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 상처 -- > * 160화 *
그는 바츠의 재촉에도 말을 하지 못했다. 타박에 가까운 채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목이 졸린 사람처럼 허옇게 질려가는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나며 달아날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의 얼굴을 눈으로 끝까지 쫓았다. 중간에 옆에서 침울하게 풀이 죽어있는 벨리타의 얼굴도 잠깐 다녀왔다. 그녀는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지만,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가 이토록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늘 자신감이 넘쳤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르크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부사령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겨우 입을 떼며 대답했다.
“케, 케일리처럼 소, 소각되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떻게 되지?”
“흔적을 추슬러서...납골당에 넣어지지...”
“깨끗하고 정리되어있는 곳일 거야 그렇지? 매일 닦고 관리해서 먼지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런 곳 말이야. 내 말이 틀린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여러 번 반복되는 움직임이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고개를 움직였다기보다는 경련이 일었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좋아. 그럼 내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하겠어. 케일리가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까지 용서해주겠다는 말이야. 용서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야. 내 배려이자 당신에 대한 존중일 뿐이지. 케일리에게 감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자, 그럼 이제 케일리의 흔적을 찾아볼까? 케일리의 흔적은 남아있을 거 아니야. 납골당에 넣어지기 직전의 그 흔적 말이야. 케일리의 그 흔적은 어디에 있지? 그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는 사당에 넣어질 케일리의 흔적 말이야.”
그는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말하는 법을 아예 잊어버린 것으로 보였다. 갓난아이가 되어버렸는지, 대답은 하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바츠를 더욱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원활하게 흘러가지 못하고 자꾸만 주체스럽게 거치적거리는 흐름이 자꾸만 신경질적으로 만들었다. 상당히 못마땅한 상황이었다. 홀연히 떠나갔던 흥분이 다시금 빠르게 밀려들더니 뜨거운 목소리로 뿜어졌다. 통로는 삽시간에 달궈지기 시작하고, 머지않아 그 위에 선 모두가 불타버릴 것만 같았다.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는 모습이 절로 상상됐다. 바츠는 그 기분을 있는 힘껏 눈빛에 눌러 담으며 말했다.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제대로 된 대답 말이야. 아르크가 나를 잃기 싫다면 반드시 그래야 할 거야. 나를 잃는다면 당신들이 두려워해야 할 시간이 고작 48시간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당신들 모두를 살해할지도 몰라. 진심이야. 내가 골칫거리가 되도록 만들지 마. 내가! 내가 당신들에게 몹쓸 짓을 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바츠는 저도 모르게 손을 카니지에 올리며 시선으로 그를 난도질했다. 그러자 뒤에 섰던 부사령관의 친위대가 황급히 검을 뽑아들었고, 그들 뒤에 있던 군인들도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총구를 들어올렸다. 그들은 헤러티커라도 마주보고 선 것처럼 경직된 모습이었다. 중간 중간 끼어 있던 관리자들은 뒷걸음질 치거나 옆으로 몸을 빼내며 숨어들었다.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것은 부사령관뿐이었다. 그는 이미 먼저 한 번 자리를 옮긴 탓인지 따로 달아나지 않았다 충분히 안전한 거리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벨리타마저도 움찔하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 것을 보면, 칭찬해줄만한 의지였다. 그런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친위대와 군인들을 제지했다. 바츠는 올려지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그 떨림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네.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겠네. 그러니 돌아가 주게. 내가 이렇게 부탁하네.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겠네.”
그가 바츠를 향해 허리를 반으로 구부렸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어딘가 모르게 뻣뻣한 움직임이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고 말을 이었다.
“대신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을 잊지 말아주게. 우린 각자의 위치가 있네. 그 질서를 지켜야 우리가 존속할 수 있지 않겠나? 우린 서로 공감대를 나눴었네. 우리의 영혼이 맞닿았었단 말이네. 자네가 그때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네. 자네의 자리는 이미 준비해 두었네. 내가 자네를 위해 준비해두었단 말이네. 자네가 와서 살 집 말이네. 모든 것이 다 준비 되어있네. 자네는 나중에 내게로 오기만 하면 되네.”
