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73화 *
바츠는 그런 사미르의 모습이 묘하게 익숙했다. 그는 분명 제자리에 서서 허리나 굽실거리고 있을 뿐인데도, 마치 울면서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옷깃이 펄럭일 정도로 불어오는 강바람과 녹슨 건물 앞의 자지러지는 사람들 때문인지 매우 쓸쓸하게 느껴졌다. 괜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식당 안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그들이 아닌, 사미르의 얼굴을 향해 휘두르고 싶었다. 그는 저들의 웃음소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민망한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모른 척 외면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태도만 보아도 그가 실실거리며 따라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강일의 차분한 목소리가 먼저였다. 그는 바츠를 대신해서 사미르의 뒤통수에 모멸감을 끼얹었다.
“얼간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냐?”
“뭐?”
사미르가 어리숙한 모습으로 실실거리다 말고, 강일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강일이 바닥에 떨어진 사미르의 소총을 그쪽으로 걷어 차주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우리가 무사할 것 같으냐고 묻는 거다. 우리라도 무사할 것 같으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 우리만이라도 빠져나가야지. 저 괴물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곤욕을 치를 수 없다고. 괜히 저 놈들 신경을 건드렸다가는 다리도 못 건너. 여기서 소란 피워서 좋을 것 하나 없어. 이게 최선이라고!”
강일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의 경련으로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걸 막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들이켠 숨을 어렵게 내뱉으며 대꾸했다.
“이 짓을 그렇게 오래하고도 모른다는 게 정말 한심하군. 네가 하는 짓은 놈들이 정상적일 때에나 해라. 그럼 네 멍청한 모습을 보며 동정심이라도 느낄 테니까 말이야. 베넬리 부인처럼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저 놈이 지금 정상적으로 보이냐? 너랑 내가 왜 무장을 하고 다니는 거지? 너처럼 허리만 구부리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면 무엇 하러 우리가 이 성가신 고철을 어깨에 메고 다닌 것이냔 말이야. 헤러티커라도 마주칠까봐? 헤러티커를 마주치면 우린 이미 죽은 거다. 짐을 버리고 달아나야 하지. 손에 무엇을 들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야. 그런데도 우리가 왜 이 고철을 들고 다니는 거냐?”
강일의 무게 있는 목소리에 사미르가 발끝에 놓인 자신의 소총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을 몇 번 뒹굴며 먼지가 묻었지만, 아직 수십 발을 연속으로 쏜다하더라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견고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미르의 시선이 묘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놈의 목소리나 들려왔을 뿐이었다. 이제 실컷 즐겼는지, 웃음은 거의 그친 상태였다. 대신 그로인해 지쳤는지 전보다 목소리가 가늘어져 있었다. 호흡도 불규칙했다.
“빅도그를 끌고 있는 걸 보니 민스크 시티로 가는 칼맨 같은데, 괜한 참견 말고 가던 길이나 가도록 해. 굳이 험한 꼴 보려고 하지 말고 말이야. 우리를 웃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놈의 목소리가 시선이 흔들리던 사미르를 기고만장하게 만들었다. 사미르는 어두워진 얼굴로 자신의 소총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강일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놈을 향해 몸을 돌렸는데, 고개를 한 번 숙이기 위함이었다. 사미르는 그를 향해 감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사미르의 인사를 받은 그가 어깨를 기분 좋게 들썩이고는 손을 싱겁게 내두르며 화답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미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선을 다한 스스로가 대견한 모양이었다. 전보다 편안해진 눈으로 자신의 소총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쪽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행을 알리는 신호였다. 사미르의 인사를 받은 그 놈 바로 옆에 있던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가 불쾌한 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기다려, 노란 이끼.”
“왜 그래?”
그가 사미르의 인사를 받은 사내에게 노란 이끼라고 부르며 바짝 다가섰다.
“내가 아까 저 자식이 저 괴물과 아는 척하는 걸 봤어.”
“그래서? 이 부근에서 패토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 저 흉측한 살덩어리를 모르는 게 더 신기한 일이지. 그 어미는 소문난 갈보 년이고.”
“노란 이끼, 그게 아니라고. 잘 생각해봐. 저 자식은 칼맨이다. 비싼 물건도 가지고 있고, 돈도 많을 걸? 그런데 저 괴물은 네 식사를 빼앗아갔지. 저 괴물은 저 칼맨 자식이랑 친구일 테고 말이야. 안 그래?”
그가 노란 이끼라고 불린 사내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켜봐도 그 둘이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란 이끼는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오히려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따져 물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번뜩이는 눈빛과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기 전 일이었다. 노란 이끼의 고개가 슬그머니 따라 끄덕여지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지. 구린내, 네 말이 맞다. 친구가 실수를 저지르면 함께 책임을 지어야 하는 거지.”
