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 상처 -- > * 161화 *
“괜찮은가요? 당신의 목소리가 저 앞까지 들리고 있어요.”
발소리의 주인은 장로 로리나였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비에 젖은 스카프를 벗어놓고는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도시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옷이 물기로 흥건하게 젖어있었고, 눈으로 보일만큼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꽤나 서두른 것 같았다.
바츠는 그녀가 돌아온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빗물에 젖은 모습이 애처롭게 보이기는 했지만, 탐탁지 않은 마음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다시 찾아왔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도시에 다녀온 이유를 묻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지긋지긋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걱정스런 표정에서 진심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미 뇌리에 박힌 그녀에 대한 고정관념이, 드러나는 사실마저도 왜곡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곧장 돌아오며 생겨난 민망함을, 얼토당토않은 핑계로 무마시키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전진기지 안에서의 소음이 결코 멀리까지 뻗어나갈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태연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냉대로 외면당할 것이 겁이나, 초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면 거부감이 덜 했을지도 모른다. 어설픈 변명보다는 그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애꿎은 변명은 그녀를 초라하게 만들뿐이었다. 비에 젖은 그녀의 모습이 역겹게 비쳐졌다. 완전히 힘을 잃고 주저앉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눌어붙어 있는 모습이 안쓰러움을 넘어 거북했다. 그녀가 절로 싫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과는 다르게 그녀를 향해 내뱉어지는 목소리는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꼭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애원하는 말투였다.
“그들이 날 외면하고 이곳에 버렸어요...”
“맙소사, 그들은 정말 미쳤군요. 어떻게 당신에게 그럴 수가 있나요. 누이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나요? 빅애스가 다시 개방되지 않은 거죠? 고작 이틀 동안 불편해질 것이 겁이 난다고 하던가요? 그들이 당신을 이렇게까지 홀대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군요.”
그녀가 크게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스러워했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는데, 평범하게 걷는 것조차 불편한 그녀에게는 몹시 무리한 행동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모습은 괴이해 보였고, 바츠가 저도 모르게 달아나듯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기어이 바짝 다가와 바츠를 끌어안았다. 안았다기보다는 안겼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은 표현이었다. 그녀는 바츠의 몸통을 감싸 안았을 뿐, 품안으로 뛰어든 꼴이었다.
바츠는 그녀가 안겨오자 어질할 정도로 미묘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의 겨드랑이를 파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그녀의 행동으로, 한쪽 볼이 간질거리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쿵쾅거렸을 정도였다. 비에 흠뻑 젖은 그녀의 몸이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슈트와 마찰을 일으키며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와 접촉한 부위가 불에 데인 것처럼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땀이 날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그 사이로 그녀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달궈진 체온에 그녀의 체취가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처럼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처럼 아찔했다. 철렁할 정도로 묘한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온 몸에 힘을 줘 그녀를 반대로 끌어안지 않으면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그러자 그녀가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 그녀의 숨결이 슈트를 파고들어왔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가요? 내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보여줄게요. 당신을 위해서 준비했어요. 당신이 평온을 찾을 수 있도록 진실을 보여줄게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또 다른 발자국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조금 자신감이 묻어나기는 하지만 평범한 걸음이었고, 남은 하나는 어딘가 모르게 힘겹게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앞선 걸음보다는 무게가 있었지만, 오히려 더 불안하게 들려왔다.
바츠는 발자국소리를 찾아 입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장로 역시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발자국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에는 슬그머니 옆으로 떨어지며 그쪽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그런 그녀가 그들을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셀레나였다. 그녀는 장로의 환영을 받으며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그녀의 말아 올린 갈색 머리칼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항상 뒤통수에 동그랗게 뭉쳐놓고 있어서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등을 다 덮을 만큼 풍성했다. 그리고 그 뒤를 한 사내가 따라 들어왔는데, 앞선 그녀만큼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들어올 때부터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방독면을 벗은 얼굴도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시름시름 앓던 사람 같았다. 옆에 선 그녀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총이었다. 바츠는 그 총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었는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장로가 그를 향해 말했다.
“샤오밍씨, 사실대로 말해요. 우리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말이에요.”
“집사님, 죄송합니다! 가족들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부사령관이 시킨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장로가 닦달하듯 채근하자, 그가 별안간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단단히 겁을 먹은 것임에는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총을 그대로 떨어뜨리고는 바닥에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바츠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 거죠?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셀레나가 알아냈어요.”
