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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74화 (174/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74화 *

사미르의 얼굴이 한쪽에 비켜나 있던 바츠와 아델리나를 향했다. 강일은 그 다음이었다. 한발 느리게 움직였다. 둘은 서로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같은 시선을 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제발 도와달라고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그 간절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하지만 바츠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둘은 단지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된 동행이었을 뿐, 계획에는 없던 사람들이었다. 사미르가 패토스를 그냥 두고 갈 수 있는 것처럼, 둘을 그냥 두고 갈 수 있었다.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한쪽 뺨을 간질이기 시작하는 시선 때문에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아주 가까운 시선이었다. 바로 옆으로 살짝 고개만 숙이면 볼 수 있었다.

“아델리나...”

그녀가 오늘 아침에 보았던 그 시선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있었던 소동 속에서 관여하지 말라는 의미로 느껴졌던 그 눈빛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조금 이상했다. 분명 그때와 일치하는 눈빛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약간 다르다고 느껴졌다. 냉정하게 굴게 될 자신을 향해, 달래듯 어루만지는 그 시선이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정확히는 그 눈에 반사되는 혹은 반사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즉, 그녀는 자신에게 그들을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안쓰럽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누군가를 진정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보듬고 싶은 것이었다. 바츠는 그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그런 요구를 할 것이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유가 절로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패토스의 이상 행동에 따로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던 모습이 떠올라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으로만 그쳤다. 그녀 역시 애써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손으로 옆구리를 눌렀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밀어낸 것이었다. 바츠는 그녀의 연약한 손길에 강하게 떠밀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미르와 강일을 향해 다가갔다. 둘은 이미 마음에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바, 바보야...그딴 소리는 좀 작게 말하라고...”

바츠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자, 사미르가 팔꿈치로 강일을 툭 밀치며 작게 속삭였다. 두 눈이 바츠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바츠가 앞에 섰을 때에는 당혹스런 눈을 했다. 내뱉는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불필요한 변명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녀석이 원래 입이 좀 거칩니다. 괴물이라고 한 것이!...”

그가 갑자기 한쪽 손을 흡기구에 가져다대며 입을 닫았다. 마른침을 연거푸 삼키느라 목젖이 크게 요동치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됐어. 상관없다.”

“우리를...도와줄 겁니까? 왜죠? 헌터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잖아요...”

“관심을 갖는 사람이 생겼거든.”

바츠의 무뚝뚝한 대답에 사미르와 강일의 시선이 동시에 어깨를 뛰어넘어 뒤쪽으로 향했다. 바츠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괜한 짜증도 일었다. 하지만 애써 흥분을 짓누르며, 고개를 식당 쪽으로 돌렸다.

“대체 왜...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닐 텐데? 정말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라고. 물론 그전에 이 상황을 해결하고 나서 말이야.”

바츠는 얼떨떨한 눈으로 묻는 사미르에게 차갑게 말하고는 한 걸음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쑥덕거리던 그들이 급히 총구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뭐, 뭐야! 지금 우리들 일에 간섭하겠다는 거야?”

“헌터는 야인들 일에 관여할 수 없는 거 아니었나!”

바츠는 카니지를 단 번에 뽑아내며 대답했다.

“난 쓸데없는 말이라면 딱 질색이야. 간단하게 말하겠다. 여기서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하던 식사나 마저 하도록 해. 그게 우리 모두가 좋아지는 길이다.”

“무슨 헛소리야! 네 놈들은 우리와 상관없잖아! 우린 총이 있다고! 아무리 헌터라도 이렇게 먼 거리에서 정면으로 총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게다가 우리 동료들도 오고 있어! 아무리 헌터라도 무사하지 못할 걸!”

“내가 야인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뭔지 알아? 조금은 더 영리해질 수는 없는가 하는 거야. 늘 이렇게 답답하게 만드는 군. 제발 자신들에게 제안이 오면 잠시라도 진지하게 생각 좀 하라고.”

바츠는 거북해지는 가슴을 달래기 위해 한쪽 이마를 마구 문질렀다.

“무, 무슨 소리야!”

“협상은 끝났다는 소리다, 아델리나!”

바츠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망토로 온 몸을 휘감으며 한쪽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전신이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발소리가 지면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로 변한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얼굴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뭉개지고,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경악에 찬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사이 아델리나 역시 마찬가지로 똑같은 환영을 보여주며 사라졌다. 그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심지어 사미르와 강일마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빅도그 틈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바츠는 멀리서 다가오던 그들의 동료들이 중간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머뭇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주인 없는 발소리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하지만 총구는 허공을 헤매이며 이리저리 내둘렸고, 그 틈에 하나씩 붉은 혈흔을 쏟으며 쓰러져갔다. 그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정처 없이 휘둘리는 총구가 사방으로 총탄을 쏟아냈다. 사미르와 강일이 놀라서 자리에 얼른 엎드렸고, 빅도그 사이에 숨어있던 아이들도 자리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들의 총구를 떠난 총탄은 그곳에서 200미터는 떨어진 식당에까지 날아들었다. 사람들 모두가 혼비백산하며 식당 안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분주해졌다. 주변에 울려 퍼지는 폭약소리가 사람들의 비명을 빚어냈다.

