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65화 (165/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65화 *

바츠는 문 앞에 서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보았다. 그는 막 안쪽 가장 어두운 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푸석한 하얀 머리칼조차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었다.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모두 구겨진 종이처럼 주름으로 가득했고, 걸음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장로 로리나처럼 어디가 고장 난 건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에 목소리와 함께 낡았기 때문이었다. 검은 슈트 역시도 얼룩덜룩 색이 바랜 모습으로 그 사실을 대변했다. 허리춤에 검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고 불안한 걸음으로 근처 테이블 앞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앉는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긴 여행이라도 하고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쳤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하지만 그 호흡을 고른 뒤 시선을 옮겨 바츠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강렬했다. 낡은 몸뚱이를 따라 밑으로 쳐진 눈매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는 힘이 실린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아, 이제 알겠군. 작은 고양이가 함께 온 이유를 알 것 같아. 자네가 그 사람이로군, 그렇지? 그게 헌터였어.”

그가 힘없이 들어 올린 손으로 바츠를 가리켰다. 바츠는 고정되지 못하고 위아래로 흔들거리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난 헌터가 아니야. 일리트시의 집사지.”

“일리트시의 집사? 아르크 동쪽 전진기지의 주인?”

그가 비음이 약간 섞인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꽤 놀라운 모양이었다. 의심스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바츠를 꼼꼼히 살폈다. 그의 눈이 생각으로 복잡해지고 있었다.

“내게 무슨 볼 일이 있나? 자리를 비우고 올 정도로 중요한 모양이군. 집사라면 이렇게까지 멀리 떠나올 리가 없지.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지만 말이야.”

“아델리나에게 무슨 짓을 했지?”

바츠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그 이야기인가? 흥미롭군. 난 그저 가르친 것뿐이라고. 아르크는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나? 미욱스러울 정도로 답답하지. 자신의 욕구도 표현할 줄 모르지 않나. 제대로 된 욕도 할 줄 모르지. 물론 정말 바보 같다는 소리는 아니네. 아르크의 주민들은 다들 영리하지. 아주 오랫동안 교육을 받으니까 말이야. 그런데도 어리숙하게 구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나. 지상을 돌아다녀 봤으니 알 것 아닌가.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만지는 지 말이네. 결혼 전까지 성적인 접촉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나? 아르크는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너무 보수적이지. 야인들이 노골적이다 못해 추잡한 성문화를 가진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네. 미사 졸업생들의 나이가 대부분 20살 이전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나? 거의 전부가 그렇지. 모두라고 해도 되겠군.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네. 미묘한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을 때 말이네. 특히 누군가의 알몸을 보았을 때 말이지. 아마 아르크에서는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네. 수치심은 모두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거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느끼지 못하면 그만이라는 말이네.”

바츠는 그가 대답을 늘어놓는 동안 바로 근처까지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앞에서 카니지를 뽑아들었다.

“바츠!”

뒤에서 아델리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에 질린 사람처럼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황급히 뒤따라오는 발자국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다르게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까지 그리며 조금도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지그시 바라보며 태연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지상으로 내보내지는 헌터들 대부분은 그렇게 나오네. 성에 대해 무지한 채로 말이네. 미처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내보내지지. 물론 깨달아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네. 자네도 알지 않나. 헌터나 집사의 훈련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말이야. 그 훈련의 주된 목표는 인간성의 상실이지. 헌터들이 하나씩 병을 가진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네.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지게 되지. 시류라는 건 참 무서운 거야. 분위기는 사람을 구속하지. 난 그걸 가르친 것뿐이네.”

“내게 그런 소리 할 것 없어. 다 쓸데없는 소리니까. 괜한 시간 낭비일 뿐이야.”