바츠의 의아한 목소리에 장로가 대신 대답했다. 그녀는 엎드린 샤오밍 곁에 서 있던 셀레나를 향해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셀레나가 그녀의 바통을 이어받아 입을 열었다.
“이런 대구경 총알은 흔치 않죠. 칼리에들이나 아이기스에는 없는 거예요. 구하기 매우 어렵죠. MSG - 90A1 같은 화기에나 쓸 수 있는 거예요. 아직까지 그 정도 되는 화기를 운용하는 것은 아르크 뿐이죠. 우리에게 샤오밍이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샤오밍은 당신이 아르크로 가기 전에 분명 한 발이 남아있다고 말했어요. 기억해요? 하지만 그날 이후 그에게 남은 총알은 없었어요. 당신이 멘디를 찾으러 떠나던 그날 말이에요. 그날은 프리샤가 죽은 날이기도 하죠. 멘디를 찾으러 가자는 말에, 샤오밍은 탄약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고 아쉬워했죠.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럼 그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한 발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바츠는 셀레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느닷없이 늘어놓기 시작하는 말이 너무도 갑작스럽고 장황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좁은 통로의 코너를 돌다가 누군가와 부딪힌 것도 지금만큼 당황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녀가 말을 마치며 내민 손 위에 탄피 하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엎드려 있던 샤오밍이 눈치를 살피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프리샤를 쏜 건 접니다! 제가 쐈다고요!”
바츠는 머리를 한 차례 털어내야 했다. 자꾸만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옆에서 장로가 그런 바츠의 한쪽 팔을 슬그머니 손으로 쥐며 말했다.
“바츠, 프리샤를 부른 것도 부사령관이에요. 그리고 그녀를 쏘라고 지시한 것도 부사령관이죠.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는 거예요. 셀레나, 그 탄피를 어디서 발견했죠?”
“남동쪽에 있는 언덕이요. 집사님의 지시로 그곳을 다녀온 것이 샤오밍이었죠. 기억하나요? 칼리에가 있는 것 같다는 말에, 아르크로 가기 전 샤오밍에게 그곳을 살펴달라고 했던...”
바츠는 셀레나가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자신의 혼란을 담은 외마디 외침을 반복해서 둘 사이의 대화로 끼어들었다. 둘이 더 이상 대화를 주고받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문지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케일리의 일로 이미 지친 탓에 쉽지는 않았지만, 가까스로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볼 수 있었다. 바츠는 장로의 손을 가볍게 털어내고는 셀레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샤오밍은 그 근처로 프리샤가 갈 것이라는 걸 알 수가 없었어요. 그건 그때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요.”
“집사님, 아직 이해를 못하시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장소가 그곳이 되었을 뿐이에요. 프리샤는 살해될 운명이었다고요.”
셀레나가 손에 있던 탄피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말했다. 바츠는 그녀의 손을 떠나 바닥에서 두어 번 튕겨 오른 뒤, 어디론가 바삐 굴러가는 그 탄피를 눈으로 쫓았다. 다리가 부러진 테이블 옆을 지나, 주방 쪽으로 흘러가더니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는 기척을 완전히 감췄다. 바츠는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아르크의 부당함으로 너무 피로해진 상태였다. 그저 바닥에 이마를 대고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한 샤오밍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그가 흐느끼고 있었다. 그가 우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살해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게 프리샤였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였는데, 지금은 그의 심경을 전혀 추측할 수 없었다. 침묵이 슬쩍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하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음흉함을 장로가 막아섰다.
“이런 그들이 당신의 누이는 살해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정말 사고일까요? 그들이 누이의 사인이 뭐라고 하던가요? 복잡하게 엉켜있지는 않나요? 애매모호함으로 가득하죠? 진실은 코앞인데 차마 그걸 말하기 힘들게 꾸며놨을 거예요. 증거를 찾아볼 수도 없게 뒤처리는 서둘렀을 테고요. 안 그런가요? 그게 바로 그들이 말하는 질서이자 통치거든요. 원하는 방향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게 바로 부사령관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당신에게 그런 홀대를 한 겁니다. 그는 아집에 사로잡힌 위선자일 뿐이에요. 협잡꾼이나 다름없죠.”
바츠는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고 샤오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그에게 물었다.
