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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62화 (162/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62화 *

음악은 한 동안 홀로 춤을 추웠다. 4살 된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쉴 틈 없이 이곳저곳을 마음껏 누볐다. 방안 가득 족적을 남기는 것은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를 제지하거나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화음처럼 샤오밍의 울음소리가 함께 흐를 뿐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의 그 대답. 난 당신을 믿고 있었거든요.”

그 흐름을 깬 것은 장로였다. 그녀는 바츠의 시선을 우두커니 마주보고 있다가, 음악이 그 사이를 지날 때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환한 미소를 지은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종종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고는 했지만, 이번처럼 활짝 웃었던 적은 없었다. 그녀의 얼굴 전체가 부푼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반색하고 있었다.

“착각하지 말아요. 그렇다고 당신을 믿는다는 소리는 아니니까요.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믿음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아직 내게 제대로 된 믿음을 준 적이 없어요.”

바츠는 그녀 얼굴에 차가운 목소리로 헤살을 놓았다. 그녀의 기쁨에 젖어드는 표정이 괜히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즐거운 표정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한쪽 손을 잡을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그럼 말해 봐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죠? 내게 원하는 게 있잖아요. 그걸 내게 말해 봐요.”

“우리를 필멸자라고 부르는 자. 그 닥터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줘요. 당신이 말했죠?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거라고. 그를 만나볼 겁니다.”

바츠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신 있게 요구하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에 의해서 정해진 것 같아보였지만, 그녀의 기대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현명하군요. 좋아요. 하지만 난 믿어요. 우리의 혼란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을 거라고요. 고작 그것만으로는 아르크에서도 나를 해칠 명분이 부족하죠. 중요한 것은 그 후가 되겠지요. 아르크에게 당신은 여전히 귀중한 재원이니까요. 그들은 헌터들이 집사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죠. 진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거예요. 그렇죠? 당신은 그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죠. 강력한 힘은 진실이라는 갑옷을 둘렀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지거든요. 내가 당신에게 그 갑옷을 두를 수 있도록 해주겠어요. 대신 이것 하나는 명심해요. 당신이 그곳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당신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말이에요. 당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우리가 마주보고 설 수 있다면, 우리 주위에는 가시덩굴이 가득 자라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난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해요. 난 이미 그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당신과 그 가시덩굴을 다 잘라낼 자신이 있죠. 물론 아르크와 부사령관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녀가 흐뭇한 미소로 대답해왔다. 확신에 찬 사람답게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통해, 그녀가 불안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지만, 그 안에는 간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오히려 목소리에 실린 힘마저도 애써 쥐어짜내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긴장감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흔적이 있었다. 마주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과 약간의 흥분이 그 증거였다. 그녀는 가슴이 벅차오른 사람처럼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기쁨에 젖어들어 부푼 것이 아니었다. 바츠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각오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바츠는 자신의 의지를 확인시켜줄 수 없었다. 미처 대답을 내놓기 전에, 밖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매우 숙련된 자의 발걸음이었다. 자칫 놓칠 뻔 했을 만큼 노련했다.

바츠는 서둘러 몸을 돌려세우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문 앞에 섰던 셀레나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츠의 모습을 통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문 앞에서 황급히 물러났다. 그때까지도 그 옆에서 울고 있던 샤오밍의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총구를 입구를 향해 겨누었다. 바츠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녀처럼 긴장하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기 어려울 만큼 은밀한 기척을 내는 존재는 세상에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이곳을 찾아드는 기척은 더더욱 없었다.

“뭐야, 이 어색한 분위기는?”

기척의 주인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선뜻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그 앞에 서며, 불쾌함이 서린 의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는데, 깨진 접시 조각의 단면처럼 까끌거리는 여자의 음성이었다. 정면으로 겨눠지고 있는 셀레나의 총구 때문이었다. 당황하거나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긴장한 쪽은 셀레나 쪽이었다. 그녀는 검은 슈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자신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총구를 내리지도 다른 곳으로 치우지도 못하며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바츠는 그 둘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셀레나의 총기에 손을 올려 총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자 문 앞에 섰던 그녀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바츠에게는 매우 익숙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바츠는 그녀가 방독면을 벗기도 전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했다.

“아델리나. 케일리가...죽었어...”

“뭐라고?”

그녀는 자신의 방독면을 황급히 벗어 던지고는 물었다. 바닥으로 내던져진 방독면처럼 그녀의 가슴도 철렁한 모양이었다. 바츠의 목소리에 다시 슬픔이 차오른 것이 한몫 거들었다. 그녀의 갈색 눈이 동그랗게 변해있었다.

“맙소사, 대체...대체 어떻게...왜? 대체 왜?”

그녀가 크게 혼란스러운 얼굴로 웅얼거리고는 바츠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와락 안으며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슈트에 덧칠해진 지상의 냉기가 냉큼 끼어들며 가슴을 대신 파고들었다.