“하긴 그렇겠군. 이미 내가 말한 걸 모두 느꼈을 테지. 어디서 왔다고? 일리트시? 아직 젊군. 여긴 감감 무소식이네. 올해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르의 방에서 자살을 했다고 하더군. 아마 다음 집사가 오려면 한참 남았겠지. 그 전에 내가 죽을지도 모르네. 놀라운 일은 아니지.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도 집사가 죽기 직전이었거든. 그는 ‘지야라’를 떠나지도 못했네. 걷는 것은 둘째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으니까. 지금의 내 모습보다도 더 좋지 않았지. 하지만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었는데도 눈빛만큼은 그대로였지. 세상을 꿰뚫는 눈빛.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눈이었네. 지금의 나도 그런가? 그는 내게 아르크의 눈을 건네주자마자 다음날 숨을 거뒀네. 죽기 직전에 내게 바지를 내리고 자신 앞에 서라고 했지. 그리고는 오직 이 한마디만 반복해서 말하더군. 이곳의 신이 되어 헌터들을 돌봐라. 그게 그가 남긴 유일한 말이었네.”

“그래서 당신이 돌본 것뿐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바츠는 그의 바로 옆에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몸을 뒤로 깊숙이 기대며 눈을 감고는 말했다.

“난 그냥 알려준 것뿐이었네.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고 말이지.”

“구차하군. 이제라도 목숨을 구걸할 셈인가?”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에 있나? 가당키나 하나? 우리에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네.”

“그럼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거지?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잖아. 당신은 그에 맞춰 대응하면 되는 거라고.”

그가 즐거운지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흥이 났다기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운 헛웃음이었다. 짧게 짧게 내뱉는 웃음에 조롱이 섞여있었다. 바츠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 대상이 불분명했다. 그 사이 아델리나가 다가와 바츠의 팔을 붙들었다.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런 그녀의 손을 차갑게 떼어내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눈을 뜨며 말했다.

“난 아직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이전에 집사가 내게 한 말 말이네. 대체 신이 뭔가? 혹시 자네는 알고 있나? 내가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한 번은 팔이 잘린 헌터가 밤늦게 찾아오더군. 그리고 내게 살려달라고 말했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데 말이야. 나는 그의 상처에 지혈제를 퍼붓고는 곁에 머물러주었지. 그가 죽기만을 기다렸네. 출혈이 너무 심해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았지. 이미 온몸이 차가워진 상태였네. 그는 죽기 직전에 나를 찾아왔던 것이었지. 그들에게 이곳은 집이니까 말이야.”

바츠는 말을 잇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전진기지에 머물면서 숱하게 봐왔던 모습이었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헌터들은 이곳에 돌아와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떠나네. 지상을 떠돌며 가져온 긴장감을 모두 여기에 내려놓고 가는 것이지. 그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곳을 떠나네. 그런 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지기는 할 테지. 최소한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테니 말이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르지. 우린 그들을 이해할 수 없네. 심지어 나조차도...그 누가 그들을 이해를 할 수 있겠나?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걱정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럼 나는 대체 누가 이해해주려고 하는 가 였네. 우린 상처 입은 수많은 영혼을 달래지. 그래서 우리를 신부(father)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신부가 뭔지 아나? 아주 오래 전에 신을 모셨던 사람들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우린 신이 되길 강요받고 있네. 신이 대체 뭔가? 세상의 구원자? 위대한 위로자? 그 무엇이든 난 장담할 수 있네. 우린 절대 신이 아니라고 말이네. 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려고 발악하는 것뿐이지.”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하지 않는 군.”

바츠의 냉담한 태도에 그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조급해 하는 걸 보니 바쁜 모양이로군. 내게 책임을 묻고 싶은가? 사실 이곳에 오려던 것은 아니었지? 괜찮네. 이해하네. 나와 같은 존재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반가웠네. 내게 마지막 선물이로군. 지금까지 헌터들이 가져온 선물 중에 가장 설레는 것이었네.”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매우 평안한 얼굴이었다. 마치 오랜만에 찾아든 단잠에 흠뻑 취한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자, 어서 내게 가져온 선물을 건네주게나.”

