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75화 *
“다리 위에 있던 놈이 안 보입니다.”
강일이 도착하자마자 엄지만 편 손으로 뒤쪽을 향해 꼭꼭 찌르듯 가리켰다. 그는 작고 날카로운 눈만큼 냉철한 구석이 있었다. 어느새 놀란 마음을 전부 추스른 것으로 보였다. 평소 무뚝뚝한 태도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사미르는 여전히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민망하고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긴장한 채로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난감해하는 모습이었다. 특히나 아델리나의 부츠에 묻은 혈흔을 발견했을 때 그랬다. 내심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말이 많고 떠들썩한 이전의 모습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달아난 것 같습니다.”
바츠는 강일의 차분한 목소리와 손끝을 쫓아 다리 위를 살폈다. 그의 말대로 그곳에 남아있어야 할,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놈들의 일행이 신호를 받고 나왔던, 맞은편 낡은 건물 역시도 조용했다.
“잘됐군. 다리를 공짜로 건널 수 있겠어.”
바츠는 싱겁게 말하고는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그 앞에 서서 애니밀 몇 개를 안으로 던져 넣으며 말했다.
“이건 소란에 대한 사과의 의미다.”
그때까지도 좁은 식당 안에 몸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눈만 빼꼼 세워, 입구 근처에 떨어지는 십 수 개의 애니밀과 차가운 눈으로 안을 살피는 바츠를 훔쳐보았다. 아직 마음을 놓기 어려운지, 눈치만 살필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잔뜩 굳어진 얼굴들이 하나같이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그들이 경쟁적으로 애니밀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며, 조금 전 소동을 잊길 바라는 바츠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바츠는 지금이라도 요란하게 움직이며 그들이 작은 위로라도 받길 바랐다. 하지만 반응은 오히려 엉뚱한 곳에서 먼저 일었다. 아델리나였다. 저쪽에서 기다리던 그녀가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의 등장은 겁에 질린 사람들을 더욱더 위축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는 곳을 향해 자꾸만 숨어 들어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바츠의 얼굴과 그 앞에 뿌려진 애니밀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안으로 훌쩍 몸을 날렸을 뿐이었다.
그녀는 발랄해보이기까지 하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뭔가를 찾는 눈치였는데, 이미 점찍어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헤매지 않고 곧장 가까운 바(bar)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위에 용케 온전하게 남아있는 고깃덩이를 손으로 냉큼 집어 들었는데, 돌아 나오는 그녀가 진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 고깃덩이를 이제는 울음을 그친 패토스에게로 던져주었다. 그는 아직 눈물의 얼룩이 마르지도 않았지만, 활짝 웃는 얼굴로 그것을 날름 받아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전에 있던 일들은 이미 모두 잊은 듯 보였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 같았다. 바츠가 식당 안의 사람들에게 바라는 모습이었다. 패토스는 아델리나가 던져준 고기를 게걸스럽게 처리해 버렸다. 그녀의 손아귀에 꽉 찰 정도 크기의 고기가 그에게는 고작 한입꺼리에 불과했다. 그는 몇 번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버렸다.
“이제 가자.”
바츠는 자신을 향해 웃으며 말하는 아델리나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인기척이 남아있지 않은 다리를 향했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그들은 바츠와 아델리나의 모습이 나란히 멀어지자, 그제야 식당 문 앞으로 우르르 달려들었다. 기대했던 그 익숙한 소란이었다. 사미르와 강일은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나서 자리를 떠났다. 빅도그와 아이들을 이끌고, 바츠와 아델리나의 뒤를 바짝 쫓았다. 대열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을 때에는 바츠와 아델리나를 선두로 빅도그와 아이들이 바로 뒤를 따랐고, 강일과 사미르는 제일 끝에서 걸었다. 패토스는 여전히 제멋대로 대열을 이탈했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왠지 불길한데요.”
다리 위 아르크의 상점 일부와 닮은 작은 건물 앞을 지날 때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강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꽤 걱정스런 목소리였다. 바츠는 돌아보자 그가 건물 앞에 세워진 바리케이드 곁에, 멈춰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래를 담은 가죽주머니를 쌓아올려 세워진 것이었다. 사미르도 근처에 함께 정지해 있었다. 강일이 걸음을 멈추고 건물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바츠는 걸음을 돌려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 끝에서 어딘가를 혼자서 헤매다가 이제야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는 패토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신이 나 한껏 들뜬 얼굴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보세요. 다른 건 몰라도, 귀한 탄약까지 그대로 두고 갔습니다.”
강일이 건물 앞 작은 박스를 열어보였다. 그 안에는 5.56mm 탄약 20여발을 비롯해서 두세 종의 탄약 10여발이 뒤섞여 담겨 있었는데, 모두 지금 즉시 사용가능한 것들이었다. 옆에서 사미르가 기쁨이 묻어나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리 겁을 먹었다지만 물건들을 모두 버리고 갈 정도는 아니었잖습니까?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어 있었는데 말이죠.”
바츠는 박스 안에 든 탄약을 손으로 휘저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강일의 시선을 피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철제 원형 테이블부터 간이 의자 등 생활에 필요한 집기들이 잡다하게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한 눈에도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검문 감시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마련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본거지로 달려가 작은 머리에게 이쪽 상황을 알리기 위함이 아닐까요? 놈들의 주 수입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올려주었을 것 아닙니까. 물건들을 다 내팽개치고 달아났다는 건, 다시는 오지 않을 생각이거나 반드시 돌아올 생각인 겁니다.”
