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79화 *
“이제 끝난 건가?”
아델리나가 가까운 곳에 쓰러진 시체에 카니지를 닦아내며, 비탈을 내려오는 바츠를 향해 물었다. 바츠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줌과 동시에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다시는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겠지. 일이 더 쉬워지겠어.”
바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림잡아도 20여구가 넘는 시신들이 여기저기에 너부러져 있었다. 모닥불 주위에만 해도 10여구에 가까운 시신들이 있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아직까지도 강일에게서 떨어지지 못할 만큼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검붉은 얼룩을 뒤집어쓰고 잠든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어디하나 온전한 구석이 없었다. 저쪽에는 깨지고 터진 시신들이 즐비했고, 이쪽에는 깨끗이 잘려나간 주검들로 가득했다. 곳곳에 훼손된 신체 일부가 나뒹굴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미르와 강일마저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처참했다. 안도감보다도 거부감이 먼저였다. 그것들에 무감각한 것은 바츠와 아델리나 뿐이었다. 그녀가 아래쪽을 향해 눈치를 주며 말했다.
“나처럼 좀 꺼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다가 언젠가 정작 필요할 때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게. 지난번에 꽤 무리하게 사용해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는데, 며칠이 지나서 괜찮을 줄 알았거든. 생각보다 배터리가 채워지는 게 느리네. 아마 내건 오래되어서 그럴 거야.”
아델리나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멋대로 바츠의 왼팔을 들어 올리더니, 낡은 아르크의 눈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살펴보았다. 바츠는 그녀 덕분에 다시 보게 되는 자신의 아르크 눈이 새삼 낡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것과 생김새도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모델인 듯 했다. 바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다행이지?”
“응?”
“우려했던 것보다 별거 아니었잖아. 아마 이정도 피해라면 놈들도 꽤 많은 전력을 소모했을 거라고. 어쩌면 더 이상 여력이 없을지도 몰라.”
“그러게. 지금쯤이면 당황하고 있을 것 같다.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계속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금 전처럼 무모하게 혼자서 그러지 말고. 중화기를 가진 녀석들이었다고. 언제 또 그런 무기를 꺼내들지 몰라. 지상에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이 많잖아.”
바츠는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방독면 위에 손을 가져다댄 것이었다. 거칠고 두꺼운 고무였다. 촉감이 겨우 전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체온을 느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감고는, 고개를 끄덕여 손바닥에 볼을 문질러왔다.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일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도 모닥불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패토스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바보처럼 끌어안으며 실없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을 지도 몰랐다. 그가 신음에 가까운 이상한 소리로 주의를 끈 덕분에 가까스로 참아낼 수 있었다.
아델리나가 막 닦아낸 유리잔 같은 눈웃음을 보여주고는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의 한쪽 어깨를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는데,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확인하고는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길은 자신보다 두 배는 더 큰, 거대한 사내를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두 눈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러움으로 가득한 거구가 마치 2살 된 아이처럼 그녀를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전부터 봐온 모습이라서 새롭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에 바츠의 마음이 매번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웃어주는 그녀의 미소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바로 출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더 머물기는 힘들잖습니까. 한두 시간만 지나면 환해질 겁니다.”
그때 강일이 다가와 말했다. 그는 용케 아이들을 떼어놓고는, 주변에 즐비한 수많은 시체들을 향해 슬쩍 시선으로 눈치를 주었다. 아이들은 저쪽에서 사미르와 함께 짐을 꾸리고 있었다. 바츠는 그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한번 둘러본 후에,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심각하게 훼손된 시신들을 일일이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힘들었고, 겨우 치워낸다 하더라도 이미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혈흔 위에 눕는 건 매우 껄끄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옮기는 편이 이로웠다. 무려 셋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강제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의 말대로 조금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정말로 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유의 싸늘한 기운과 바람이 슬슬 거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고, 평온함을 줄만큼 찬란하지는 않지만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의 실루엣도 보이기 시작했다. 강일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둘러 이동한 바츠는 패토스가 두 번째 굶주림을 호소할 쯤, 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민스크 시티가 아닌 오데사 시티보다 좀 더 작은 크기의 도시였다.
