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71화 (171/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71화 *

베넬리 부인의 경악에 찬 외마디 외침이 주위로 울려 퍼졌다. 그녀는 패토스를 반복해서 부르며 어떻게든 다시 자신에게로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자신의 축 쳐진 가슴을 밖으로 꺼내놓으며 유혹하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패토스는 그녀의 형편없는 가슴을 흘깃 바라보는 것으로만 그치고, 아델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베넬리 부인을 향한 패토스의 관심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고집은 그녀의 유혹에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사미르의 눈길이나 한 번 잡아끌었을 뿐이다. 베넬리 부인이 북받치는 감정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바닥에 주저앉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누명을 쓴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손바닥으로 땅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쏟아냈다. 보다 못한 사미르가 대신 나서서 페토스를 회유해 보았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베넬리 부인도 해내지 못한 것을 사미르가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패토스는 사미르의 말을 아예 모른 척 해버렸다. 베넬리 부인의 울음소리만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패토스가 다시는 헛소리를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품안에 있던 아델리나가 다급히 막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고개가 살며시 좌우로 내둘러졌다. 관여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였다. 바츠는 아델리나의 말에 따랐다. 패토스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제멋대로 움직이는 눈동자가 이제는 마음 편히 아델리나의 향기만 바라보았다. 사미르의 얼굴에 몹시 난감한 기색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는 예기치 않은 일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요!”

베넬리 부인이 허겁지겁 자리를 박차고 달려와 바츠의 다리에 매달렸다. 눈물로 범벅된 그녀의 얼굴이 매우 처량했다. 갖은 먼지로 더럽고, 세월의 입김에 탄력을 잃은 피부가 너무도 안쓰럽게 비쳐졌다. 하지만 바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해서 애원하며, 이제는 자신의 다리뿐만 아니라 아델리나의 다리까지 번갈아 붙들었지만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지난번에도 내 아이를 데려갔잖아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요! 왜 자꾸 내 아이를 데려가는 거예요! 내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라고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요!”

바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녀의 얼굴을 피해, 아델리나의 시선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델리나의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왜인지는 모른다. 아델리나는 패토스를 떼어내기 위해 뭔가를 하려던 자신을 막아설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없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바츠는 시선을 옮겨, 자신의 다리를 다시 붙드는 베넬리 부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 아들의 의지이고, 그것을 제한할 만한 자격은 우리에게 없다.”

“중간에 불편해지면 버릴 거잖아요! 세상에 던져 놓을 거잖아요! 내 아들은 아직 어려요! 세상을 몰라요! 제발요! 버릴 거면 지금 미리 버려주세요! 내 아들에게 괜한 고통을 주지 말아주세요!”

베넬리 부인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키더니, 바츠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벨트에 연결된 갖가지 주머니들에 얼굴을 부딪치면서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눈을 번뜩이며 더욱더 간절하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여념이 없었다. 카니지의 손잡이에 얻어맞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차가운 목소리로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그건 당신의 아이가 감당해야 할 문제겠지. 당신 아이에게도 의사가 있을 것 아니야? 우린 당신들의 문제를 대신 처리해주는 해결사가 아니야. 만약 당신의 아들이 버려진다면 그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일 뿐이지.”

“이 괴물! 이 끔찍한 괴물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들!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 아들이 못 생겼다는 이유로 괴롭히려는 거잖아! 그 놈들과 똑같아! 세상을 정화한다고 떠들어대는 그 놈들과 똑같다고! 내 아이들이 돌아오면, 그 놈들 말고 네 놈들도 찢어 죽일 테다! 이 괴물들!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지! 후회하게 될 거야! 용서하지 않겠어! 그 피비린내 나는 검은 슈트를 살점과 함께 찢어발길 테다!”

베넬리 부인의 태도가 급격히 변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실하게 애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투사처럼 별안간 분노와 함께 증오를 쏟아냈다. 바츠의 몸을 기어오르듯 양손으로 붙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츠의 방독면을 붙잡고 매달리며 손톱으로 마구 할퀴어댔다. 놀란 아델리나가 그녀를 밀쳐냄과 동시에 팔을 떼어내려고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델리나의 손길에 크게 힘이 실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녀의 악에 바친 성질은 그녀를 몇 번이고 다시 달려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온 사미르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잡아 당겼을 때에서야 비로소 그녀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사미르에게 들려가면서도 양팔과 다리를 마구 휘둘러댔다. 그리고는 마지막 발길질로 기어이 아델리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바츠의 낭심을 노린 발길질 같았지만, 균형을 잃고 내둘러지는 바람에 빗나간 듯 보였다.

바츠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필사적으로 악을 쓰는 베넬리 부인을 끝까지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녀의 흥분한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아델리나가 그녀의 발길질에 엉덩이를 얻어맞으며, 통증보다는 놀람이 묻어나는 비명을 내뱉었을 때에나 시선을 옮겼다. 아델리나가 얻어맞은 부위를 살펴주기 위해서였다. 손으로 그곳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그녀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곳에 묻은 먼지는 베넬리 부인의 발길질로 인한 흔적이 아니었다. 한 눈에도 바닥에서 자고 일어난 흔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델리나는 그저 그녀의 발길질이 스치며, 잠깐 당황했던 것일 뿐이었다. 그녀의 작은 어리광이었던 것이다. 도리어 저쪽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패토스가 대신해서 더욱 흥분했다. 그는 아델리나의 비명소리를 듣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시끄러운 고함이었다. 꼭 헤러티커가 흥분했을 때에 내뱉는 울음소리 같았다. 베넬리 부인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구 부르짖다가, 놀라서 입을 다물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녀의 얼굴이 실망과 서운함으로 빠르게 물들었다. 사미르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베넬리 부인, 어차피 작은 머리의 다리로 갈 겁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패토스를 겁낼 거예요. 그럼 그걸 보고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패토스는 생각보다 여리잖아요. 그곳에서 겁을 집어먹고는 마음을 바꾸게 될 겁니다. 당신을 찾고 말겠죠. 그럼 내가 그때에 맞춰 당신에게 돌려보내도록 할게요.”

