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70화 *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델리나의 뒤척임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어깨를 쓸어주었을 뿐이었다. 그의 묘한 시선보다는 아델리나의 안락함이 먼저였다. 그 사이 사미르는 바츠의 대답을 기다리기 힘든지, 괜히 입맛을 다셨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기껏 물어놓고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안에 있는 아이나 쳐다보았다. 이따금씩 눈만 치켜뜨며 눈치를 살폈을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아델리나를 향해 있었다.
“그 아이는 노예들이지?”
“네? 네...칼맨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 중 다른 하나죠. 특히 여자 아이들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습니다. 음식 소모도 적은데다가...네? 알잖습니까? 지상에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많지 않죠. 그마저도 제대로 된 문명이 남은 곳을 찾기 힘듭니다. 소모는 줄이고, 생산은 극대화. 그게 지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방식 아니겠습니까?”
그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바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막상 입을 열기 시작하자 신이 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위축되어 있던 태도를 금세 버렸다. 흥에 젖은 그의 표정이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보일 만큼 밝아졌다.
“저 사내아이는 최근에 구입했습니다. 50일도 안 된 것 같군요. 오데사 시티에서 구입했죠. 사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꽤 쓸모가 많더군요. 계집아이들이 하기 힘들 것을 척척 해내죠. 녀석들이 놈에게 의지하며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감을 느끼는 것도 있는 것 같고요. 다루기는 좀 불편하지만,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습니다. 혹시 오데사 시티 가보셨습니까? 그곳에 술집 하나가 있는데 남쪽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죠. 최고의 술집이라는 키예프 시티의 폴(Paul)보다도 더욱 인기가 많죠. 규모는 절반도 되지 않지만 접대부들이 끝내 주거든요. 다들 적극적이죠. 폴의 접대부들은 너무 도도한 척을 합니다. 의상도 마음에 들고, 전체적으로 미모도 낫지만 남자들 알잖습니까? 들이대는 여자를 막기는 힘든 법이죠. 가격도 훨씬 비쌉니다. 그래서 고급 접대부들로 통하는데, 실상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는 힘들죠.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이 두루두루 말입니다. 물론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는 곳은 폴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오데사 시티의 술집이 뒤지지 않는 이유가 있죠. 저돌적인 접대부들도 접대부들이지만, 주인이 상당히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한 번 가보십시오. 주인 가슴을 만지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미르는 가까운 곳에 남은 계집아이를 꼭 부둥켜안고 잠이든 사내아이를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이가 기대 이상의 가치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이어진 술집 접대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바츠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엉큼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앞에 접대부들이 그려지고 있는지, 벌써부터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불꽃의 붉은 그림자가 그의 얼굴이 알코올에 취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의 손길이 거칠게 변한 것도 그때였다. 품안에 있던 아이를 다시 더듬기 시작하는 그의 손길이 그가 들뜬 만큼 힘이 들어갔다. 아이가 잠결에도 고통에 젖은 신음소리를 내야할 정도였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우린 노예를 두지 않는다. 성욕을 따로 사고팔지도 않지.”
아까 사미르가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상하게 말끝에 ‘아직’이라는 말이 있다면 더욱더 자연스런 대답이 될 것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가 한껏 즐겁게 변해가던 표정을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굳어진 얼굴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둘의 대화가 끝난 것도 그때였다. 사미르가 한동안 바츠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지쳐 잠이 들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바츠 혼자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둠을 꿰뚫고 불어오는 밤바람이 강바람과 서로 뒤엉키며 일대를 소란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무거운 침묵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며 이를 자축했다. 바츠는 그들의 난동에 흩날리는, 아델리나에게 덮어주었던 자신의 망토를 다시 한 번 매만졌다. 날카롭게 불어 닥치는 그들의 희롱이 제법 짓궂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퍼 나르며 자꾸만 귀찮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장난에 단 한 번도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리를 베고 누운 아델리나의 표정이, 그녀의 방독면 렌즈를 통해 편안하게 비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니다! 나 아무것도 안 했다!”
다음날, 바츠는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내둘렀다. 아델리나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근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자신이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분명 당황스러운 일이기는 했지만, 이것에 비해서는 어림도 없었다. 자신의 팔이 어느 틈에 카니지를 뽑아들고 어딘가를 향해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잠이 들었던 것처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엉덩방아를 찧고 놀란 얼굴로 양손을 내두르는 혐오스런 얼굴이 있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릴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강도가 너무 세서,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마구 휘둘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가 내젓던 고개를 멈추고 나서도 계속해서 흔들렸다. 마치 스튜에 떠오른 고기처럼 무게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바츠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패토스. 이른 아침에 서럽게 죽고 싶은 건가?”
“아니다! 난 정말 아니다! 난 그냥 냄새만 맡았다!”