“대체 왜...왜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따른 겁니까?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잖아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잖아요...”
“...지난번에 들었습니다. 장로님과 집사님이 하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멘디가 집사님께 역겨운 짓을 한 날이요. 그때 전 도시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계단에 멈춰 있었습니다. 집사님과 장로님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느꼈거든요. 그 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아르크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죠. 전 바보가 아니니까요.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샤오밍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억울함을 호소하듯 대꾸했다. 얼굴을 바닥에 대고 있어서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려왔지만, 그가 발음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서 알아듣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그걸 아르크로 알렸나요? 어떻게 알렸죠? 도시에는 그럴만한 수단이 없을 텐데요? 아르크에 다녀올 수도 없었잖아요.”
“시장이 가진 수신기로 알렸습니다.”
“그건 말 그대로 수신만 되는 것 아닌가요?”
“시장이 거짓말을 한 겁니다. 그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니까요.”
바츠는 한차례 크게 숨을 들이켠 후에 다시 말했다.
“...시장도 알고 있나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말이에요.”
“...네...”
그의 마지막 대답은 울먹임으로 칠해져 완전히 뭉개진 발음이었다. 그는 기력을 다 쏟아냈는지, 더 이상 발음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내는 목소리로 뭔가를 끊임없이 횡설수설 할 뿐이었다. 대부분 용서를 구하고 변명을 하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쳐들고 외쳤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한마디만큼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눈물로 얼룩진 표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발음은 여전히 온전하지 않았다. 바츠는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최대한 그의 얼굴과 눈높이를 가깝게 했다. 그리고 말했다.
“왜...왜 그랬나요? 당신이 무슨 짓을 한지 알아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감정에 휘말릴수록 더 단호하게 굴어야 한다고. 유혹에 냉정해야 한다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말레나 앞에서 내게 자신 있게 말했잖아요! 그걸 잊은 겁니까?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저버린 거라고요! 이게 대체!...”
바츠는 그에게 들끓는 감정을 고스란히 토해냈다. 침착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도무지 참아낼 수가 없었다.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그를 윽박질렀다. 머릿속에 테라치의 얼굴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또렷해지면 또렷해질수록 감정은 격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이 다시 한 번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맙소사...샤오밍씨, 당신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른 지 압니까? 당신은 단순히 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재앙이 담긴 상자의 자물쇠를 깨뜨린 것이라고요! 당신도 그를 알잖아요. 그날 밤 함께 보았잖아요!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무자비함은 너무도 끔찍했어요. 그는 태연하게 학살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미안합니다! 시장은 아르크로 가고 싶어 하고, 전 다른 레벨로 갈 수 있길 바랐던 것뿐입니다! 부사령관이 약속했단 말입니다! 절 용서하십시오!”
바츠는 당장이라도 그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다시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보자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비록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테라치는 아이기스를 학살하러 떠났고, 이미 그의 손에는 수십 명이 살해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물론 그가 헌터인 이상 누군가의 희생은 불가피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샤오밍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무의미한 희생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다른 헌터들과 같을 때에는 최소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도 인간미가 있었다. 아니,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어쩌면 무의미한 희생이라는 것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뒤에서 지켜보던 장로가 입을 열었다.
“더 재밌는 걸 알려줄까요? 테라치의 진짜 부모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프리샤가 그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죠? 그가 어떻게 이곳에서 자랐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무슨 말이죠?”
바츠는 자리에서 고개만 돌려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쪽으로 아주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부모를 살해한 것이 프리샤 그녀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를 아르크로 데려온 것이 프리샤 본인이라고요. 그녀는 그의 부모를 살해하고, 아직 어린 당시의 그를 데리고 왔어요. 그녀에게 남아있던 모성애가 발휘된 걸 거예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녀는 차마 그 아이까지 살해하지는 못했죠. 그녀가 왜 그의 부모를 살해했냐고요? 그에게 강한 힘이 있다는 걸 아르크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무슨 말이냐고요? 그녀는 사실 그를 살해하기 위해 간 거라는 말이에요.”
“무슨 말입니까? 그를 살해하러 가다니요?”
바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테라치 그와 가족들이 사실은 아이기스의 주민들이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정확히는 그곳에서 달아난 사람들이죠. 변절자들이란 말이에요.”