“그럴까? 그래 줄 거야?”

베넬리 부인이 고개를 돌려 사미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얼굴에 얼룩이 강바람에 씻기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물론이에요. 그러니 침착하게 기다려요.”

사미르가 그녀의 가슴을 다시 옷 안쪽으로 밀어 넣어주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녀는 그런 사미르에게 감격에 겨운 얼굴로 울먹이며 목부터 볼, 입술로 이어지는 키스를 마구 퍼부었다. 그가 옆으로 넘어뜨린다면 조금의 반항도 없이 순순히 따라줄 것처럼 보일 만큼 애정 어린 모습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 사이 강일은 아이들과 함께 이미 짐을 다 꾸린 상태였다. 빅도그를 다시 작동시키며 움직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에 무감각해보였다. 아이들이 이따금씩 호기심에 돌아보고는 하면, 툭툭 건드려 눈치를 주며 할 일에 집중하게 만들뿐이었다. 패토스가 함께 가는 것이 못 마땅해 보이기는 했지만, 굳이 밖으로 내색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저 패토스가 한시라도 빨리 입이나 다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바람 덕분인지, 패토스는 얼마 못가 금방 조용해졌다. 베넬리 부인의 집을 떠난 것도 그때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강일이 선두였고 그 뒤를 아이들이 빅도그와 함께 따랐다. 사미르는 패토스와 함께 가장 뒤에 자리했고, 바츠는 아델리나와 함께 무리에서 한 걸음 떨어져 나와, 나란히 걸었다.

사미르가 말한 다리는 베넬리 부인의 집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만 했다. 결국 함께 가게 된 패토스가 중간에 자꾸 강가로 달려가 작은 돌을 주워오거나, 갑자기 저쪽으로 뛰어가 땅바닥을 살펴보거나 하는 둥으로 해찰했기 때문인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를 보살핀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뭔가에 관심이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고는 했다. 그 때문에 행렬은 여러 차례 정지해야만 했다. 사미르가 몇 번이나 불러도 그가 꼼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아델리나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잘 듣는다는 것이었다. 사미르가 수없이 어르고 달래는 것은, 아델리나가 보다 못해 한마디 툭 던지는 것만도 못했다.

“패토스, 우린 가야 돼.”

아델리나의 한마디는 그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황급히 달려오게 만들었다. 그는 그때마다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는 했다. 하지만 매번 끝까지 다가오지는 못했다. 신이 나서 달려오다가도 중간에 풀이 죽어 사미르 곁으로 방향을 바꾸고는 했다. 그건 전부 아델리나 곁에 머물고 있는 바츠 때문이었다. 그는 중간에 바츠의 눈치를 살피고는 슬픈 표정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델리나의 말이라면 강에도 뛰어들고, 흙도 집어먹을 것 같았지만 바츠가 상당히 무서운 모양이었다. 마저 용기를 내지 못한 채, 포기하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사미르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황당한 눈빛으로 가만히 지켜보고는 했다.

“다리가 보인다.”

그때 강일이 앞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베넬리 부인의 집보다 두 배 가량 큰 크기의 작은 건물 하나가 있었다. 꼭 두꺼운 소시지를 옆으로 뉘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는데, 전체적인 윤곽이 직사각형이었지만 둥글게 마감된 모서리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향한 것은 그 건물이 아니었다. 사미르가 뒤에서 다시 한 번 가리키며 말했다.

“저 다리로 건너야 합니다.”

바츠는 그 너머로 보이는 회색빛 다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다리였다. 지금까지도 용케 그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중간 중간 뼈대로 보이는 철근이 드러나 있었으나, 이용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 위로 아르크 상업지구의 상점 일부를 떼어 옮겨 놓은 듯한, 작은 집도 보였다. 기껏해야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크기였다. 그 앞에 서너 명의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같이 소총을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따로 있었다. 다리를 건너기 전, 그 앞에 있는 소시지 모양의 건물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확히는 그 앞에 놓인 물건이라고 해야 하는 게 옳았다. 그 앞에는 오데사 시티 조시안느의 샬롱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한 비클레타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떠돌이들의 것으로 보였다. 사미르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저 치들에게 통행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한 사람 당 손톱 세 개면 충분하죠. 우리 같은 경우는 짐 때문에 별도로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합니다. 날강도들이죠.”

바츠는 다리를 건너기 위한 통행료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함께 하는 모두의 비용을 대신 지불할 수도 있었다.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애니밀을 하나 혹은 둘을 건네며 자연스럽게 지나면 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들이 지레 겁을 먹고 얼어붙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미르는 달랐다. 비용이 부담스러운지 아니면 통행료 자체에 대한 불만인지 살짝 긴장한 기색을 엿보였다. 강일 역시도 앞에서 소총을 한 번 점검하는 것을 보니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긴장감은 결국 작은 문제를 만들었다. 그 소시지 모양의 건물 앞을 지날 때였다. 그 건물 입구에는 미풍의 작은 식당(The breeze diner)이라고 붉은 글씨가 난잡하게 적혀 있었다. 패토스가 그것을 보고는 외쳤다.

“패토스,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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