바츠는 그가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절박하게 늘어놓은 말에는 아무런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저 지겨울 뿐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이 찾아온 목적에 대한 언급이, 단 한마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가 짓이겨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펼치는 그 용기를 인정해주었다. 그는 분명 겁에 질렸음에도 불구하고, 부담감을 이겨내고 있었다. 바츠는 그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케일리는 없지. 나중에도 없을 거야. 앞으로 영원히 없겠지. 그 흔적마저도...”
“바츠,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수많은 외부 엔지니어들이 지상에서 사망하지만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경우도 극히 드무네. 그 이유를 알지 않나. 제발 돌아가 주게. 우리가 이곳에서 아무도 불행하지 않도록 해주게. 자네가 만족할 만한 결과는 반드시 찾겠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응당 그 죄 값을 치르게 될 거야. 용서가 되지는 않겠지만, 자네의 용서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네. 날 믿어주게. 내가 자네에게 믿음과 신뢰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내가 자네에게 비밀을 공유했던 것처럼 말이네.”
바츠는 그의 간절한 눈빛을 들여다보고는, 그 뒤로 죽 늘어선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살폈다. 그리고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뭔지 모르겠군. 내 누이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그 마지막마저도 비참해야했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훨씬 전부터 버려지던 엔지니어들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건가? 내가 그런 변명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분명히 말했어. 내 누이를 보게 해달라고 말이야. 내가 그 이별을 지킬 수 있도록 애원했다고. 하지만 당신들은 오늘 정말 큰 실수를 했어. 당신들 얼굴을 모두 기억하겠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할거야. 내게 고작 그런 변명으로 이해를 구하려고 한 건가? 이건 정말 큰 실수라고. 당신들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당신들이 알고 있는 불행과 시련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거야. 당신들. 그래, 당신들. 당신들이 지상에서 겪은 그 모든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끼게 될 거야.”
바츠는 부사령관의 뒤로 하얀 정복을 입고 있는 은퇴한 헌터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을 끝으로 몸을 완전히 돌려세웠다. 그들의 굳어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바츠를 부사령관이 불러 세웠다. 바츠가 걸음을 멈추자 그가 말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는 바츠를 향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말아주게. 아르크를 위한 사명을 우리가 함께 나눴었다는 사실을 말이네. 우린 분명 공감하지 않았었나? 그때 내가 자네에게서 느낀 감정들이 전부 착각이었나?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네.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주게.”
바츠는 고개만 돌려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한쪽으로 비켜선 벨리타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케일리가 불쌍하게 버려진 것이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벨리타가 목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부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타까워서 하는 행동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작은 움직임이었다.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그녀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들어 올린 손마저도 그 의미가 애매모호 했다. 앞으로 쭉 뻗지도 못하고, 번쩍 들어 올리지도 못한 어중간한 위치에서 정체불명의 의미를 보내올 뿐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허공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구석에 집어 던진 방독면을 집어 들고, 샤워장을 반대로 빠져나갔다.
플랫폼에는 10여명의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를 바라보고 반원형으로 늘어서서, 총구를 겨눈 채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지시를 전해 듣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사람의 신호에 따라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바츠는 그들을 하나하나 노려본 다음에야, 그들이 물러나며 열어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플랫폼에 가득하던 수증기는 이미 모두 사라진 뒤였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흔적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 양이 제법 많았다. 전부 바닥으로 스며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수증기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빅애스를 지날 쯤에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밖에서부터 많은 양의 물이 흘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허옇고 차갑게 내려앉아있던 눈들이 전부 녹아내렸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눈보라가 뿌연 호우로 완전히 뒤바뀌어버리며 생겨난 변화였다. 어수선하던 세상이 거뭇한 흔적을 군데군데 남긴 채, 을씨년스러워져 있었다.
