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78화 *
그가 칼끝을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힘으로 걸어 나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바츠는 굳이 무리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데로 해주었다. 그의 호흡에 맞춰, 모닥불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혹시 모를 돌발적인 상황을 우려해 간격을 처음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그것을 느끼는지,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조용히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낼 뿐이었다.
불길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서는 버니에투와의 체구는 패토스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가 전보다 더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뒤로 어스름하게 보이는 구릉의 언덕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만큼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시선이 가는 건 따로 있었다. 그가 거꾸로 들고 있는 붉은 검. 빠르게 찔러 들어간 칼끝을 손쉽게 막아내고 있는 그의 카니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버니에투와의 카니지는 옅은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모닥불의 열기로 두 배는 더 붉게 보였다. 전에 보았던 헤르만이나 프리샤의 카니지와 비교하면 붉다고 하기 어려웠지만, 눈으로 보일만큼 은색에서 제법 많이 벗어나 있었다. 바츠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절로 뒷걸음질이 멈춰지며 더 이상 물러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버니에투와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바츠에게 맞춰, 걸어 나오던 걸음을 미련 없이 제자리에 세웠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버니에투와를 보고 놀란 사미르의 탄성이 신호처럼 들려왔다. 버니에투와가 말했다.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만 둬.”
명령조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강일의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와 닮아있었지만 조금은 달랐다. 그의 목소리가 바닥에 깔리는 차분함이 묻어난다면, 버니에투와의 목소리는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와,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의 체격이 강일보다 훨씬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입은 턱을 들어야만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바츠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놈들은 약탈자일 뿐이야. 남의 것을 빼앗고, 훔치는 무뢰배들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끔은 그게 필요하기도 해. 그래야만 세상이 유지되지. 톱니바퀴처럼 말이야.”
버니에투와가 카니지를 쥔 팔을 밀어내듯 크게 휘둘러 바츠를 뒤로 떼어냈다. 바츠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순간 놀라 긴장을 해야 했지만, 위해를 가하려는 행동이 아님을 알고는 자세를 바로 하는 것에서 그쳤다. 그가 다시 말했다.
“게다가 그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잖아. 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까지는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놈들이 자초한 일이지. 모두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바츠는 카니지를 양손으로 쥐며 칼날을 눈앞에 세웠다. 그러자 그의 눈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 큰 몸으로 덮쳐올 기세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몸은 제자리에 머물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충동을 목소리로 그랬던 것처럼 힘껏 아래로 짓누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짓이겨진 자신의 의지를 깊은 한숨처럼 쏟아내며 말했다.
“후, 바츠.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너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다칠지도 모르지.”
그의 시선이 바츠의 얼굴을 떠나 뒤쪽 어딘가로 향했다. 여전히 날카로운 기운이 묻어나고 있는 시선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프게 느껴졌다. 마치 지난번 오데사 시티에서 칼리굴라의 건물을 빠져나올 때 보았던 스타드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둘은 무섭게 모습을 드러낸 것부터, 급속도로 기운을 짓눌러 버리는 것까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뒤쪽을 향해 있었고, 지금까지 중 가장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조심해...어둠이 밀려온다...진짜 어둠이 밀려오고 있어...지금 둘러싼 어둠은 우스울 정도야. 나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모든 것이 새카만 어둠이지. 빛조차도 삼켜지는 거대한 어둠...영혼을 앗아갈 거다..."
그가 말을 끝내고는 바츠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모닥불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송곳처럼 느껴졌다. 그는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를 눈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바츠가 알아들은 것은 고작해야 그것들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그의 눈을 통해 말해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 불분명한 것들을 그에게 되물어야 했다. 자신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들이 버니에투와와 관련이 있는 걸까? 헤르만이 오데사 시티의 주인임을 자처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지상을 돌아다니다보니, 그들에 대한 동정심이라도 생겼던 것일까? 그들에게도 가족과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그의 말대로 그건 헌터로서 그리고 집사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 어떤 것도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바츠가 아직 묻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이미 자신이 해줄 말을 전부 다 해준 것처럼 보였다. 그가 느린 뒷걸음질로 다시 어둠 속을 향해 천천히 사라져 갔다.
바츠는 멀어지는 그를 불러 세우지 못했다. 화려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붉은 카니지를 허공에 휘두른 뒤, 허리춤에 꽂아 넣는 그가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애써 그를 쫓지 않고, 몸을 돌려 세웠다. 그가 마지막에 바라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함이었다. 직접 답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강일이었다. 그는 긴장한 눈빛으로 자신의 소총을 어깨에 견착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버니에투와를 향해서 사격을 할 준비가 되어있어 보였다. 그의 다리에는 사미르의 아이들이 각각 한쪽씩 붙들고 매달려 있었다. 만약 버니에투와가 살의를 품었다면 강일은 제대로 된 사격을 하지 못한 채, 살해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사미르는 그 건너편에서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버니에투와는 패토스만큼 거대했고, 심지어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가 본 헌터 중 가장 거대하고 무서운 헌터였을지도 모른다. 패토스는 그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버니에투와와 충분히 견줄만한 체격을 갖춘 그였지만, 이렇게 돌아보니 한 없이 연약해 보였다. 그의 얼빠진 듯한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위화감을 느끼기 힘든 체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버니에투와를 상대로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버니에투와는 그를 눈 깜짝할 사이에 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헌터들이라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도 아델리나는 그것을 본 것 같았다. 그녀가 패토스에게 상냥하게 굴려는 이유가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가 매우 불쌍해 보였던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 바츠의 눈에는 오히려 그녀가 더 불쌍해보였다. 그녀는 강일만큼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자리에 서 있었다. 주위에 흐르는 불안과 긴장감이 전부 그녀에게서 나오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버니에투와의 시선이 향했던 곳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델리나.”
