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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58화 (158/268)

< --   11. 상처   -- >         * 158화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며칠 전 레벨6에서 부사령관을 만난 것?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인 집사가 되기로 한 날? 그것도 아니라면 케일리가 그 놈과 결혼을 하게 된 것? 그 시작이 대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아르크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던 그날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들이 흩날리는 눈보라처럼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나 둘 지면으로 녹아들며 흔적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바츠는 걸음을 더욱 서둘러야 했다. 밖은 여전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조바심이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발목까지 쌓인 눈과 칼날같이 불어오는 바람의 훼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독면 렌즈에 급격히 차오르는 성에가 천천히 다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아르크. 아르크로 가는 걸음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 시작하는 것은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조바심을 신고는 눈 위를 날렵하게 내달렸다. 뿌연 눈보라 너머로 오래 전 잠에 빠진 거대한 도시가 보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그 도시가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동사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게 될 쯤, 땅속으로 길게 이어진 경사를 따라 내려갈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미동조차 없는 도시만큼 차가운 또 다른 도시였다.

바츠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우직하게 막아서고 있는 거대한 쇳덩이부터 마주해야 했다. 융통성을 찾아보기 힘든 냉정한 모습으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싸늘한 눈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츠는 걸음을 돌려세우는 대신, 그 오만한 면상에 주먹을 날려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었다.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그의 몸부림이 플랫폼에 울려 퍼지길 바랐다. 그 기대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천둥번개가 내리쳐도 안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그는 단단하고 두꺼웠다. 고작 사람의 작은 주먹에 겁을 먹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저 그가 귀찮음에 못 이겨 두 손 들게 만들려는 생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즉각적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길을 따라 늘어선 양 옆의 절벽에서 자동소총이 튀어나오며 바츠를 겨냥했다. 뒤이어 어디선가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였다. 그가 말했다.

“어이, 헌터! 뭐하는 짓이야? 빅애스의 개방은 이미 끝났어. 소란피우지 말고 그만 돌아가. 내년에는 좀 더 일찍 오라고.”

그의 목소리에 황당한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약속된 개방시간이 이미 수십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찾아온 손님이 많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카메라를 찾기 위해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외쳤다.

“난 헌터가 아니야! 일리트시의 집사다!”

“집사라고? 집사? 헌터들을 돌보는 그 집사? 집사가 여긴 무슨 일이야? 코드! 그래, 코드를 말해 봐!”

“D14-E.E.-5! 당장 문을 열고 부사령관을 불러와!”

바츠의 잔뜩 흥분한 외침에 그가 갑자기 바빠졌다. 그의 다급한 심정이 스피커를 통해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의 웅얼거리며 횡설수설하는 목소리부터 종이를 거칠게 넘기는 소리,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긴장한 목소리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워낙 소란스러워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와 누군가가 나눈 작고 짧은 대화 한마디가 고작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몰라! 일리트시의 집사라는데, 정말이야! 봐! D14-E.E.-5. 코드가 일치해!”

바츠는 그가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동안 침착하게 그를 기다렸다. 자신을 향해 겨눠진 자동소총을 피해 슬쩍 한 발짝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허리춤의 카니지를 움켜쥐었는데, 지상으로 나와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해했을 때처럼 손발이 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마구 떨리고 있다고 착각이 일만큼 감각이 얼얼했다. 팔다리가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그 감각이 강해질수록 카니지를 더욱더 세게 움켜쥐어야 했다. 때마침 들려온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자신도 모르게 카니지를 뽑아들고 마구 휘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몹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고요를 남기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스피커를 통해서 그 어떤 작은 소음도 들을 수 없었다. 바츠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를 믿고 좀 더 기다리는 일이었다.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빅애스를 몇 번 발로 걷어차 보기도 했지만 그를 불러낼 수는 없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바츠가 슬슬 초조함을 느끼고 주먹으로 다시 빅애스를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가 심호흡이라도 하고 왔는지,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무엇 때문에 온 거요?”

“내 누이를 보러 왔어! 케일리! 그러니 당장 열어!”

바츠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노력했던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해진 기다림으로 인한 초조함이 오히려 더 자극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꾸만 불필요하게 지연되는 부분이 짜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 한 번 침묵을 선사하며 말을 아꼈다. 아직 바츠의 심경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참 늦은 대답이나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들려온 그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조심스런 말투였다.

“...그녀는 죽었어...”

“그래서 온 거라고! 당장 열어! 지금 당장 빅애스를 열지 않는다면 강제로 뜯어내는 수밖에 없어! 그걸 바라지는 않겠지?”

바츠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비록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라면 자신이 호언한 그대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기분이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이 모두 자신감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이번에는 바츠의 마음을 느꼈는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할 대답을 빅애스에게로 떠넘기는 것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빅애스는 하얀 입김을 길게 뿜어내는 것으로 대답을 시작했다. 천천히 뒤로 밀려나며 생겨나는 틈으로, 뜨겁게 가열된 주전자의 증기처럼 뿌연 연기를 연거푸 분출했고, 뾰족한 못으로 긁어내는 듯한 금속의 마찰음도 함께 토해냈다. 뒤이어 안쪽에서 연속되는 날카로운 단음의 경보음이 들려왔는데, 모두가 빠르게 이뤄지는 것과는 다르게 정작 빅애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굼떴다. 주변에 한껏 일어난 짙은 수증기가 빠르게 말려들어가며 플랫폼을 가득 채울 때까지도 절반도 채 물러나지 못했다. 정신없이 몰아치던 눈보라가 진눈깨비가 되어 비로 변해가는 것보다도 훨씬 둔했다.