사미르가 이제는 좀 진정이 되었는지, 옆에서 차분하게 한마디 거들었다. 강일처럼 걱정스런 목소리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바츠 역시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프레이와 패토스의 깜짝 등장으로 잊고 있던, 이질적인 소음이 절로 떠올랐다. 분명 둘이 연달아 나타나며 사라졌던 것이지만, 한켠에 미심쩍음으로 남아있었다. 그 조용하고 신중하면서도 긴장감이 흐르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때마침 옆을 지나는 패토스가 아니었다면 한참동안 떠올려 보았을지도 모를 만큼 불길한 느낌이었다. 패토스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흥분해서는 바츠의 옆을 시끌벅적하게 지났다. 반쯤 허공에 날아오르듯 달리는 걸음과 반복적으로 내뱉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괴음이 그로 인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가 내려설 때마다 다리가 흔들거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바츠는 애써 머리를 털어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작은 머리라는 녀석은 대체 누구지?”
“이 다리의 주인이죠. 지나는 사람들에게 통행료를 받는 녀석인데, 원래는 노상강도입니다. 강 상류 쪽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이 주변에 유명한 불한당이죠. 민스크 시티의 붉은 얼굴처럼 되고 싶어 하는 놈인데, 태생이 쓰레기인데 그렇게 될 수 있을 리가 없죠. 이 다리를 차지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곳 때문에 붉은 얼굴과 자주 충돌이 있었죠. 사람들이 불편해했으니까요. 하지만 언제부터 붉은 얼굴이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 시작하면서 놈의 소유가 된 겁니다. 주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것이 붉은 얼굴인데, 그에게서 인정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죠. 물론 착각입니다만...어쨌든 그런 놈입니다.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벌레 같은 놈이죠.”
“그가 근처에서는 제법 알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바츠는 치를 떠는 사미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가 넌더리가 나는지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알력이 다 뭡니까. 붉은 얼굴이 없다면 무법자가 될 놈입니다. 오죽하면 그가 놈에게 관심을 껐겠습니까? 항간에는...”
바츠는 사미르의 말을 듣다 말고,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앞쪽에서 빅도그와 아이들을 데리고 기다리고 있는 아델리나가 있는 곳이었다. 조금 전 옆을 지난 패토스가 그녀에게 어디에서 주워 왔는지, 겉이 부드럽고 윤기가 흐르는 작은 돌멩이를 건네고 있었다. 아델리나가 그 돌을 받아들고는 패토스의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는 함께 있던 아이들과 같이 살펴보며 즐거워했다.
“...? 저기요!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바츠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미르의 외침에 겨우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옮겼다. 어느새 강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바츠는 둘의 얼굴을 한차례 번갈아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그럼 다리를 서둘러 건너면 되겠군. 지나고 나면 상관없는 일일 테니까”
“네? 그렇긴 한데...”
바츠는 사미르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어 보였지만, 애써 무시해버리고는 자리를 옮겼다. 어차피 야인 무리 따위는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무장을 한다 해도 탄약이 조금 들어있는 소총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많은 수가 아니었다. 대부분 무기라고 부르기 민망한 물건들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접근하기도 전에 그들을 감지해낼 수 있었고, 인지하기도 전에 그들을 살해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전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바츠는 내딛는 걸음에 힘을 실어 나아갔다.
사미르와 강일은 그런 바츠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는, 상자 안의 탄약을 챙겨서 얼른 뒤를 따랐다. 둘은 온몸으로 자신감을 뿜어내는 바츠를 믿으면서도, 밀려드는 불안감을 지우기 힘들어 보였다. 둘의 목소리에 묻어나던 걱정이 이제는 눈으로까지 전염되고 있었다. 특히 사미르가 그랬다. 그는 벌써 겁을 집어먹고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강일이 옆에서 그것을 눈치 채고,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면 숨도 쉬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미르와 강일의 우려가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바츠와 일행들은 모두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오히려 분위기가 더욱 밝아지기까지 했다. 패토스로 인해서 덩달아 신이난 아델리나 때문이었다. 그녀가 중간에서 빅도그와 함께 걷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아마도 패토스가 가져온 작은 돌 때문인 것 같았다. 그 돌을 주고받으며 알 수 없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 모습이 몹시 궁금했지만 차마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앞서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그 호기심을 애써 참아내야만 했다. 사미르와 강일이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절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둘에게는 아델리나의 모습이 매우 낯설 것이 틀림없었다. 야인들과 즐겁게 웃고 떠드는 헌터. 그런 소문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실망스러울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바츠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꿋꿋이 앞만 보고 걸었다. 이상하게 속이 얹힌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아랫배가 살며시 아프고 가슴 중앙이 답답했다. 최근에 음식을 직접적으로 먹은 적이 없으니 분명한 착각이었다. 하지만 불편함으로 느껴지는 통증은 현실이었다. 아델리나의 웃음소리가 크면 클수록 더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그 통증을 이기기 위해 주먹을 꼭 쥐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제 슬슬 인내심을 시험해야할 찰나, 뒤에서 사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스크 시티는 이쪽으로 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