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76화 *
바츠는 그의 목소리에 드디어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본인의 의지로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당당하게 사미르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강을 따라 오른편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참 장난을 치던 아델리나와 아이들도 그의 목소리에 조용해졌다. 패토스는 아델리나의 눈치를 받고나서야 얌전해졌다. 사미르가 다시 말했다.
“바닥을 보시면 옛 도로의 흔적이 보이실 겁니다. 그걸 타고 상류 쪽으로 이틀 정도 간 뒤, 다시 북으로 가야 합니다.”
바츠는 그제야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 경계처럼 좌우로 선이 그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끊김 없이 이어지지 못하고, 마치 옷에 묻은 기름때처럼 띄엄띄엄 거뭇한 얼룩들이 먼지만 흩날리는 황량한 지면 위에 묻어있었다.
“그렇게 되면 괜한 시간 낭비를 하는 꼴이군.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그게 아닙니다. 사실 저희도 여기서 곧장 직진해도 됩니다. 오히려 그게 도시로 더 빨리 갈 수 있죠. 아마 적어도 4, 5일은 더 아낄 수 있을 겁니다.”
바츠의 냉정한 대답에 사미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억울한 사람처럼 하소연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더 빨리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멀리 돌아간다는 소리군. 그렇지? 그것도 며칠씩 더 소모하면서 말이야.”
바츠는 그가 우는 소리를 하기 전에 먼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강일이 그를 대신해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까 보셨지 않습니까? 작은 머리의 졸개들 말입니다. 앞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끔 구릉이나 있을 뿐이죠. 우린 저곳을 작은 머리의 사냥터라고 부릅니다. 지금 밟고 계신 그 도로를 넘은 곳부터 말입니다. 놈들이 민스크 시티로 가는 사람들을 습격하는 위험한 곳이죠. 차라리 강 상류나 하류로 2, 3일 낭비한 뒤에 다시 위로 향하며 돌아가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놈들을 최대한 피해 우회하는 겁니다.”
바츠는 아까부터 그들이 불안해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기동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거운 기계와 저항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노예를 셋이나 거느리고 있으니 그럴 만 했다. 허허벌판에서 노상강도 떼를 만나면 전부 빼앗기고 말 것이 분명했다. 짐을 빼앗기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고가의 물건부터 꽤나 많은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칼맨이었다. 노상강도를 만나면 살아남더라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놈들에게 칼맨은 약탈해야 할 먹잇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지상의 룰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바츠는 둘에게 무장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특히 다리 건너편에서 소란이 일어나기 전, 그토록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던 강일에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때의 자신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으로만 그치고 입 밖으로 꺼내지지는 않았다. 뒤늦게 이곳에서의 저항이 큰 의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구역을 가지고 나름 체계적인 모양새를 갖춘 무리를 상대로, 이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굳이 기습을 하지 않더라도 10여명 이상이 무리지어 앞에 나타나면, 저항하기도 전에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지나 고민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전에 보여주었던 강일의 모습은 그들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일환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이 측은함으로 다가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못미더워 하고 있다는 것에 분개해야 했다. 한편으로 기가 차는 일이었다. 헌터와 동행을 하면서도 고작 노상강도를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아델리나가 함께 있는데도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미 눈앞에서 놈들을 혼내주는 것을 직접 보여준 뒤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바츠는 그런 그들에게 변함없는 말투로 말했다.
“미안하지는 그럴 수는 없다. 고작 그런 놈들을 두려워해서 시간 낭비를 할 수는 없지. 여기서부터는 각자 가도록 하지.”
바츠의 대꾸에 가장 크게 반응한 것은 패토스였다. 그는 이별이라는 분위기에 생각보다 과격하게 반응했다. 외마디 고성을 길게 내뱉으며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향한 것은 아니었고, 허공에 뿌려내듯 마구 뱉어내고 있었다. 아델리나가 옆에서 등을 다독여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더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바츠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의 존재는 언젠가부터 짐이 되고 있었다. 이동 속도는 절반으로 떨어져 있었고, 쓸데없이 신경 써야 하는 일도 부쩍 늘었다. 차라리 조금은 길을 헤매더라도 아델리나와 단둘이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그럼 우리도 함께 가겠습니다.”