바츠는 빅애스가 완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몸이 들어갈 최소한의 공간이 확보되는 순간, 그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는 벌써 허리까지 차오른 수증기 호수를 헤집고 샤워장 입구를 향해 달렸다. 안에서 경계를 하기 위해 나오는 군인들이 이제 막 플랫폼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들은 빠르게 달려오는 바츠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총구를 겨누어야 했다. 바츠는 그들이 방아쇠를 당기기는커녕 조준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샤워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샤워장을 지나던 군인들을 옆으로 밀치고 지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 앞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샤워장 입구에는 적어도 3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앞에는 푸른색 정복을 입은 부사령관이 있었고, 그 뒤로는 하얀색 정복을 입은 그의 친위대가 그리고 그 뒤로는 소총을 든 군인들이 긴장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 중간 관리자와 낯익은 얼굴도 눈에 띄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나!”

부사령관은 바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부터 내내 호통으로 일관했다. 단단히 화가 났는지, 부릅뜬 두 눈으로 바츠를 쏘아보며 맞이했다. 바츠는 그를 향해 걸어가 마주보고 서며, 아직 마르지도 않은 소독액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자신의 방독면을 거칠게 벗어 한쪽 구석을 향해 던져버렸다.

“이게 얼마나 낭비적인 일인 줄 모르는 것인가? 이 무슨 난리인가?”

바츠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부사령관의 목소리가 한풀 누그러졌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조금 과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냉정한 모습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지켜보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케일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겁니다. 난 다른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요.”

“지금 이 지경을!...메시지를 받았을 텐데? 전해들은 그대로네.”

부사령관이 발끈하며 또 다시 언성을 높이려다가 가까스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바츠는 덩달아 자신도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역시나 마찬가지로 노련하게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니까 왜!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묻는 겁니다.”

“그건 우리도 모르네. 지금으로서는 발을 헛딛고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것으로 보고 있네. 그대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모양이야. 운이 나빴던 거지.”

그가 애석한지 어둡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 대답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우연한 사고라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발을 헛딛고 넘어지다니요? 대체 무슨 말이죠? 경증 외상성 뇌손상이 무엇인지 나만 알고 있는 겁니까?”

“우리라고 왜 모르겠나. 하지만 정황이 그렇다네. 자네는 케일리의 남편을 의심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 그건 우리도 충분히 염두를 해두고 있네. 신중하게 말이네.”

“염두라니요? 가장 유력한 자가 바로 그자라고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왜 당신과 관리자들만 모르는 겁니까!”

바츠는 자신의 감정을 오랫동안 짓누르기 힘들었다. 이곳까지 오며 이미 여러 차례 다독여진 흥분이 충분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 모든 것에는 규율과 절차가 있네. 그게 질서지 않는가. 우리가 함께 이야기한 바로 그것 말이네. 벌써 잊었는가?”

“규율과 질서? 잘 모르겠군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겁니까?”

바츠는 이를 악물며 그에게 물었고, 그는 당혹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자네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도가 지나치고 있다는 걸 명심하게. 그만 돌아가게. 우린 최선을 다했네. 자네가 고집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야. 그는 혐의가 없단 말이네. 우리라고 의심하지 않았는지 아는가? 하지만 그의 알리바이는 확실해.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네에게 소식을 전한지 벌써 반나절 이상이 지났네.”

“메시지가 늦게 도착했단 말입니다! 제때 도착했다면 내가 이곳에 온 것도 이미 그전이었겠죠!”

바츠는 다시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한 것으로도 모자라 억울함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을 수습하고 싶은 것으로만 보였다.

“바츠, 이러지 말게. 흥분을 가라앉히란 말이네. 자네 때문에 상황이 어떤지 보란 말이네.”

바츠는 그의 간곡한 목소리에 그제야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대부분 흔들리는 눈으로 겁에 질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의 모두가 그런 얼굴이었다. 그의 친위대만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우린 현재 자네 때문에 커다란 위험에 노출된 것이네. 오늘은 빅애스가 개방될 날이 아니란 말이네.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났지.”

“나 때문이라고?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할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나를 화나게 만들려는 겁니까?”

“바츠, 자네가 눈이 있으면 직접 보게나. 우린 자네 덕분에 빅애스를 강제로 48시간 개방하게 되었네.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불안에 떨어야 할 것 같나? 주민들은 유례없는 상황에 위축될 테고, 군인들은 예기치 못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네. 아르크의 수백 명이 위험에 처한 것이란 말이네. 그걸 모르겠나? 자네는 그걸 원하는 것인가? 우리 모두 함께 죽길 바라는 것이냔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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