃은 어두운 그녀의 얼굴을 멋대로 수놓았다. 그녀가 눈을 뜨고 공허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 끝을 쉽사리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언제 돌아오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츠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다. 그녀가 그 끝에 서면 손을 내밀어줄 생각이었다. 비록 그것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언저리라도 상관없었다.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머지않아 그 끝에 도착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아...당신 말이 옳다는 거...이미 늦었지. 그래서 당신이 더 미웠던 것 같아. 그 놈은 내 손에 죽었어야 했는데...놈은 정말 미치광이였어. 엄마의 얼굴을 불로 태운 이유가 나를 낳았다는 이유였대. 그런데도 엄마는 그의 옆에 머물렀지.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했어. 더러워...나라면 혀를 깨물고 자살했을 거야. 엄마는 나를 위해 놈의 곁에 머문 거라고. 난 그게 너무 싫었어.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도 싫었고! 내게 용기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죽겠다고 다짐했어. 더러운 엄마와 그 놈을 죽이고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엄마가 이해되기 시작했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때까지 엄마라고 제대로 부른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고...내게도 그래야 하는 의미가 생겨난 거야.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그 의미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안타까운지 알아? 반짝이는 눈으로 나만 바라보았다고. 그 작은 손으로 나를 만지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 작은 입으로 나를 말하기 위해 애썼지. 그 의미가 나를 다시 살게 했어. 내게 죽지 말라고 말했지. 하지만 놈에 대한 저주는 더욱더 진해졌어. 나를 이렇게 살게 한 그가 너무 원망스러웠지. 생각해 봐. 나중에 내 아이가 받을 상처가 얼마나 클지 말이야. 내 아이가 아파할 것을 생각하면 난 벌써부터 고통스러워. 가슴이 뜨겁게 타들어가는 것 같다고. 그 아이는 알까? 내가 얼마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난 그 아이를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과거의 흔적을 통째로 지워 버릴 수도 있지. 엄마에게는 감정이 없냐고? 그녀를 사랑하느냐고? 그녀를 증오해! 내 아이에게 상처를 줄 흔적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증오해!”
그녀가 호흡을 고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놈은 나도 겁탈했어. 나를 살게 만든 놈을 저주했어. 내 아이가 나중에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절대 용서할 수 없었지. 그런데 놈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 거야. 내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말이야. 일리트시의 집사에게 죽었다고 하더군. 억울했어. 내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어. 처음에는 놈을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아쉬움을 느낀 것이라고 착각했지. 하지만 그건 억울함이었어. 내가 해야 할 일을 강탈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 그보다 더 화가 났던 게 뭔지 알아? 어머니가 그 사실을 듣고 울었다는 거야. 진심으로 슬퍼했어. 너무 역겨워. 그런 나를 보고 뭐라고 한지 알아? 숨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거라고 했어. 그리고 나를 만날 수 있게 해준 그가 고마워서 울었다고 했지. 말이 돼? 난 울지 않았어! 레이니를 만나게 해준 건 하나도 기쁘지 않아! 난 레이니를 원하지 않았어!”
“하지만 레이니를 가장 사랑하기도 하잖아?”
그녀는 바츠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츠의 얼굴을 한참동안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얼굴에 그려진 불꽃의 얼룩이 한 차례 크게 흔들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맞아...그 아이는 내 전부야. 사람들이 놈의 아이라는 걸 알아볼까 겁나서 항상 숨겨두고 있어. 자랄수록 놈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할 테니까 말이야. 괴물의 딸이라고 놀림을 받고 말겠지. 그건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내 아이는 괴물이 아니야...괴물이 아니라고! 괴물은 당신이나 그 자식 같은 놈들에게나 쓰는 거라고! 내 아이는 괴물이 아니야!...”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에 가득하던 붉은 얼룩을 주위로 단 번에 밀어내, 주위를 삽시간에 불길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등 뒤에는 커다란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열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열기가 사그라지는 것 역시 순간이었다. 그녀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츠의 냉정한 태도를 바라보며 자신의 격한 감정을 차분히 짓눌렀다. 바츠의 무덤덤한 시선이 그녀에게 끼얹져 진 것이다.
“...그렇게라도 지켜주고 싶었어...비록 하루 종일 방안에 갇혀, 문틈으로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밖에 하지 못하지만...그렇게라도 지켜주고 싶었어. 내가 세상에 남은 그 더러운 흔적을 전부 지워낼 때까지 말이야. 내 아이니까. 내 아이라고...내 아이란 말이야...”
바츠는 그녀의 불길이 자신의 시선에 의해 진화되어가는 걸 보며, 남은 불씨도 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눈에 띌 만한 뭔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침착한 모습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그녀의 진한 눈물이 대신해주었다. 그녀의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랜턴의 불빛으로 얼룩졌던 상처 위를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불타오른 그녀의 얼굴은 화마의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하얀 피부가 잿빛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하는 거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지금처럼 그냥 살아. 어차피 이제 누군가에게 보호명목으로 착취당하는 일은 없잖아. 그전에도 그랬겠지만 말이야. 그 전에 기억은 잊으라고. 그 흔적은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흉터일 뿐이야. 놈은 이제 없어. 대신 당신 곁에는 작은 딸이 있지. 당신의 어머니도 있고. 그녀가 아직도 밉다면 떠날 수도 있잖아?”