“모르겠어...뭐가 뭔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케일리는 아르크에게 살해당했고, 죽음까지도 아무런 배려를 받을 수 없었다는 거야. 아르크가 케일리를 처참하게 내버렸다고!”

바츠는 가슴을 파고드는 냉기를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 품안에 안긴 아델리나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이어서 아르크로 달려갔던 이야기까지 더해서 늘어놓자, 그녀의 머리 위로는 칼바람이 지날 정도였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어떻게 그런 짓을...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있지? 그것도 네 누이에게 말이야!”

바츠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자신의 표정이 초라하게 변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감추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볼을 어루만져주기 시작하는 그녀의 손길이 너무 좋았다. 그녀에게 말했다.

“그들이 후회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야. 케일리를 비참하게 내던진 그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해주겠어.”

“그래, 그러자. 우리 그렇게 하자.”

아델리나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도 함께 해주려는 거야?”

“물론이지. 아르크는 그녀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해. 그녀는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는 죽음을 정중하게 맞을 수 있었어야만 해.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나에게 친언니 같았지. 그리고 항상 상냥하게 대해줬어. 난 케일리를 잘 알아.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너도 그녀를 위해서 뭐든 하려고 하는 거잖아?”

바츠는 목소리에 힘을 줘 대답하는 그녀를 있는 힘껏 다시 끌어안았다.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의 얼굴에 마구 키스를 퍼붓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기뻤다. 조금 전 장로의 불안한 의지를 느꼈을 때, 약간 두려움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짐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던 것이다. 그녀가 어떤 것을 짊어지고 있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결코 단순한 모험이 아니었다. 아델리나의 발자국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머뭇거리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아델리나가 함께 해주겠다는 말 한마디가 그 망설임에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녀가 품안에서 속삭였다.

“내가 함께 해줄 거야. 네가 뭘 하든 끝까지 같이 해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바츠는 그녀의 양 어깨를 살며시 밀어 떨어뜨리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일인 것처럼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또렷한 두 눈으로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바츠의 눈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이렇게 예쁜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항상 평범했고, 자격지심 때문인지 벨리타를 흉내 내기 위해 애를 써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그 누구도 흉내 낼 필요가 없는 여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프리샤보다도 훨씬 예쁘다고 생각됐다. 그런 그녀의 아름다움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보 같았다. 그녀의 한쪽 뺨이 절로 감싸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츠가 아델리나의 미색에 정신을 팔린 사이,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무도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을 만큼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뭐야, 이건?”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의 이목이 입구로 집중되었다. 셀레나 옆에 주저앉아 있던 샤오밍도, 바츠의 품안에 있던 아델리나도 모두가 그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검은 슈트 위에 내려앉은 물기를 손으로 닦아내듯 쓸어내리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정확히는 그녀였다. 슈트 상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돌출될 만큼 커다란 가슴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셀레나였다. 셀레나는 아직 방독면을 벗지 않은 그녀에게 물었다. 아델리나에게 했던 것처럼 총구를 겨누지는 않았다.

“레나타, 당신인가요?”

그녀는 셀레나의 물음에는 관심도 없는지 그녀를 간단하게 외면해버리고는, 방독면을 벗으며 아델리나를 안고 있는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상황이야, 이 바보 같은 분위기는?”

그녀는 조금 퉁명스러워 있었다. 궂은 날씨로 옷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인지, 전진기지 내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굳어진 얼굴로 바츠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바츠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대답했다.

“스톡홀름 시티로 갈 거야.”

“나도 같이 가줄까?”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선뜻 물어왔다.

“...이유부터 물어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니야?”

바츠는 너무도 태연한 그녀의 태도에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따르려고 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아델리나조차도 비록 간단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했는데, 그녀는 그런 것이 전혀 필요해보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아르크를 향해 칼을 뽑아들자고 해도 군말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카니지 위로 슬그머니 손을 올려야 했다.

그녀는 대답하기 전에,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뭔가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두 눈이 번뜩였다. 보통 때에 실없이 가벼워 보이는 모습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진짜 그녀임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차갑다 못해 매우 날카로웠다. 아델리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긴장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두 눈으로 사람들을 휘젓고 있었다. 방안의 공기가 마구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조용히 울려 퍼지는 축음기의 노래를 타고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누군가 끔찍한 사고를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숨 막히는 상황이었는데, 불현 듯 터져 나오는 그녀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다. 그녀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혼자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근처 벽을 손으로 집었기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바츠는 조심스럽게 바로 옆에 선 아델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레나타를 한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레나타의 괴팍한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약간은 시큰둥한 얼굴로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남은 사람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샤오밍은 레나타의 행동에 넋을 잃었고, 셀레나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셀레나는 오래 전부터 그녀를 알고 지냈던 것 같은데도 전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장로는 침착한 편이었다. 미친 듯이 웃고 있는 그녀를 주시하며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앞에 바츠와 아델리나가 서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나타는 바츠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옮겨질 때 비로소 끝없이 이어지던 웃음을 거짓말처럼 뚝 멈추며 말했다.

“언제는 우리가 이유를 가지고 움직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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