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 상처 -- > * 159화 *
바츠는 그가 조금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꾸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위태로운 시선들이 그의 말에 소리 없이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달갑지 않은 손님에게 차마 모진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있을지, 말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서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쉽게 물러나지지가 않았다. 아니, 물러날 수가 없었다. 뜨거운 호흡만 코로 연거푸 뿜어질 뿐이었다. 그 소음이 고스란히 귓가로 들려오며, 머릿속을 심하게 울렸다. 그가 다시 말했다. 방금 전 감정을 재빨리 낚아채 어딘가로 묻어버리고 난 뒤의 목소리였다. 한결 부드러웠다.
“바츠, 돌아가게. 그럼 꼭 사인을 제대로 밝혀서 전하겠네. 나를 믿고 그만하게. 이미 헌터들도 떠나서 우리에게는 너무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란 말이네. 헤러티커라도 출몰하면 이곳이 쑥대밭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네. 그러니 제발 그만하고 돌아가서, 아르크를 지키는데 만전을 기해주게. 자네, 자네가 아르크에게 얼마나 귀중한 자산인 줄 모르는가? 자네의 존재가 우리를 살리고 있단 말이네. 그 위대함으로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 말게. 그건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니네.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바츠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진심으로 애원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아르크를 위해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그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정확히는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아르크를 진정으로 생각하면서도 케일리에 대한 애통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보여주었던 그의 애도가 왜 그리 짧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한참동안 이야기하면서도, 케일리에 대한 유감을 표현한 것은 고작 한차례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지금은 진정성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외는 자신이 놓인 처지에 대한 변명과 애원뿐이었다. 바츠는 말했다. 뜨거운 콧김에 짓눌린 무거운 목소리였다.
“당신에게 나는 괴물일 뿐인 거지? 아르크를 지켜줄 혐오스러운 괴물. 당신이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쉼터를 지켜줄 그런 괴물 말이야.”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네. 우린 지난번에 우정을 확인하지 않았나? 난 진심이었네. 우리가 이웃이 되길 기다리고 있단 말이네. 자네 누이의 일은 유감이네. 진심이네. 자네 누이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불상사는 아니었다는 것을 믿어주게. 아르크 내부에서의 살인은 중형이라는 사실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는가? 아르크는 주민 모두를 존중하며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네.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따르기만 한다면 말이지. 자네 누이의 일은 그냥 사고였단 말이네. 그런데 그 말버릇은 뭔가? 내가 아무리 자네를 신뢰하고 좋아한다지만 기본적인 예를 갖췄으면 좋겠네. 내게 존중을 표하란 말이네.”
“현재로서는 그렇겠지요. 아직까지는 그래야 할 테고요.”
바츠는 섭섭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하소연하는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꿈을 꾼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하며 말했다. 아직 잠에서 덜 깨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자네 설마...설마 내가 자네 누이를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런 건가?”
바츠는 대답대신 그를 바라보던 시선에 좀 더 힘을 실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맙소사...이보게, 자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래서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나? 내가 자네 누이를 왜...!”
“어차피 원하는 건 하나였잖습니까? 그걸 위해서는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 말이죠.”
바츠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변명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자네에게 주어질 혜택이 아까워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건가? 맹세하네.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말이네. 그녀 때문이지? 그녀 때문이야. 틀림없어. 장로 로리나, 그녀가 자네를 또 자극한 게로군. 그녀를 가까이 하지 말게. 그녀는 미친 사람이야. 자네도 이미 여러 차례 만나보았을 것 아닌가?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야. 그녀는 망상 속에 사는 정신병자일 뿐이란 말이네. 그녀의 모든 말은 허황된 것들이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목적만 있지. 그녀의 그런 헛소리에 혼란스러워 하지 말게. 자네는 내가 한 말들을 믿으면 되네. 우리가 나눈 대화들을 기억하란 말이네. 우리가 그때 나눈 이야기들이 진실이고 현실이네.”
바츠는 그가 케일리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다만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케일리에게 닥칠 불행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예고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정확히 언제라고는 꼬집을 수 없었지만, 분명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행을 유심히 지켜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르크는 물론이고 관리자들과 심지어 그녀의 이웃들마저도 침묵을 지켰다. 그녀에게 닥친 불행이 그저 소문에 그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바츠는 그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다.
“이제 뭐가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케일리는 이제 없으니까요.”
“바츠...자네 마음은 아네. 케일리의 남편이 의심스럽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정황이 너무 확실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케일리는 그날 레벨1에 갔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지. 그녀가 다시 발견된 건 다음날 폐기물 처리장 근처에 쓰러져 있던 것을 레벨1 거주자가 신고한 뒤였네.”
“그게 누구죠?”
“빌리언이네. 1구역에 거주하고 있지. 부인과 슬하에 딸과 아들을 각각 하나씩 두고 있네. 4년 전, 당시 일리트시 집사의 추천으로 이주해온 가족들이네. 그때 일리트시의 시장과 논란을 빗기는 했는데...뭐, 그건 아무래도 좋지.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네. 어쨌든 그의 신고로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네.”
“뭐라든가요. 그가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나요?”
“들은 그대로네. 길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네. 특별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지. 좀 오래된 멍은 좀 있었어도...얼굴은 물론이고 팔과 다리에도 있었네. 머리에도 있었고...”
바츠는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칼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상처들은 모두 그녀의 남편 짓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그가 단지 가까이에 있지 않았을 뿐이지, 그 전에 이미 가지고 있던 후유증으로 인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황상 그에게 죄를 따져 묻기는 힘들었다. 기껏해야 폭력에 대한 처벌이나 가능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을 크게 확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가 문제였다. 그게 부사령관인지 관리자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못마땅한 분위기였다. 케일리가 레벨1 출신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레벨2 출신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속이 타들어가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발, 내 말을 믿어주게.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게다가 자네가 생각하는 그 엉뚱한 짓을 내가 무엇 때문에 하겠나.”