“전에는 이보다 더 큰 도시였을 겁니다. 저쪽에 흐르는 강의 수위가 높아지며 도시 3분의 1을 집어 삼킨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미르가 이곳을 유령 도시라고 소개했다. 그는 예전에 이곳에는 6, 70여명의 사람들이 도시 오른편을 따라 흐르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상대로 약탈이나 장사를 통해 생계를 이어갔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전부 언젠가부터 돌기 시작한 괴물이 나온다는 소문 때문이라고 했다. 그 소문으로 인해서 이곳을 통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머물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강에서 괴물이 튀어나왔다고 하더군요. 변종 크루엘라로 인해서 새로운 헤러티커가 탄생했다는 소문이었죠. 그게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소문이 괜히 도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 주변에서 크루엘라를 마지막으로 본 건, 수십 년도 전이라고 했습니다. 뭐, 정말 크루엘라가 다시 창궐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죠. 지상에 물들은 대부분 더럽지 않습니까. 최대한 왼쪽으로 우회해서 지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츠는 사미르의 제안을 군소리 없이 따랐다. 작은 머리의 사냥터를 지날 때, 고집을 부렸던 것이 괜히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지상에 대해서 그래도 조금 더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조심하자고 주의를 당부하는 아델리나의 말도 한몫 거들었다. 그녀의 조심성 짙은 목소리는 위축되었다고 느낄 만큼 신중하게 해주었다.
바츠는 곧장 나아가던 방향을 왼편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 반원을 그리며 이동할 심산이었다.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관심을 돌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바로 발밑에 불과했다. 발밑으로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반듯하게 난 도로가 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굴곡이 전혀 없는 완전한 직선의 도로였다. 그 길이가 최소 3km는 되어보였다. 다른 곳처럼 뭔가를 위에 덮어씌워 다지지 않고, 지면을 그대로 단단하게 다듬어 틀을 만들어놓은 것처럼 다져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미르가 그런 바츠의 시선을 발견하고는 살짝 흥이 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에는 하늘을 나는 기계가 있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그것들이 지나던 도로랍니다. 희한하죠? 하늘을 나는 기계들인데 그냥 날아다니면 될 것을, 지상에 도로가 있다니 말입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보시면 헛웃음만 나오실 겁니다. 뾰족한 강철 기계에 날개와 바퀴를 달아놓았는데, 한눈에도 땅이나 굴러다녔을 것 같은 모습입니다. 솔직히 굴러다니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저쪽에 가면 있습니다.”
바츠는 사미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예전에 몇 번 보았던 창고 건물보다도 훨씬 큰 돔 형태의 건물 몇 채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존에 가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면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바츠는 특별히 관심이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그를 따라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안에서 사미르의 말대로 전체적으로 뾰족한 느낌의 강철 조형물이 떡 하니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 뼈대만 겨우 남아 흉물스러웠는데, 식사 시간이 지난 파이처럼 인위적으로 부분부분을 떼어간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본래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면 적어도 작은 집 채만한 크기에 나름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 같았다.
“여기와 여기에 바퀴가 달려 있었습니다. 전에는 왔을 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네요.”
사미르가 조형물 밑으로 몸을 접어 기어들어가더니, 몸통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얇은 강철 프레임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가리키며 말했다. 창고의 입구 쪽을 향한 뾰족한 부위에 하나 그리고 날개였을 것으로 보이는 중간에 넓적한 모양으로 좌우로 삐져나간 부위 근처에 각각 한 개씩 위치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서 아쉬운지 몇 번이나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 같다고 느껴, 조금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정작 그 강철 조형물보다는 거대한 창고 안쪽에 그려진 커다란 글자가 더 눈에 들어왔다. 붉은 염료로 그려진 문구였는데, 그 위에는 검은색 十자 모양의 그림이 있었다.
‘악을 몰아내고, 세상을 정화 하리! 나에게 광명을!’
바츠는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말 같았다. 정확히는 처음 듣는 말이 맞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단어 때문에 익숙하게 느껴졌다.
“정화라...”
“엑소시스트들이 다녀간 모양이군요. 놈들이라면 괴물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녀석들이니까요. 헤러티커를 두려워하지 않는 녀석들은 헌터 말고는 그 녀석들이 유일할 겁니다. 놈들은 헤러티커는 물론이고 강도 등,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두를 상대로 정화하겠다며 떠들어대거든요.”
바츠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사미르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밖으로 기어 나와 그 글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복잡한 심경이 묻어나는 눈으로 그 글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분명 옳은 일을 하는 무리였는데, 그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때마침 불러오는 아델리나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녀가 밖에서 주위를 살펴보던 중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네가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없었잖아, 그렇지?”
바츠가 밖으로 나오자, 아델리나가 창고 너머 먼 곳을 향해 가리켰다. 굳이 그녀가 가리키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눈에 띄는 것이었다. 멀리 보이는 한 건물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 말대로 넓은 도로를 건너서 이곳으로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몇 사람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하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사미르가 물었다.
“우린 우리 갈 길을 가면 돼. 저들은 신경 쓰지 말자고.”
“그런데 저쪽도 우리를 발견한 것 같군요.”
바츠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뒤에 있던 강일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단조로운 움직임을 보이던 그들이 갑자기 분주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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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좀 더 성실하게 연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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