바츠는 크게 놀랐기 때문인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피해,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아델리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 위로 덮어준 자신의 망토가 밤새 불어 닥치던 바람 때문인지 한쪽 끝이 걷어내 있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잠결에 걷어차 낸 것일 수도 있었다.
“아델리나를 괴롭힐 생각이라면 당장 그만 둬. 어제 내가 경고 했지? 다시 경고하겠어. 너에 대한 내 마지막 존경심이라고. 이 이상은 그 어떤 인내심도 발휘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 뒤로 물러나.”
“아델리나...아델리나...”
패토스가 바츠의 엄포에 중간에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팔만 이용해 바닥에 앉은 채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 거대한 덩치가 힘겹게 움직여지고 있었다. 엉덩이와 무거운 다리로 바닥을 끄는 소리가 캐터필러를 통해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스터퀼리니의 소음을 영락없이 닮아있었다. 엄지 크기의 작은 돌멩이쯤은 그대로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 소음에 아델리나를 비롯해 사람들이 하나 둘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그가 아델리나 근처까지 조용히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아무리 바츠가 피곤했고, 바람의 떠들썩한 방해가 있었다지만 그건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기척을 숨기는 법에 능숙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사미르가 푹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는 몸을 돌려 바닥을 네 발로 기어가기 시작하는 패토스의 모습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바츠가 카니지를 뽑아들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델리나는 정말 숙면을 취했는지, 아직 몽롱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등을 보인 채 기어가는 패토스를 발견하고는 바츠의 품안으로 몸을 던지며 양팔로 바츠의 허리를 감쌌다. 바츠는 그녀의 어깨에 남은 팔을 두르며 꼭 안아주었다. 그 사이 강일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총구를 슬그머니 저쪽으로 달아나는 패토스를 향해 겨누었다. 당장 사격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를 했을 뿐이었다.
“패토스? 패토스!”
그때, 집 안쪽에서 베넬리 부인의 당혹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가 부산을 떨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소리도 함께였다. 패토스는 기어가던 방향을 집 쪽으로 바꾸며 울기 시작했다. 베넬리 부인을 끊임없이 찾으며 서럽게 울었다.
“패토스! 내 아들!”
그녀는 집에서 뛰쳐나오자마자 그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크게 놀란 눈으로 주변을 빠르게 살피고는, 그를 향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둘은 꼭 부둥켜안고 잠들어 있던 사미르의 아이들 뒤에서 서로를 안았다. 패토스의 비탄에 가까운 울음소리는 베넬리 부인마저도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그 바로 옆에서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아이들이 호들갑스럽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우왕좌왕하는 눈으로 황급히 자리에서 달아나, 강일의 양 다리를 각각 하나씩 붙들며 그 뒤로 숨었다. 강일이 심드렁하게 다리를 털어냈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반응은 고작해야 아이들이 슬쩍 내둘릴 정도로 밖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패토스가 베넬리 부인에게 말했다.
“엄마! 나 또 따끔했어! 저 헌터가 나 또 따끔하게 만들었어! 아델리나가 좋은데, 저 헌터가 따끔하게 했어!”
“아델리나가 뭐야? 응? 아들, 아델리나가 뭔데?”
“저거! 내가 갖고 싶은 거! 냄새 좋은 거!”
패토스가 손으로 아델리나를 향해 가리켰다. 베넬리 부인은 그 손끝을 따라 고개를 옮겼다가 황급히 다시 돌아가며 품안에서 우는 소리를 내는 패토스의 옆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부비적거렸다. 그녀는 패토스가 고작 무릎만 세우고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머리 하나가 더 작았다.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는데, 패토스의 우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싫어! 아델리나 가질 거야! 아델리나 내거 할 거야!”
패토스가 갑자기 베넬리 부인을 뒤로 밀쳤다. 그녀는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망토처럼 뒤로 붕 떠올라 나뒹굴었다. 어찌나 세게 내쳐졌는지, 바닥으로 추락한 그녀의 입에서 절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통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처량한 비명이었다. 사미르가 아이를 내려놓고는 패토스를 대신해 서둘러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충격이 제법 큰지 사미르의 부축에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패토스가 악에 바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델리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 아델리나는 그런 짓 하지 않는다! 엄마 밉다!”
“아들! 엄마는 거짓말 안 해! 아들도 알잖아? 엄마는 그런 사람 아니야! 이리 와. 저분들은 곧 떠나야 해. 우리하고는 다른 사람이야. 착하지? 엄마가 아들한테 어울리는 여자 구해줄게. 저 사람들은 아니야.”
베넬리 부인이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는 아직 통증이 남았는지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했지만, 간절함이 담긴 눈빛과 손짓으로 그를 부르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외면하고는 고개를 돌려 바츠에게 안겨 있는 아델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나 그럼 아델리나 따라 간다. 아델리나가 가면 나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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