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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67화 (167/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67화 *

사미르가 황급히 앞으로 뛰어가더니, 강일과 나란히 걸으며 앞쪽을 살폈다. 그리고는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그 불빛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이내 환호성을 지르며 강일의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그에게도 지상의 밤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길을 헤매게 된 것에 대해서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가 정말로 기뻐하고 있었다.

“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친절한 가족이 우릴 반겨줄 겁니다. 강은 내일 건너도록 하죠. 베넬리 부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리가 있습니다.”

사미르가 흥분한 목소리로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말했다. 바츠는 그의 목소리에 안도감이 묻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강일의 어깨를 괴롭히며 기쁨을 표현했다.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것은 물론이고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며 귀찮게 굴었다. 하지만 강일은 그의 격한 반응을 묵묵히 받아줄 뿐이었다. 치대오는 그의 몸부림에 미동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정면만 응시했다. 그 앞에 다다를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불빛의 정체는 강일이 말한 집 근처에 놓여있는 검은색 강철 원통에서 솟구치는 불길이었다. 중간 중간 마디가 있는 독특한 모양의 강철 통이었는데, 부식으로 인한 것인지 밑 부분에는 구멍이 숭숭 나 있었고, 위로는 안에 담긴 불꽃이 이따금씩 치솟아 오르고는 했다. 그 빛이 멀리까지 뻗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베넬리 부인!”

사미르가 강일에게 짐과 이이들을 맡기고는 홀로 집을 향해 다가갔다. 강기슭에 잡다한 고철이나 폐자재로 만들어진 집이었는데, 쓰레기 더미들을 주위에 인위적으로 쌓아올려 얼기설기 지은 집이었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고, 구조물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끊임없이 유지보수를 했기 때문인지 내구성은 강해보였다. 며칠 전 쏟아진 많은 양의 눈과 비는 물론이고, 지상의 밤이 실어 나르는 세찬 강바람도 약간의 미동도 없이 견뎌내고 있었다. 이따금씩 고철들이 꿈틀거리며 부딪히는 금속음이 날 뿐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수다쟁이 사미르가 아니야!”

사미르의 모습이 안쪽으로 사라지자, 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즐거운 흥에 젖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한껏 고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매우 무겁게 들려왔는데, 짓눌린 바람이 깨진 유리사이로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미르가 그녀와 함께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막 잠에서 깼는지, 헝클어진 은갈색 머리칼을 하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사미르의 허리에 양팔을 두른 채,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본인은 물론이고 사미르마저도 걸음이 매우 불편해보였지만, 쉽게 팔을 풀 것 같지 않았다. 사미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그 불편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치켜들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방독면은 없었다.

“이쪽이 베넬리 부인입니다. 이곳에서 적어도 15년 이상 사신 분이죠.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사미르가 그녀를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사미르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반가운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강일을 향해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바츠와 아델리나를 발견한 건 가장 마지막이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둘은 어둠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때마침 아이 하나가 부스럭거리며 앞을 지나는 통에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절대로 떨어질 것 같지 않던 팔도 풀고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꼭 헤러티커라도 발견한 듯한 얼굴이었다.

“사, 사미르?”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눈동자도 목소리만큼 마구 흔들렸다. 그녀가 겁에 질려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표정보다도 놀란 나머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그녀의 손에 새끼손가락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더 주목했다. 그녀의 손은 손가락이 네 개뿐이었던 것이다. 남은 다른 손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날도 어둡고 뒤쪽으로 숨겨져 있던 터라 잘 보이지 않았다.

“놀라지 마라요, 부인. 헌터들일 뿐이에요. 우리와 함께 이동 중이죠. 스톡홀름 시티로 간답니다. 부인에게는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을 거예요.”

사미르가 숨이 막힌 것처럼 헐떡대기 시작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차분하게 본래 위치로 내려주었고, 그녀의 어깨를 끌어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시선만큼은 바츠와 아델리나에게서 쉽게 떠나지 못했다. 집착에 가까운 의지로 끝까지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미르가 방독면을 벗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진정되었다. 그녀가 졸린 사람처럼 눈을 감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두르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미르와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강일은 그 모습이 익숙한지, 슬쩍 보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아이들과 짐을 확인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정말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지?”

“그럼요. 헌터들은 야인들에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둘은 키스를 끝내고는 소곤거리듯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그 와중에도 몇 번이나 곁눈질을 하며 바츠와 아델리나의 눈치를 살폈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진 얼굴이었다. 긴장감도 많이 사그라지고 있었고, 말투도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가끔씩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아직 남아있는 난처함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건 앞으로도 영원히 떨쳐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말했다.

“부, 불편하실지 모르지만 편안하게 머무세요. 어떻게 대접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그녀가 겨우 마주보고 섰지만, 주눅 든 속내를 감추지는 못했다. 자꾸만 숨어들어가려는 턱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 옆에서 등을 쓸어내려주는 사미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결코 입술을 뗄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미르의 손길에 의지한 채 바츠와 아델리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신세를 지게 되었군. 애쓸 필요는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당신도 괜한 짓을 할 필요 없어. 애초에 당신에게 원한 것은 길 안내지 잠자리나 먹을 것이 아니니까.”

