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66화 *
“이건 어떻게 할까?”
전진기지를 막 빠져나오자, 아델리나가 조금 흥에 젖은 목소리로 물건 하나를 꺼내놓았다. 아르크의 눈이었는데, 한 눈에도 오래되어 너절했다. 전진기지 내부에 헌터들이 가져다놓은 물건들과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낡은 것이었다. 바츠는 그녀가 느닷없이 그것을 꺼내놓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녀의 반대쪽 손목에 또 다른 아르크의 눈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궁금증을 떨쳐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집사거야. 나오기 직전에 내가 가져 왔어.”
바츠는 가져온 이유를 따로 묻지 않았다.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고는 그 안에 있는 헌터들의 코드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 데이터를 자신의 아르크 눈으로 옮겨 넣었고, 동시에 그들에게로 메시지를 보냈다. 집사가 바뀌었다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그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자신의 코드도 보내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답신 하나가 바로 왔다. 바츠는 조금 놀란 마음으로 그것을 확인하고는, 나란히 걷던 아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바츠가 내 집사네?”
바츠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불쑥 가슴이 벅차며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손을 꼼지락거려 그녀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참아내야만 했다.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그녀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길을 받아들이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감미로운 눈웃음이 온몸에 피어나는 아찔한 긴장감을 가만히 지켜보도록 만들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흡족했다. 바츠는 그 감정을 품에 안은 채, 따라가야 했던 기존 도로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회색빛 하늘과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사이에서도 발걸음은 묘하게 가벼웠다. 그녀가 건넨 아르크의 눈은 강제로 망가뜨려 바닥에 버렸다.
도로를 다시 찾는 데에는 무려 반나절이나 소요해야만 했다.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다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는데, 그 생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었다. 꽤나 멀리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로의 흔적이 처음처럼 비교적 양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백 미터가 형적을 찾기 힘들만큼 사라져 있었고, 그 외 도로의 흔적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선이 빗어졌던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델리나가 주변 지형에 조금이나마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북쪽 전진기지에서 활동했었던 것만큼 이 주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다. 생소함을 느끼는 바츠와는 달랐다. 혼자였더라면 지나치고 동쪽으로 더 이동했거나 영영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녀 덕분에 결국에는 본래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바츠의 시야에 한 무리의 야인들이 들어왔다.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섯이었다. 사내 둘과 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들 셋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기계와 함께 하고 있었는데, 기계라고 불러야 할지 짐승이라고 불러야 할지 분간하기 어려운 물체였다. 네발로 걷는 모습은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이라고 불릴 수 있는 모습은 없었다. 그런데도 앞으로 잘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전후의 개념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도 가죽이나 털 같은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한마디로 가축의 모습을 한 기계였다. 덩치는 어른 셋 보다도 컸고, 높이는 5ft 정도 됐다. 전부 둘이었는데, 그 위에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올려 있었다. 아이 둘이 각각 곁에 머물며 하나씩 책임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남은 한 아이는 그 사이에서 다른 둘을 보조하는 것으로 보였다. 사내 둘은 소총으로 무장하고는 대열 가장 앞과 뒤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다들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보니, 단순한 야인들은 아니었다.
“칼맨인 것 같은데.”
아델리나가 그들의 정체를 입으로 확인시켜주었다. 바츠도 같은 생각이었다. 많은 짐을 싣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그들은 영락없이 칼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특히나 아이들의 발목에 보폭에 맞는 족쇄가 채워진 것을 보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부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뒤에 가던 사내가 바츠와 아델리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리에 멈춰서며 이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총구를 들어 올리지는 않았지만 잔뜩 긴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츠는 그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동경로와 엇갈려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바츠와 아델리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불안한 듯 끊임없이 살피는 시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마지막으로 헌터를 본 것이 벌써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네요. 오늘 운이 좋은가 봅니다. 이렇게 두 분이나 한 번에 만나게 되네요.”
바츠와 아델리나를 가장 먼저 발견했던 사내가 한발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바츠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그 손을 잡았다. 뒤쪽에서 잔뜩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신경 쓰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우린 민스크 시티로 가는 길입니다. R6 아르크로 가는 길이거든요. 그 근처 칼루가 시(市)로 가서 무기들을 팔 생각입니다. R6의 전진기지 중 하나거든요. 그곳 군인들은 무기를 굉장히 좋아하죠.”
그가 한쪽으로 살짝 비켜나며, 그 요상한 기계 위에 잔뜩 실린 짐들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그곳에는 각종 잡다한 물건부터 다양한 무기들이 실려 있었다. 두꺼운 가죽 천으로 단단히 싸매놓았지만, 미처 안으로 다 감추지 못하고 밖에까지 대충 진열되어 있는 무기만도 여러 점이었다. 나름 신경 써서 제련된 둔기들부터 크고 작은 소총과 탄약까지 거의 없는 것이 없어보였다. 심지어 카니지로 보이는 검도 있었다.
“맞습니다. 4일 전 서쪽에서 어떤 떠돌이에게서 구입했죠. 아마 어딘가에 죽은 헌터의 검을 주워 왔거나, 헌터의 무덤에서 뽑아 온 걸 겁니다. 뭐, 우리에게 출처는 중요하지 않죠. 물건을 받으면 가격을 지불하면 그만이니까요. 넉넉히 챙겨 줬습니다. 프레이 3마리에 송곳니 2개나 건넸죠. 물론 헐값이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운이 좋은 겁니까, 그 놈이 운이 좋은 겁니까?”