그가 절박함이 묻어나는 절절한 목소리로 구걸을 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뒤쪽에 섰던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거들었다. 무리 중간에 섞여 있었는데, 그들을 헤치며 앞으로 걸어 나와 부사령관의 바로 옆에 섰다. 검은 긴 머리카락과 그만큼 검은 동그란 눈이 아주 잘 어울리는 벨리타였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바츠, 부사령관님의 말은 사실이야. 정말이야. 빌리언씨가 케일리를 발견해서 근처 군인에게 신고했어. 너도 알잖아. 폐기물 처리장은 평소에도 인적이 뜸하다는 걸 말이야. 그 흔한 빌리캄조차도 거의 가지 않아. 케일리는 레벨1에 있는 집을 청소하러 다녀오는 길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한 것 같아. 폐기물 처리장은 항상 위험한 곳이니까 말이야.”
바츠는 잠깐이었지만 그를 원망하던 마음을 천천히 안으로 접어 넣어야 했다. 그녀까지 이렇게 나서서 말할 정도면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사령관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도 케일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그녀에게 서운함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감정을 애써 짓누르며 그에게 말했다.
“그럼 케일리를 보게 해줘요.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겠습니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미안하네, 그럴 수 없네.”
바츠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비록 그가 난처한지 얼굴을 매만지며 말해왔지만, 내뱉어진 그의 말은 너무도 똑똑히 들려왔다. 그가 잠시 깜빡 잠들며 정신이 몽롱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죠? 왜 내가 케일리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는 겁니까?”
“그녀의 시신은 이미 처리가 되었네.”
“처리가 되었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누가 가져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아르크 내에서는 그런 관행이 없을 텐데요.”
바츠의 의아한 목소리에 그가 입술을 한 번 적시고 대답했다.
“폐기물 처리장에서 소각되었다는 뜻이네. 다른 레벨1 거주자들처럼 말이네.”
바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깜빡이며 그의 얼굴과 벨리타의 얼굴 그리고 뒤에 선 사람들과 주변을 차례로 둘러볼 뿐이었다. 마치 나르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마지막으로 고정한 그의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어야 했다.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말해줘야 할 겁니다. 내가 잘못 들은 거였으면 좋겠군요. 뭐라고요? 케일리가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옮기고는 슬쩍 눈치를 살폈을 뿐이었다. 바로 옆에 섰던 벨리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슬그머니 돌리며 바츠를 애써 외면했다. 중간에 두어 번 머뭇거리는 기는 했지만, 다른 뜻이 있다기보다는 달아나는 길이 불편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바츠는 아르크의 답답한 공기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삼켜내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케일리가 그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 버려졌다는 겁니까? 그 어둡고 끔찍한 곳에 말입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까?”
“버려진 것이 아니라 소각된 것이네. 다른 죽은 사람들처럼 말이네.”
그가 얼른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하지만 바츠의 눈을 바라보고는 금방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야 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안에서 폭발하기 전에 모조리 밖으로 끄집어내야 했다.
“그게 그거 아니야! 당신은 그곳에 가본 적이 없을 거야!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알아? 싸늘한 괴물과 역겨운 냄새로 가득하지. 그곳에 버려진 한숨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붉고 더러운 벽에 빼곡히 걸려 있다고! 그런데 그곳에 케일리를 던져 넣었다고? 누구지? 그런 짓을 한 것이 누구야! 그자는 분명 미친 것임이 틀림없어! 그렇다고 말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불행해질 테니까!”
“그럼 시체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둘까? 어디에 두지? 그로 인해 아르크가 오염되는 건 생각 안 하나? 왜 자꾸 우리를 몰아붙이나. 우릴 힘들게 하지 말게. 자네의 아픔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네. 자네 때문에 겁을 먹고 달려온 이곳에 있는 모두가 말이네. 이들은 겁이 나지만 아르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네. 나도 그랬고! 모두가 그렇지!”
그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는 도리어 화를 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예전 체르노빌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더욱더 감정을 격하게 만들뿐이었다. 헌터가 수습해온 시신을 아르크는 별다른 말없이 다시는 체르노빌에 가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그대로 묻어버렸었다. 그 어떤 해명이나 설명은 없었다. 바츠는 그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몸은 바닥을 뚫고 내려가 푹 가라앉는 것 같았고, 가슴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휑한 느낌으로 누군가가 심장을 도려내간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때였다. 집사 훈련 과정을 마치고 난 뒤에 일어난 일들이다. 모두가 무뚝뚝하다며 눈치를 보았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그 차가운 감정이 다시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지상의 싸늘한 추위가 그 도려내진 가슴에 채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바츠는 눈을 부릅뜬 그를 향해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아 말했다. 플랫폼의 수증기처럼 바닥에 짙게 깔리는 목소리였다.
“당신이야말로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농담이 아니야. 날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마. 내 인내심은 이미 오래 전에 처참하게 구겨졌으니까 말이야. 다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케일리가 비록 잠들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자, 말해 봐. 케일리는 어디에 있지? 내가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주고, 볼을 쓰다듬어주어야 할 내 누이는 어디에 있느냐 말이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릅뜬 눈에 더욱더 힘을 주지도, 그렇다고 다시 거두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안구가 급격히 마르며 그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고 있었다. 삼키려던 마른침이 목에 그대로 걸리는 것도 보였다. 바츠는 다시 말했다.
“대답하기 어렵다면 좀 더 쉽게 해줄까? 당신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지? 레벨6 거주자들이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거야. 대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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