바츠는 그녀에게 차갑게 말하고는 사미르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그가 자꾸만 그녀의 등을 떠밀며 뭔가를 하라고 독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름 숨기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바츠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주눅 든 것은 겁을 먹은 것도 있지만, 그의 눈치로 인한 부담감이 원인이었다. 그는 그녀가 성대하게 대접할 수 있길 바라는 눈치였다. 바츠는 그것이 탐탁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빡빡하시네요. 다른 헌터들에 비해서 조금 부드럽다고 느꼈는데, 역시 헌터들은 다 똑같나 봅니다.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겁니다. 어쨌든,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도록 하죠. 내일 아침에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헌터라도 이런 캄캄한 밤에 돌아다니는 건 불편하잖습니까.”

사미르가 용케 알아듣고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자신의 의도를 굳이 숨기지 않을 만큼 정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정말 인상적인 것은 그의 말투가 아닌 태도였다. 그는 마치 그녀의 남편처럼 굴었다. 그녀의 집이 그의 집인 것 같다고 착각이 일 정도였다.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그녀를 대변하는 모습이 영락없었다. 뒤늦게 한마디 거드는 그녀의 모습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내 아들들이 돌아올 거예요. 그럼 맛있는 걸 대접해드리죠.”

그녀는 사미르만 있으면 용기가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고개만 옆으로 내밀어 자신 있게 외쳤다. 조금 전 마주보고 섰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힘없이 말끝을 흐리지도 않았고 더듬거리지도 않았다. 표정에 한결 여유가 내비치기까지 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고개를 슬쩍 짧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그녀는 물론이고 사미르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들의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헌터와 친구가 된 것 같아 기쁘네요! 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기분이 좋아졌으니 오늘은 파티입니다! 강일, 프레이 바비큐를 하자고!”

사미르가 목소리를 높이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사미르의 말을 들은 강일은 군말 없이 짐 꾸러미 안에서 프레이 한 마리를 잡아 빼내, 바로 강철 통 위로 걸어 올려놓았다. 그러자 주위에는 달짝지근한 기름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그 주위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몰려들었다. 어느새 방독면을 벗어던진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강일은 그 아이들을 발로 툭툭 밀어내듯 걷어차며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들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불 위에 올려 진 프레이만 바라보았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도 있었지만, 바로 일어나 다시 자리를 취했다. 매우 허기가 진 모양이었다. 강일의 발길질은 그런 아이들에게 몹시 매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진짜로 쫓아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꼭 식사예절을 가르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순서를 일러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사미르는 그녀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몰라도, 즐거운 웃음소리가 집안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들려왔다. 그 둘이 안에서 무슨 일을 할지 궁금했지만, 굳이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왠지 알 것만 같았다. 둘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나았다.

“저 기계들은 뭐지?”

바츠는 아델리나와 함께 아이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강일에게 물었다. 그는 불에 검게 그을린 프레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빅도그라고 합니다.”

“빅도그가 뭐지?”

그의 대답은 짧고 굵었다. 바츠가 다시 묻는 말조차도 간단하게 대답했다.

“저 기계요.”

바츠는 순간 농담을 하는 것인가 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프레이에게 고정된 그의 얼굴은 불꽃의 일렁거리는 그림자 때문에 진지하다 못해 비장함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에게 재차 물으려고 했지만, 막 집안에서 나오는 사미르 때문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용케 방금 전 대화를 들었는지 대신 대답을 하며 걸어왔다.

“아주 오래 전에 군용으로 개발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 대신해서 싸울 수 있도록 말이죠. 우습죠? 걷는 것도 겨우 하는 고철보고 대신 싸우라니 말이죠? 그나마도 전에는 소음이 굉장했다고 합니다. 수백 미터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거의 소음이 없죠. 동력 기관을 개조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르죠.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그냥 팔면 사고, 주면 받으니까요. 그래도 칼맨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스터퀼리니가 물건을 더 빠르고 많이 옮길 수 있지만 그것들은 소음이 크지 않습니까? 바닥을 질질 끌죠. 그럼 지상의 개활지에서는 헤러티커에게 사냥해달라고 비는 꼴이지 않습니까. 놈들의 청각은 무서울 정도로 발달했으니까요. 게다가 노상강도에게도 노출되죠. 지상에서 노출은 죽음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죠. 그에 반해 빅도그는 꼭 사람처럼 걷지 않습니까. 네 다리로 척척. 다루기도 쉽고요. 곤란한 건 배터리인데, 한번 충전을 하면 30일은 거뜬합니다만 가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특히 카르카손에서 구입하면 정말 비쌉니다. 가장 싼 곳이 스톡홀름 시티인데...거긴 영...어쩔 수 없이 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대량으로 사두는 편이죠. 대량이라고 해봐야 서너 개입니다.”

바츠는 긴 설명보다도 바지를 추스르며 어기적거리는 그의 걸음걸이에 더욱 눈길이 갔다. 사타구니가 불편한지 제대로 걷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다가와 섰다. 뒤이어 집안에서 상기된 얼굴로 빠져나오는 베넬리 부인 덕분인 것 같았다. 그녀는 미묘한 미소를 얼굴에 그려 넣고는 입가를 소매로 닦아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방독면을 벗지 않고 있는 강일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었다. 그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프레이를 굽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츠는 어둠 속에서 이질적인 소음을 감지했다. 프레이가 불꽃에 지글거리는 소리도 아니었고, 사미르가 민망함에 반복하는 헛기침 소리도 아니었다. 아이들의 군침을 삼키는 소리도 아니었고,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며 수줍게 다가오는 베넬리 부인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조용하고 신중하면서도 긴장감이 흐르는 소음이었다.

바츠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델리나도 뒤늦게 그 소음을 느꼈는지, 따라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사미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누가 있다.”

바츠의 대답에 때마침 불가로 다가온 베넬리 부인이 말했다.

“누가 왔다고요? 내 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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