둘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더러운 이를 활짝 드러냈다. 사미르는 둘의 대화를 듣고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쪽을 돌아보았고, 강일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조금도 당황하거나 의아해하지 않고, 거침없이 자신의 소총에 장전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의 소총에 탄약이 준비되는 소리가 철그럭거리며 들려왔다. 그에 맞춰 노란 이끼라고 불린 사내가 사미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너! 너 저 울보 괴물 새끼랑 일행이지?”
그 역시 옆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소총을 집어 들며, 언제든지 총구를 들어 올릴 준비를 했다. 사미르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외마디 물음만 반복했다. 의도한 것은 아닐 테지만, 노란 이끼 옆에 섰던 구린내라고 불린 사내를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말을 더듬는 사미르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어버버거리는 걸 보니 패토스의 친구가 확실하네! 지금 이 식당 꼬라지가 보여? 네 친구가 이 지경을 해놓았다고! 변상을 해야 할 것 아니야!”
그의 새된 목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사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늘고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강일이 그를 향해 총구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구린내의 목소리와 비교하면 우아하게 들릴 만큼 고급스런 음성이었다.
“헛소리 집어 치워! 원하는 게 뭐야!”
강일의 도발에 그 둘도 이쪽을 향해 서둘러 총구를 들어올렸다. 뒤에서 구경하던 식당의 다른 손님들은 크고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워낙 협소한 곳이라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는데, 계속해서 등을 사용해 벽으로 파고들었다.
“어이, 어이! 진정하라고! 우린 그저 망친 식사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거니까! 프레이 기름이 칠해진 소총 두 자루와 탄약 40발만 넘기라고. 그럼 네 놈들은 그냥 보내주도록 하지. 이 징징거리는 괴물도 데려가고 싶으면 그 두 배를 내고!”
그들의 요구에 강일이 한 발 앞에 선 사미르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네가 말한 최선이 이거냐? 고맙게도 우린 여기서 거지가 되거나 시체가 되고 말거다. 저 놈들의 습성을 모르냐? 아니, 이 세상의 습성을 모르고 있는 거냐?
“시발! 말만 하지 말고 그럼 넌 어떻게 할 건데! 넌 뭘 할 수 있냐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놈이 주둥이만 살아있군! 그리고 고작 소총 두 자루와 탄약 40발이다! 그냥 줘버리고 가면 그만이야!”
사미르가 고개를 돌려 강일을 향해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강일은 여전히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 다음은? 놈들이 그걸로 우리 뒤통수에 대고 갈길 걸? 고작 그걸 가지려고 이 난리를 칠 것 같아?”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어차피 저 괴물 자식 때문에 우린 망한 거라고!”
“그럼 진즉에 놈을 떼어내고 오지, 무엇 때문에 데리고 왔냐? 우리가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잖아. 베넬리 부인한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었던 것 아냐?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
“닥쳐! 모르면 입을 닥치라고!”
사미르와 강일의 말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둘은 자신들에게 총구가 겨눠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서로를 비난하기 바빴다. 그 사이 놈들은 멀리 보이는 다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이곳에서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그 위에 있던 세 사람 중 둘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별히 조급해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가진 총기를 여러 차례 점검하고 있었다. 동시에 어딘가를 향해 알 수 없는 손짓을 했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 중 거의 허물어진 창고 건물에서 서넛의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 역시도 충분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어이, 근데 저 헌터들 혹시 놈들의 일행 아냐? 놈들이 세워둔 빅도그 근처에 서서 계속 지켜보고 있잖아.”
그때 구린내라고 불린 사내가 노란 이끼라고 불린 사내에게 물었다. 멀찌감치 섰던 바츠와 아델리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다. 사미르와 강일이 듣기에는 웅얼거리는 수준이었다. 아마 제대로 집중을 했더라도, 불어오는 강바람과 서로 티격태격하는 소란으로 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노란 이끼가 순간 심각한 얼굴을 했다. 큰 고민이 생긴 듯 어두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화들짝 밝아지며 말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 헌터가 야인들과 다닌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둘이잖아. 분명 전진기지에 몰려온 헤러티커 여럿을 처리하고 다시 떠나는 놈들일 거다. 남쪽으로 가면 아르크가 있잖아. 그쪽 녀석들일 거야.”
“그렇겠지?”
구린내와 노란 이끼가 쑥덕거리는 사이, 그때까지도 다투고 있던 강일이 사미르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들으라고 멍청아.”
“멍청이라고 부르지 마!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네 그 잘난 영웅심 때문이기도 하니까! 그냥 모른 척 갔으면 되는 거였다고!”
강일이 사미르의 턱을 손으로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가 크게 놀랐다가 애써 떨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강일은 그의 턱을 단단히 부여잡고, 자신의 시선을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했던 말 중 가장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라. 우리와 같이 온 괴물이 저 녀석 하나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우리에게는 진짜 괴물이 함께 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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