사미르가 쫓기듯 조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던져진 애니밀을 줍는 사람처럼 절박해 보였다. 강일이 그를 향해 고개를 살며시 가로젓는 것이 보였다. 그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빅도그와 노예들의 주인은 그가 아니라 사미르였다. 사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요하듯 부탁하자, 그는 말없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바츠는 그 모습에 기껏 시원해진 가슴이 다시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잊고 있던 복통도 다시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은근히 짜증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분풀이를 저쪽에 서있던 패토스를 흘깃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그새 진정하고는 아델리나에게 재롱을 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눈으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웃게 만들고 있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의 얼굴은 원래 그런 표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즐겁기보다는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그의 얼굴에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의미도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바라보면, 환하게 웃어주고는 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방독면 렌즈로 보이는 그녀의 눈에 즐거움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그 눈웃음이 짙어질수록 그가 더욱 탐탁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소외감과 배신감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사미르와 강일에게 패토스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갑자기 그에게서 가슴이 따끔하는 기운을 느꼈다. 순간 놀라서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였을 정도였다. 옆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사미르와 강일이 시선이 의아하게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 자신의 시선을 쫓아 패토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지, 그들의 의아한 시선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이 바라본 곳에는 패토스가 아델리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바쁜 모습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옆으로 기울였다. 눈으로 보면 거의 티가 나지 않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시야하고는 달랐다. 바츠의 시야는 고작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도 커다란 패토스의 어깨를 비켜 지나며, 그 뒤로 보이는 지평선까지 단번에 나아갔다. 물론 그곳에서도 뭔가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메마르고 음산한 분위기가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조금 전 가슴을 깊숙이 찔러온 아찔한 기분은 저 어딘가에서 넘어온 것이었고, 어젯밤 느꼈던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넘겨버렸던 기운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렇게 느껴졌다.
“왜...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사미르가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물었다. 바츠는 그에게 손으로 제지하는 듯한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아르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맵에는 자신의 위치만 표시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아델리나의 코드도 보이지 않았다.
“바츠.”
아델리나가 아르크의 눈을 들여다보던 바츠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왼쪽 팔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아르크 눈의 화면이 새카맣게 보였다. 바츠는 한차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다시 패토스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이 멍해지며 착각이었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마치 키예프 시티에서 고열로 시달릴 때 같았다.
“놈들...입니까?”
눈치 빠른 강일이 총구를 패토스 뒤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패토스가 크게 놀라 소리를 지르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자리에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또 다른 패토스가 역시나 마찬가지로 가늘고 짧은 팔로, 작고 쭈글쭈글한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미르가 순간적으로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베넬리 부인의 집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는 패토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바츠, 괜찮아?”
그 사이 아델리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걱정스런 눈으로 다가왔다. 바츠는 그런 그녀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걸며 말했다.
“별 일 아냐. 조금 피곤한 가봐. 조금 서두르자.”
“정말 괜찮아?”
바츠는 긴장감을 쉽게 풀 수는 없었지만, 집요하게 물어오는 아델리나를 보자 한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방독면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앞에서 얼굴을 요리조리 움직이는 모습이 놀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도록 만들어주었다. 무엇보다도 뒤에서 여전히 소리를 질러대는 패토스를 놔두고 눈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작은 머리의 사냥터라고 불리는 곳을 다시 걷기 시작하는 걸음이 가볍게 느껴졌을 만큼 흥이 났다. 애초부터 놈들을 껄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제는 아예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민감했던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들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놈들은 사미르와 강일이 걱정했던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좀 더 심각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합니까?”
작은 머리의 사냥터를 가로지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두 명씩 나눠 탄 낡은 비클레타 4대가 요란한 엔진 소리로 사미르의 겁에 질린 목소리를 뒤덮으며 좌우에서 나타났다. 워낙 소음이 커서 시야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이미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흉기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심한 손길은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나름 신경 쓴 노력이 엿보였으나, 어젯밤 패토스가 달려들며 휘둘렀던 그 돌도끼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대부분 금속이었기 때문에 그보다는 살상력이 더 높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나는 떠돌이들을 괴롭히는 데는 충분해 보였다. 좌우로 시선을 어지럽게 만든 뒤, 근접해서 위해를 가한다면 정신을 쏙 빼놓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무기가 없는 떠돌이들이라면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 이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크게 위축될 것 같았다. 요란한 비클레타의 소음마저도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바츠를 포함한 일행에는 단 한명의 떠돌이가 없었고, 사미르와 강일만 하더라도 저들의 목숨을 몇 개라도 빼앗을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둘의 우려는 괜한 기우였을 뿐이었다. 놈들도 그것을 아는지 접근하지는 않고 일정거리를 계속해서 유지한 채 따라오기만 했다. 덕분에 비클레타의 호의를 받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들이 따로 두었던 소총을 집어 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긴 원통형의 무기를 어깨에 올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사미르와 강일이 그토록 긴장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일이 주위에 대고 소리쳤다.
“모두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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