바츠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느린 동작으로 눈을 지그시 감으며 품에 안겨 왔다. 그녀의 몸이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작은 떨림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가 품안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츠, 기분이 이상해. 너무 불길해. 좋지 않은 일이 우릴 향해 오고 있는 것 같아. 우리 괜찮은 걸까?”
바츠는 그녀를 위로하기 힘들었다. 자신조차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버니에투와는 알 수 없는 불안을 이곳에 잔뜩 던져주고 떠났다. 도무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만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별일 아닐 거야. 버니가 우릴 멀리서 지켜보고는 걱정돼서 그런 걸 거야. 우리가 위험했던 것은 사실이었잖아. 그래서 그런 걸 거야.”
“혹시 모르니까 놈들이 오면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자. 버니가 저렇게 말하는 건 정말 오랜...아니 처음이야.”
“그래...그러자.”
바츠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대답했다. 불길한 기분을 떨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으로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불길한 기분은 날이 밝기 전에 현실이 되어서 찾아왔다. 작은 머리의 수하들로 보이는 놈들이 어두운 밤을 틈타, 바츠와 일행을 기습해 온 것이었다.
놈들은 대략 40여명 쯤 되는 적지 않은 수였다. 나름 신경을 쓴다고 온 몸에 검은 진흙까지 바르고 있었다. 놈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짙은 어둠 속에 유일한 빛이 구릉을 타고 솟구치고 있을 테니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바츠는 그들이 빛을 보고 찾아와주길 바라고 있었다. 놈들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인기척을 완벽하게 숨길 수 없었고, 자신은 물론이고 아델리나의 감각을 피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잠들지 못한 강일마저도 느낄 수 있었을 만큼 그들은 허술했다. 놈들이 가장 유리할 수 있는 기습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화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허술한 움직임만큼 볼품없는 수준의 둔기나 이기를 갖추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협하기에는 충분했지만, 최소한 바츠와 같은 헌터와 소총을 든 칼맨들에게는 아니었다.
“젠장!”
놈들의 등장은 그래도 나름 괜찮았다.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뛰어드는 그들의 모습은 떠돌이들이 겁을 집어먹고 비명을 지르기 충분했다. 그들은 그 비명에 더욱더 기세가 올라,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을 맞이한 건 겁에 질린 비명이 아니었다. 그들을 맞이한 건 밤하늘에 천둥을 만들고 불꽃을 만드는 강일의 소총이 내뱉는 고함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난감해진 자신들의 입장을 욕설로 대변해야만 했다.
강일은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그들을 향해 정확하게 사격했다. 단발로 차례차례 울려 퍼지는 총성이 달려 내려오는 그들을 하나씩 굴러 떨어지게 만들었다. 비탈을 굴러 내려온 놈들 중에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사격 솜씨는 샤오밍만큼 정확하고 신속했다. 겨우 잠들었던 아이들이 다시 일어나 그의 다리에 달라붙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에게는 큰 방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 불편한 기색이 보이기는 했지만 총구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 옆에서 사미르도 제 몫을 해주었다. 그는 강일과 다르게 연발에 가까운 사격으로 놈들을 향해 쏘아댔다. 거침없이 눌러대는 방아쇠가 그의 소총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의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놀라서 몸을 돌려 달아나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옆의 동료가 쓰러지는 것보다도, 총탄이 주위 지면을 할퀴는 소리에 더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기 바빴다. 그 사이 패토스는 모닥불에 가까이 쪼그려 앉아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낮에 보였던 의지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총성에 놀라 달아나는 놈들처럼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달려드는 놈들이 무섭다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을 덩달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그런 그가 괴로워질 상황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바로 앞에는 아델리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모습으로 놈들을 하나씩 베어 넘겼다. 그녀의 칼날을 두 번 이상 받아낼 수 있는 놈들은 없었다. 그들은 아델리나가 카니지를 휘두르는 데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져 나갔다. 그녀를 향해 달려들며 내지르는 기합소리가 그들의 유일한 저항일 정도였다.
바츠 역시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자리에서 아델리나처럼 되받아치기만 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은폐 콘솔을 사용해서 그들을 철저하게 괴롭혀주었다. 불필요하게 생각될 만큼 많은 움직임을 가져가며 아직 비탈을 내려오지도 않은 놈들까지 찾아가 목을 벴다. 중간에 있던 동료들이 별안간 쓰러져가자 놈들의 혼란은 수많은 총성이 일기 시작했을 때보다도 더 빠르게 증가했다. 달아나기 시작하는 수가 눈에 띄게 보일 정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일부는 방향을 잃고 오히려 모닥불이 피워진 쪽을 향해 달려가기까지 했다. 그쪽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탈출구가 있다고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는 건 아델리나의 카니지 뿐이었다. 그녀는 사미르와 강일이 탄창을 교체하는 순간까지도 끌어안고 싸우고 있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몸놀림이 어둠 속을 수놓는 총성처럼 번뜩였다. 그녀는 전에 보았던 것처럼 정말 날렵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놈들이 숨져가는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다. 바츠는 그 모습과 더불어 단음의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하는 아르크 눈을 내려다보며, 버니에투와가 말했던 그 어둠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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