“빌어먹을!”

노란 이끼와 구린내라고 불린 사내 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대한 자세를 낮춰서 식당을 빠져나오는데 급급했다. 앞에 세워둔 비클레타를 향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다가가, 때마침 자신의 동료들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치켜드는 구린내의 목을 뒤에서 단번에 쳤다. 워낙 혼란스러워 그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도 없을 테지만, 보았다 하더라도 허공에 은빛 금속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붉게 변하며 사라지는 것만 눈을 꿈뻑이며 바라보아야 했을 만큼 짧은 찰나였다. 눈보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 때문에 인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뭐야!”

노란 이끼가 조금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던 구린내의 머리가 자신의 앞으로 굴러오자, 기겁을 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크게 놀랐는지, 소총도 바닥에 내버리고는 양손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뒤로 잡아끌었다. 패토스가 오늘 아침 보여주었던 모습과 영락없었다.

‘패토스!’

바츠는 그제야 그가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식당 앞에서 울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그를 찾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 뒤로 식당 안에서 겁에 질린 채,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만 보일 뿐이었다.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탄식이 절로 쏟아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의 혈흔으로 보일만한 흔적 역시 함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디론가 무사히 달아난 듯 보였다. 그를 찾는 것은 잠시 미루어야 했다. 눈앞에 문제가 먼저였다.

바츠는 그때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뒤로 기어가던 그를 향해 다가가며 은폐 콘솔을 해제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았다. 바닥을 끌던 양다리를 마구 휘저었을 정도였다. 그의 눈에는 느닷없이 정전기가 일며 검은 형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 충분히 납득할 만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함께 가던 동료는 영문도 모른 채 목이 잘렸고, 반대쪽에서 오던 동료들도 이제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바츠를 향해, 혀가 잘린 사람처럼 단어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말이라기보다는 그냥 외침이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우리 모두 좋은 길로 갈 수 있다고 말이야. 늘 반복되는 군. 기억해 두라고. 헌터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알고만 있지 말고, 정말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이야.”

바츠는 검을 양손으로 잡고 거꾸로 치켜들었다. 그의 가슴팍 정중앙에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공포로 더 이상 팔이 움직이지 않는 그로서는 피할 길이 없었다. 카니지는 그의 갈비뼈를 부수고, 폐를 관통할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바츠의 카니지는 그의 가슴이 아닌, 뒤쪽을 향해 빠르게 돌아갔다. 불현 듯 느껴지는 이질감이 바츠의 목덜미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칼끝을 유연하게 회전시켜 신속하게 그곳을 향해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바츠는 카니지를 미처 휘두르기도 전에 움직임을 멈춰 세워야 했다. 오른쪽 어깨에 묵직한 촉감이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다.

바츠는 뒤늦게 자신의 움직임을 막아 세운 원인을 곁눈질로 천천히 살폈다. 7피트가 넘는 키에 400파운드에 달하는 대단한 거구. 단단한 몸은 아니지만 압도적인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보는 것만으로도 치를 떨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그의 흉측한 외관은 그 누구라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바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패토스.”

“하지 마라. 아프다. 아픈 거 싫다.”

그는 음식물을 온몸에 뒤집어 쓴 모습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 시작한 노란 이끼를 위한 눈물이었다. 바츠는 패토스의 얼굴을 아델리나를 바라볼 때처럼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바라보았다. 그는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눈동자에 묻어날 만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어깨에 올려 진 그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생각을 드러내지 마라. 겁을 먹으면 그 감정이 온 몸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럼 넌 이미 죽은 목숨이야.”

그가 바츠의 싸늘한 목소리를 듣고는 어깨를 움찔했다. 흐르던 눈물이 잠시 정지했을 만큼 크게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전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른 때처럼 우는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눈물만 펑펑 쏟아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또 한 번 내 어깨에 손을 대면, 그때는 네 놈의 손이 저 놈 대신 바닥을 나뒹굴고 있을 거다.”

패토스는 결국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경기를 일으킬 것처럼 울어대며 베넬리 부인을 고래고래 찾아댔다. 바츠의 어깨에서 손을 땐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바츠의 시선과 목소리에 가슴을 깊숙이 베였다.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델리나가 어느 틈에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축 늘어진 두툼한 옆구리 살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울지 마. 바츠는 널 헤치지 않을 거야. 너를 괴롭혔던 저들도 마찬가지고. 바츠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사람이 아니거든.”

아델리나는 울고 있는 그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그게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스르고 울음을 그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위로는 절반의 성공에서 그쳤다. 그가 이제는 아델리나를 부르며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절로 내둘러지는 고개를 애써 참지 않고 그를 외면해 버렸다. 그의 울음소리가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아델리나는 그의 머리를 잡아끌어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그가 매우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바츠는 놈을 씻기기라도 하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저쪽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미르와 강일을 발견하고는 그만두었다. 괜한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 저만치 달아나고 있는 노란 이끼라고 불린 사내의 뒷모습이나 바라보며 혀를 찼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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