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64화 *
바츠는 마지막에 나쁜 것이라고 하려던 말을 차마 꺼내놓지 못하고 도로 삼켜버렸다. 그녀가 레나타와 똑같은 행동을 하려했던 것이 정말 나쁜 것이었다고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히려 그건 굉장히 좋았던 경험이었다. 행복하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쾌락만큼은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신체의 특정 부위를 언제든지 뜨겁게 달굴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당시와 비슷한 충동을 느끼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알 수 없는 거부감에 빠져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가 떠오르면 반응하는 몸과는 다르게, 정체 모를 심리적 압박과 공허함이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기억만 잘라내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너무 당황했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경험에 크게 놀랐었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심란함으로 뒤숭숭해서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델리나의 대답은 없었다. 바츠의 목소리가 불분명했던 탓인지 선선히 입을 열지 않았다. 겁에 질린 사람처럼 위축되어 보였다. 부담감이나 민망함을 느끼면 되레 큰소리를 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그녀였다. 자신 없어 하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지금은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마주보고 있던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달아나기 바빴다. 가끔씩 돌아와 슬쩍 눈치를 보고는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내빼길 반복했다. 그녀가 망설이고 있었다.
바츠는 한쪽 손을 빼내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후드를 따로 치우지 않고, 그 위를 추척하듯 쓰다듬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것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둘러 뿌리치지 않았고, 갈팡질팡 헤매던 시선도 정적으로 변해갔다. 어느새 다시 그녀와 마주볼 수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전진기지의 집사가 그랬어. 좋은 걸 알려주겠다고...옷을 벗으라고 했어...그런데 이상하게 꼼짝을 할 수 없었어. 그 늙은이가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데, 몸이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 거야. 꼭 미사에서 보았던 그 미친 늙은이 같은 냄새가 났거든. 넌 모르지? 미사에는 정신 나간 노인네가 하나 있어. 단순히 험하게 부르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는 정말 미치광이야. 사람을 괴롭히는 걸 매우 즐거워했으니까 말이야. 헌터들이 마지막 과정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하는 수가 많다는 것 들어본 적 있어? 난 이유를 알아. 다 그 늙은이 탓이야. 버니의 볼을 아무렇지도 않게 칼로 난도질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분명 지상에 있을 때, 인육도 먹어봤을 거야. 재수 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고...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어.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제발 그만해달라고 말하는 거였지. 웃기지? 내가 그에게 빈 거라고. 미사의 그 늙은이한테도 하지 않았던 짓을 그에게 한 거야. 그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었는데 말이야. 그랬더니 그가 뭐라고 한지 알아? 그럼 더 알아야 한다고 말했어. 그 사람이 반드시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더라? 그런 거 있지? 어른들이 뭔가를 알려주면 아이들은 처음이라서 의심하고 낯설어 하잖아. 그런데 옆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일러주는 그런 거 말이야. 꼭 그랬어. 왜인 줄 알아? 그 말을 믿었거든. 그 아이가 된 것처럼 철썩 같이 믿었어. 내가 그 말을 믿었다고.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믿었단 말이야...그가 말했어. 나를 울게 만들 거라고. 가슴이 철렁하더라.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어. 미사의 그 미친 노인네 때문에 정말 많이 울었었거든. 전진기지의 집사는 그와 너무 닮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어. 하지만 난 울지 않았어. 그 사람을 만나면 보상받을 수 있을 테니까...그렇게 생각했어.”
그녀는 말을 하기 시작하자, 밖에 내리는 폭우처럼 쉴 틈 없이 쏟아냈다. 혼자서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가도 금세 다시 낮추고, 한껏 격한 감정을 내보이는 듯 싶다가도 급격히 차분해지며 흐름을 마음대로 가져갔다. 마치 축음기의 음악처럼 리듬을 타는 것 같았다. 바츠가 중간에 간단한 호응조차 할 틈이 없는 꽉 찬 음악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그런 리듬이 어렵다고만 느껴졌다. 미사 훈련소의 교관을 말하는 것인지, 그녀가 속한 전진기지의 집사를 말하는 것인지 그 대상이 오락가락하는 기분이었다. 분명한 건 딱 하나였다. 그 누가 되었든지 그녀에게는 끔찍한 기억들이라는 것이었다. 말을 마친 그녀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그 위로 눈물도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눈물을 어떻게든 다시 안으로 구겨 넣기 위해서 평소보다 더 많이 눈을 깜빡였다. 손으로 훔칠 수 없어 생각해낸,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 와중에도 되레 짜내질 까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츠는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는 보여 줬어?”
“응.”
“어떻게 됐어? 좋아했어?”
아델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간이 정지라도 했는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바쁘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완전히 멈춰 섰다. 덕분에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녀는 그 안에서 질식해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녀의 눈물은 고작 눈꺼풀만으로 막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그녀가 분한 듯 답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날 세게 밀쳐냈어...너무 아프더라...그 늙은이가 내 몸을 거칠게 만지는 것보다 훨씬 아팠어. 그냥 엉덩방아만 찐 것인데 너무 아팠어. 하지만 엉덩방아를 찧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나를 아프게 한 건, 그가 괴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쳐다보던 눈빛이었거든. 난 그가 나를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 내가 아는 그는 절대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거든. 항상 상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워했던 적은 없었어.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니었어. 날 폐기물 처리장의 그 역한 냄새처럼 바라보더라고. 난 그냥...난 그냥...”