바츠는 묻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한가득 밀려들었지만 이상하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머뭇거리기만 했다. 어떤 것을 먼저 물어야 할지 너무도 복잡했다. 하지만 그녀가 용케 그 심정을 알아채고는 차분하게 하나씩 하나씩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왜 그곳을 떠나온 지 궁금하겠죠? 그의 부모가 그가 자라서 괴물이 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녀는 때마침 아르크의 지령을 받고 그곳으로 향하던 길이었고요. 그녀는 동쪽 전진기지 소속도 아닌데 왜 그곳으로 갔을까요? 그녀가 요인암살에는 매우 탁월했기 때문이에요. 스타드보다도 훨씬 났죠. 그녀의 감각은 헤러티커의 청각만큼 대단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놀랐어요. 그녀가 살해되었을 때 말이에요. 믿을 수 없었죠.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테라치를 정말로 사랑했으니까요. 그를 친자식처럼 키웠죠.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거든요. 그녀는 임신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부사령관과 약속을 했어요. 아이를 헌터로 육성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신이 아르크에 머물겠다고 말이죠. 그녀는 떠나려고 했어요. 그 아이를 데리고 아르크를 떠나려고 했다고요. 그녀의 남편과 그녀가 소원해진 이유이기도 해요. 그 문제로 둘은 크게 다퉜죠. 다행히 부사령관이 그 제안을 받아드려서 일단락되었을 뿐이었어요. 그녀는 아르크에게 매우 귀한 재원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그의 남편 역시 그 아이를 사랑했죠. 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이를 갖고 싶어 했거든요. 그럼 이제 테라치의 진짜 부모가 왜 변절자가 되었는지 말해야겠죠? 왜 그가 자라서 괴물이 되길 바라지 않았는지 말이에요. 그가 자라면 왜 괴물이 될 거라고 확신한 걸까요? 그 답은 간단해요. 그는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이거든요. 부모의 DNA를 가지고 만들어진 시험관 아이에요. 아이기스는 오래 전부터 헌터에게 대항하기 위한 무기를 원했죠. 그렇게 탄생한 게 테라치라는 말이에요. 수천 번의 실패 끝에 태어났죠. 그 뒤로 지금까지 실패의 연속이고요. 아이기스는 차라리 다른 무기를 만드는 것 편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죠. 헌터보다 뛰어난 무기가 아닌, 헌터와 맞설 수 있는 정도의 무기. 그게 훨씬 저렴하고 간편했으니까요.”
장로가 말을 마치며 셀레나를 한 차례 바라보았다. 바츠는 그녀의 시선을 쫓지 않고,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건 그녀의 얼굴만 주목했다. 그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머릿속은 텅 빈 것처럼 하얗게 질렸고, 혀는 밤새도록 밖에 내놓았던 것처럼 단단히 얼어붙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귀를 통해서, 방안에 울려 퍼지고 있는 음악만 들을 수 있었다. 차분한 고요가 흐르고 있었다.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절 처벌하실 겁니까? 아르크에서 추방할 겁니까?”
샤오밍의 목이 멘 소리가 그 차분한 고요를 뚫고 들어왔다. 애절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올려다보는 눈물로 범벅 된 그의 얼굴이 가엽게 느껴졌다. 바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았다.
“내가 전에 한 말 잊었나요? 당신은 내 사람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건 내가 약속하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이 내가 알던 이전의 샤오밍씨로 돌아왔을 때 이야기입니다. 난 당신이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어요.”
바츠는 그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정말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를 어떻게 나무랄 수 있을까? 정작 본인도 케일리와 함께 레벨6으로 가기 위해서 부사령관의 뜻을 공감하지 않았던가? 케일리가 지금 무사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바츠는 자신의 대답을 듣고 통곡을 하기 시작하는 그를 뒤로하고 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그 혼란을 허락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그 혼란, 내가 앞장서겠습니다.”
바츠가 말을 마치자 방안에 남은 건 축음기의 음악뿐이었다.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 작품 후기 ============================
분량 자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하얀 감염 이야기 자체의 중반부를 지나는 화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제가 저녁 시간 때, 특히 11시 넘어서 12시 이전에 글을 올리면 그날은 늦게 보셔도 좋아요...그건 제가 부랴부랴 쓴 거라서 평소보다 훨씬 엉망인 상태를 그냥 올리고 보는 거거든요...그런 화는 꼭 한 번 다시 수정을 해서 기존에 먼저 보시면 내용이 없거나 달라질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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