바츠는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가슴팍을 향해 카니지를 찔러 넣었다. 칼날은 그의 갈비뼈를 부수고 깊숙이 파고들었고, 뒤에서는 아델리나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서둘러 바츠의 앞으로 달려와서는, 바츠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이 황망함으로 가득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안절부절 할 뿐이었다. 오히려 가슴에 칼을 맞은 그가 더 침착해보일 정도였다. 그는 급속도로 굳어가는 얼굴로, 차분하게 녹아내리는 눈처럼 숨을 거둬가고 있었다.

바츠는 자신을 놀랜 눈으로 바라보는 아델리나를 애써 외면하고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내기 시작하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당신은 분명 신이 아니야. 신은 늦거나 모를지언정 결코 배신하지는 않아야 하거든. 해코지를 하지는 않는단 말이야. 당신은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권리로 횡포를 부린, 또 다른 악의에 불과할 뿐이야. 그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지.”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몸을 부르르 떨 뿐이었다. 바츠는 그것을 대답으로 생각하고 카니지를 있는 힘껏 뒤로 잡아 뺐다. 그러자 그는 이미 숨을 거두었는지, 힘없이 딸려 나오며 테이블에 얼굴부터 쓰러졌고, 테이블과 바닥은 삽시간에 붉은 혈흔으로 물들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의 뒷덜미에 다시 검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 경직되어있는 아델리나를 보자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아델리나.”

바츠는 카니지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녀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전에 그녀의 한쪽 가슴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한 차례 움찔했지만 멀리 달아나지는 않았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바츠? 설마...싫어!”

그녀가 반응을 한 것은 바로 다음이었다. 바츠의 손을 쳐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른 팔을 가슴에 두르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바츠는 그녀를 쫓지 않았다. 방독면을 저쪽으로 벗어던지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싫은 게 아니야...여기서는 싫어...”

바츠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체액을 양껏 쏟아낸 그는 벌써부터 싸늘한 기운을 풍겨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숨을 거둔 것처럼 고요했다.

“그래서 더 원해.”

바츠가 아델리나를 쫓은 건 그때였다. 시선을 옮겨 그녀를 바라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가슴에 두른 그녀의 팔을 낚아채 옆으로 치워냈다. 그녀는 숨진 그처럼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한결 차분해진 시선으로 물었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차가운 시선이었다.

“왜?...왜? 지난번에는 날 미워했었잖아...”

“그렇지 않아.”

바츠는 그녀를 품안으로 잡아당기고는 남은 손으로 그녀의 벨트를 풀었다. 그녀의 방독면을 벗기고, 그녀의 망토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으며, 그녀는 그 위로 넘어뜨렸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저항은 없었다. 바츠의 손길에 따라 착한 아이처럼 군소리 없이 따랐다. 바츠는 그녀의 옷가지를 전부 벗기고는, 그녀를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엎드리게 한 후 뒤에서 안았다. 테이블 위에 쓰러진 그가 잘 보이도록 자리도 바꿨다. 그녀가 말했다.

“바츠, 난 네가 날 찾을 줄 알았어.”

“미안, 아르크를 처음 벗어났을 때에는 너무 경황이 없었어. 모든 것이 낯설고 어두웠거든.”

“아니, 그때 말고. 이번에 아르크에 다녀왔을 때 말이야. 일부로 난 네가 볼 수 있도록 주변을 맴돌았는데...넌 몰랐던 거야?”

바츠는 거칠어진 호흡으로 묻는 그녀의 말을 차분하게 곱씹었다.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당시 그녀가 충분히 더 멀어질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게 그런 의미인지 몰랐어...난 그저...”

“괜찮아...이제는 괜찮아...”

그녀가 바츠의 대답을 다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말했다. 빨라진 호흡만큼 다급하게 느껴졌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레나타와의 경험을 그녀에게로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리고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바닥에 쓰러졌고, 그대로 하루를 머물고 난 다음날 전진기지를 떠났다. 그 사이 함께 요리도 하고, 추억을 떠올려 옛 놀이들도 함께 했다. 물론 그의 시신은 그때까지도 처음 그 자리 그 상태로 방치해 두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