그녀는 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다. 벅찬 가슴을 이기지 못하고, 울먹이며 마지막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숨이 찬 모습이었다. 그대로 두면 머지않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서둘러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깨진 그릇에 담긴 물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니야, 네가 괴물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야. 그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어. 네 잘못이 아니야.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바츠는 그녀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 진심으로 속삭였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대로 그녀의 머릿속을 관통하길 바랐다. 그러자 그녀가 가슴에 대고 응답해왔다. 얼굴이 감싸졌기 때문인지 너무 작고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알아...세상에는 괴물이 너무 많기 때문일 거야...”
그녀의 대답에 바츠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비바람이 헤집고 들어와 심장에 얼음알갱이를 박아 넣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모닥불의 온기로도 막아낼 수 없는 뾰족하고 단단한 것들이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고 있었다.
“맞아...세상에는 괴물이 너무 많아...”
바츠는 그 고통을 애써 속으로 삭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품 안에 파묻힌 그녀는 너무도 작았다. 어깨는 고작해야 한손에 쏙 들어올 정도였고, 목은 손목처럼 몹시 가늘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상을 누비고 다녔는지 놀라울 다름이었다. 미사 훈련소를 졸업한 것만으로도 용한 일이었다. 그녀는 유리처럼 너무도 연약했다. 그러자 그녀가 바츠에게 두른 팔을 덩달아 세게 조였다. 자신을 끌어안는 바츠의 힘을 이기려는 것처럼 있는 힘껏붙들었다. 꼭 달아나지 못하도록 속박하는 것만 같았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그때 이후로 네게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몰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델리나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흥분한 사람이 씩씩대는 것처럼 몸 전체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가끔 그 진동이 잦아들고는 했지만, 곧바로 다시 이어지며 전보다 훨씬 더 격렬한 몸부림으로 일고는 했다. 그녀는 그 모습이 부끄러운지, 그럴 때마다 품 안으로 계속해서 파고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이상 안길 공간이 없는데도 끊임없이 비비적거렸다.
바츠는 그런 그녀가 지쳐 잠들 때까지 끌어안은 팔을 절대 풀지 않았다. 쓸쓸함이 홀로 남겨진 건물 안으로 바람을 타고 날아와, 거슬리는 목소리로 괜한 트집을 잡아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면 그만이었다. 그의 퉁명스런 목소리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잠든 그녀가 혹시라도 불편하지 않을까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덕분에 다음날 잠에서 깬 그녀는 몹시 편안해 보였다. 부스스한 눈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 때문인지 다시 옮기기 시작한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완전히 그친 비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왠지 모를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아델리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전날보다 훨씬 즐거워 보였다. 이따금씩 어깨로 툭툭 밀쳐오며 장난을 치기까지 했다. 어릴 적 함께 어울릴 때를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가끔은 저쪽으로 보이는 오래된 건물이나 멀리 보이는 알 수 없는 건축물들을 가리키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확실히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적어도 이틀 뒤까지는 그랬다.
“바츠, 우리 가는 방향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 너 괜찮은 거야?”
아델리나가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그녀는 이미 전부터 조금 수상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내심 모른척하다가 이제야 속마음을 꺼내놓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내 따라가던 도로가 지금은 이제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심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바츠는 정말로 방향을 이탈해 다른 곳을 향해가고 있었다. 중간에 목적지를 변경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지금 우리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 맞지? 많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은 원래 우리가 가려던 길에서 꽤나 벗어나 있다고.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계속되니까 너무 이상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바츠는 대답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이미 작정하고 물어온 이상 피할 길은 없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결국에는 그녀도 알게 될 일이었다.
“우리가 누구야? 우리 헌터잖아.”
“그런데? 그게 지금 상황과 상관이 있는 거야?”
바츠는 그녀의 물음에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상관이 있지. 헌터는 사냥을 하니까. 그리고 그 중에는 괴물도 포함되지. 우린 지금 괴물을 사냥하러 가는 거야.”
아델리나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입을 닫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막연한 대답에 의문을 해결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뒤늦게 재차 물어오며 답을 확실히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 이상은 답해주지 않았다. 대답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여긴 오브러시잖아. 내가 속한 전진기지의 도시.”
바츠는 그녀를 데리고 도시를 지났다. 도시에는 볼 일이 없었다. 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좀 더 북쪽에 위치한 전진기지로 향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손목을 잡아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굳어진 얼굴로 서 있는 그녀를 도리어 잡아끌어 안으로 향했다. 이미 비가 그치던 그날 밤, 잠든 그녀와 주변에 몰려든 쓸쓸함을 밤새 지켜보며 결심한 일이었다. 망설이거나 되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익숙하다 못해 거의 일치할 정도로 닮아있는 샤워장과 통로를 지나 내부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안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낡은 목소리 하나가 반겨주었다.
“낯선 냄새는 정말 오랜 만이군. 새로움은 항상 기분을 즐겁게 만들지. 그런데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나의 작은 고양이는 몰라도 자네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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