바츠는 그녀에게 진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어렵지 않게 해내고는 했던 것인데, 지금은 너무도 낯설었다. 내뱉는 말투가 자신이 생각해도 딱딱하고, 가슴 속에 생각하고 있는 진심은 묻어나지 않고 있었다. 자칫 그녀가 언짢게 느낄 수도 있었다. 절로 노파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다행히도 진심을 전해 받은 모양이었다.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어느새 말투도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상냥하게 돌아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나요? 이런 날 내버려 둘 거예요?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게 나에요. 그런데도 괜찮나요?”
“흥미 없어. 그런 건 내게 너무도 흔한 일이거든.”
바츠는 잠들어 있는 멘디를 향해 한 차례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그녀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눈과 입은 모두 웃고 있는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물이 턱을 타고 작별을 하는 것처럼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은 치마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소매로 촉촉해진 얼굴도 보듬으며, 마지막 흔적을 지워내려 했다. 하지만 가장 늦게 드리운 미소만큼은 지워내지 못했다. 바츠는 그런 그녀가 문을 열기 직전에 물었다.
“그런데 그 바텐더는 뭐지? 그는 당신의 사람이 아닌가? 칼리굴라와 패거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 그도 상처가 있나? 그래도 남들보다는 덜 했을 텐데? 당신 때문이라도 말이야. 그런데도 진심으로 끔찍하게 생각하더군. 왜지?”
그녀가 반쯤 돌린 몸으로 얼굴은 바츠를 향한 채,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없어요. 아무리 그들이 필요한 존재였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헌터들과 같은 이유죠.”
“흥미로운 대답이군. 당신에게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
바츠는 터져 나오는 실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농담어린 대답으로 자신의 위로가 효과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이 기분 좋았다. 그녀에게 괜찮은 이별을 선물했다는 생각으로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입가의 미소를 더욱더 진하게 그려 넣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문턱을 채 넘기도 전에 걸음을 세우며 다시 돌아보았다.
“날 안아줄래요?”
바츠는 돌아보는 그녀의 두 눈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붉게 충혈 된 눈이 반짝였다. 조금 전 흘린 눈물이 아직 남아있었다. 바츠는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당신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다니 놀랍군. 전혀 어울리지 않아. 당신은 강한 여자잖아.”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독면을 쓰고 살아가니까요.”
“흥, 당신 어머니와 똑같은 말을 하는 군.”
그녀가 저도 모르게 또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을 손으로 재빨리 훔치며 말했다.
“가족은 같은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가장 작은 무리잖아요. 당신은 그 방독면을 언제 벗나요?”
“안전하다고 생각될 때?”
바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자신의 방독면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맞아요. 안전하다고 생각될 때 방독면을 벗죠.”
“...당신은 지금 안전한 가?”
바츠는 그녀의 말에 가슴 한쪽이 짜릿한 걸 느꼈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여운은 굉장히 강렬했다. 눈앞이 환해졌다고 느껴졌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그 감정을 담아 그녀에게 물었다. 시선은 그녀가 아닌 방독면을 향해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지금까지 들었던 목소리 중 가장 편안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말했다.
“네. 무척이나요.”
“그럼 내 대답은 하나야.”
바츠는 애써 냉정함을 찾으며 대꾸했다. 그녀가 서운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와 줄래요?”
“미안하군.”
“그것도 그럴 줄 알았어요.”
바츠는 그녀에게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미련이 남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망스러운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실망감을 활짝 웃는 얼굴로 표현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어둠과 불꽃의 경계가 그녀의 실루엣을 폐기물 처리장에서 몰래 훔쳐보던 아델리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거 알아요? 남자들의 옷은 여자가 가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벗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런가?”
“그래요. 그리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도 매우 쉽죠. 양 손과 입만 있으면 되요. 거부할 수 있는 남자는 없어요.”
“재미있는 생각이군.”
“농담인 것 같아요?”
“...농담이었으면 좋겠군.”
바츠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얼굴 가득한 미소를 지우고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랜턴의 불꽃이 고스란히 비쳐지는 맑은 눈이었다.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눈물 때문이었다. 랜턴의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 일렁이는 불꽃을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진화하며 말했다.
“...잘 자요.”
그녀가 몸을 돌려 나간 것도 그때였다. 그녀는 그렇게 돌아갔다. 더그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그는 다섯 명이나 되는 접대부와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바에 그대로 잠들었다가 새벽 늦게야 돌아왔다. 그녀의 과한 인심에 완전히 취했던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다 끝난 것 같다는 생각에 환희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환희는 얼마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혼란으로 변했다. 비클레타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에 일어났다. 일리트시에 거의 도착했을 쯤,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제 밤에 보내진 것으로 보였다. 벨리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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