그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수완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경계심 가득했던 눈이 어느새 살갑게 변해있었다. 은연중 자랑을 늘어놓으며 깜빡 잊은 걸로 보였다. 그가 흐뭇함 가득한 목소리로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건 비싸게 팔릴 겁니다. 아르크의 군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이 탄약보다도 카니지니까요. 그들의 숙원 아닙니까. 군인들은 검술을 배우지만 검이 지급되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기껏해야 흉내만 낸 검들을 지급받고는 하더군요. 뭐, 그것이라도 있으면 좋아하지만요. 어쨌든 전 이 카니지를 애니밀 50개는 받고 넘길 생각입니다. 그 정도 값어치가 충분하죠."
“그들이 그만큼 지불할 수 있을까? 애니밀은 구하기 힘들 텐데?”
“물론이죠. 군인들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레벨2 거주자들 아닙니까? 대부분 레벨1 거주자들이죠. 그들이 애니밀을 구한다는 건 매우 어렵죠. 하지만 배급표를 가지고 뒤로 몰래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연구원들과 말입니다. 그러면 충분이 구할 수는 있죠.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애니밀은 지상에서 정말 귀한 겁니다. 간단히 부착하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너끈히 보내니까요. 그거 하나면 많은 것을 살 수 있죠.”
바츠는 그의 어깨너머로 여전히 자신을 향해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살폈다. 가까이에서 보니 둘은 여자 아이였다. 작은 손을 앞으로 모아 꼭 붙들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손이 눈에 띌 만큼 붉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방향이 맞다면 함께 가시죠.”
그가 슬쩍 걸음을 옆으로 다시 옮기며 바츠와 그 아이들 사이로 끼어들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괜한 동정심은 접어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간섭을 말하고 있었다.
“스톡홀름 시티를 아나?”
“오, 스톡홀름 시티. 물론이죠. 그곳은 정말 좋은 곳입니다. 거기만큼 얻을 것이 많은 곳도 없죠. 하지만 우린 그곳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두둑이 챙길 수 있는 곳이지만, 워낙 소름끼치는 곳이거든요. 그곳으로 갑니까?”
“그래.”
“잘 됐군요. 우리랑 함께 가시죠. 민스크 시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기껏해야 3, 4일 꼬박 걸어야 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죠. 아무리 헌터라도 쉬기는 할 것 아닙니까? 그곳에서 좀 쉬고, 정비도 하고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북쪽으로 갈수록 더욱더 척박하거든요. 여자도 보기 힘들지만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렵죠. 하긴 그렇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긴 하군요. 어쨌든 그러는 편이 나을 겁니다. 우리도 좀 덕을 보고요. 헌터와 함께 가면 두려울 게 없죠.”
바츠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조금 더 지나면 아델리나에게도 낯선 길이 될 것임을 우려해서 결국 동의했다. 최소한 이들과 함께 가면 길을 잃고 헤맬 일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칼맨은 경험 많은 헌터만큼 지상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이었다.
“사미르입니다. 저쪽은 제 동료 강일. 이름이 좀 어렵죠? 몇 번 불러보면 익숙해지실 겁니다. 너무 어려우면 유라고 불러도 됩니다. 저래 봬도 상당히 날쌘 친구죠.”
바츠는 사미르라고 밝힌 사내가 고개로 신호를 준,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는 바츠나 사미르보다는 키가 작았지만 몸집은 훨씬 비대했다. 한쪽 어깨가 사람 머리통 만할 정도 거대했다. 그가 민첩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체형이었다. 그가 바츠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여 인사를 해왔다. 날카로운 눈빛 때문인지 상당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 때문인지 그는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이례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열 가장 앞에 서서 걸어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맨 뒤에서 따라오는 사미르가 내내 조잘조잘 떠든 것을 보면, 그는 원래 말수가 적거나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커다란 강을 앞두고서였다. 그 폭이 무려 700m나 되어보였다.
“다리가 보이지 않아.”
강일이 고상함이 묻어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른 발음과 무게감이 그를 더욱더 단단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진중한 눈으로 돌아보았는데, 정확히는 맨 뒤에서 따라오던 사미르를 확인한 것이었다. 사미르는 서둘러 그의 옆으로 가더니 강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조급해 보였다. 뭔가에 쫓기듯 고개를 좌우로 내둘러보고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바츠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어쩌죠? 분명 이 근처에 다리가 있었는데 보이질 않네요. 혹시 이 주변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바츠는 고개를 저었다. 아델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아마 우리가 했던 예상보다 더 방향을 이탈한 모양입니다. 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좀 이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종종 있는 일이니까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지상에는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바츠는 사미르의 변명을 별다른 반발 없이 수용했다. 애초에 딱히 따져 묻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주변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이 한몫했다. 그가 지원을 받고 있듯이, 자신도 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앞서 걷기 시작하는 강일의 뒤를 조용히 쫓을 뿐이었다. 밤이 내리기 직전까지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강일이 멀리서 보이는 불빛을 발견하고는 외쳤다.
“사미르, 베넬리 부인의 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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