바츠는 언덕을 오르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양 옆에 가파른 절벽 사이로 우중충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음산함으로 가득한 하늘이었다. 처음 비를 만났을 때의 그 벅참 감동은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픈 것은 닮아있었으나, 그 의미는 너무도 달랐다. 숨 가쁜 환희가 아닌 매스꺼운 절망이었다. 발목까지 차올랐던 눈들이 모두 사라지고, 질척거리는 땅이 자꾸만 몸을 잡아끌었다. 이곳저곳에 거뭇한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눈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하늘에게 버림받은 채, 천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바츠는 그들을 대신해서 배신감으로 인한 분노를 자신의 터질 듯한 가슴에 새겨 넣었다. 흠뻑 젖은 몸을 어디선가 불어온 찬바람이 어루만져주며 위로해주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으슬으슬 변해가는 몸에 서운함을 느낄 뿐이었다. 덕분에 전진기지에 돌아왔을 때에는 기운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당장 자리에 눕고 싶은 생각으로 간절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입구에서 정지하며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바츠는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그 앞에 서서, 아무도 없는 전진기지의 내부를 한 번 쓱 훑어보았다. 여러 집기들과 뒤엉킨 잡다한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너부러져 있었다. 특히나 바닥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갖가지 종이들이 칙칙한 방안을 더욱더 스산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메마른 어느 날의 지상처럼 황량한 허전함으로 가득했다.
바츠는 그 허전함을 깨부술 듯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테이블을 시작으로 내부의 집기들을 그 허전함을 대신해서 하나하나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발로 걷어차 넘어뜨리는 것은 예사고, 밀치고 집어 던지며 안간힘을 썼다.
“이딴 것! 이딴 것! 이딴 것! 이딴 것들은 다 뭐야! 이딴 것들이 다 뭐냐고!”
방안은 바츠의 난동으로 순식간에 소란스럽게 변했다. 벽난로 앞의 의자들은 구석으로 처박혔고, 발길질에 얻어맞은 테이블은 옆으로 나가떨어지며 다리가 부러졌다. 바닥에 너부러진 종이들이 먼지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바츠는 오히려 그보다도 더 큰소리로 악을 쓰며 방안의 처음 모습을 전혀 확인할 수 없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몸이 기진맥진해지고 나서야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바닥으로 내던지듯 몸을 쓰러뜨리며 마지막 발길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걷어차인 여러 장의 종이가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바츠는 그 모습을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켜보았다. 흔들흔들 나부끼는 모습이 지상에 남아있던 마지막 눈만큼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중 한 장이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다가 바츠의 무릎 위에 내려앉았다. 바츠는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낡은 종이였다. 거의 대부분이 날아가 읽을 수 있는 글씨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글씨는 제목으로 보이는 커다란 글씨였는데, 그마저도 중간 중간 사라져 정확한 뜻을 추측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완더 엔젤 박사, 크루엘라는 재해가 아닌 테러라고 주장...이러한 근거를 제시하며...세계적인 기업 다농...생수 사업을 독점...에비앙을 지목했다...’
바츠는 헛웃음이 터졌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딴 의미도 없는 글귀를 읽는 자신이 한심했다. 종이를 있는 힘껏 거칠게 던져버리며 자신을 책망했다. 하지만 허공으로 치솟은 종이는 그걸 비웃듯이 유유히 하늘을 날았다. 울컥하는 마음에 애써 발길질을 해보았지만 기껏해야 저쪽으로 밀려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종이는 여유롭게 저쪽에 내려앉았고, 애꿎은 자신의 몸뚱이만 바닥을 한 번 더 구를 뿐이었다.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마구 몸부림쳤다.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화를 삭여야 했다. 팔과 다리를 있는 대로 흔들고 몸을 몇 차례나 들썩거렸다. 이미 지친 몸을 또 한 번 기운을 짜내며 녹초로 만들었다. 머릿속이 열감을 앓는 것처럼 무겁고 갑갑했다. 도저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전혀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였다. 바닥에 누워 발악을 하던 바츠의 두 눈에 괴상한 물건이 들어왔다. 커다란 나팔관과 그 밑에 검은 원반.
바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 난리 속에서도 다행히 멀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축음기였다. 작동하는 데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태엽을 감자 언제나처럼 음악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질리도록 듣던 그 음악이 아니었다. 매우 낯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프리샤가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가져다놓은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떠올랐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음악은 전에 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침착하고 차분했다. 흥분이 진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바츠의 감각에 작은 발자국 소리가 감지됐다. 매우 개성이 강한 발소리였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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