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80화 (180/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80화 *

“노상강도들일까요?”

사미르의 목소리가 심각했다. 벌써부터 겁이 나는 듯 했다. 이미 앞서 고작 하루 사이에 치른 수난들로, 이제는 무슨 일만 생기면 불안한 듯 보였다. 경계심을 넘어 두려움에 너무도 쉽게 사로잡히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외면한 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들의 동향이나 살피는데 주력했다. 그러자 강일이 입을 열었다.

“노상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상태가 양호한 방독면을 다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헌터들과 흡사한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매우 깨끗한 편이고요. 특별히 경련이나 마비 증세도 보이지 않습니다. 식인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죠. 전부 3명입니다. 둘은 남자고 하나는 여잡니다. 위협이 될 만한 것으로는...음...손바닥 길이의 말뚝 두 개와 팔뚝 길이의 몽둥이가 보이네요. 말뚝은 그 끝이 상당히 날카롭습니다. 살갗을 꿰뚫는데 안성맞춤으로 보입니다. 몽둥이는  생긴 것이 매우 특이하고요. 뭉툭한 모양이긴 한데, 묘한 위치에 뿔처럼 튀어나온 손잡이가 하나 더 있습니다. 꼭 기관의 파이프를 잘라낸 듯한 모양이네요.”

바츠는 그의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자, 어느 틈에 작은 스코프를 자신의 소총에 장착하고는, 그것을 통해 저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미르와 강일의 상단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부유한 대상(隊商)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스코프는 아르크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 중 하나였다. 값은 둘째 치고 그 희소성은 헌터들의 장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물건이었다.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알아차려야 했던 문제였다. 빅도그라고 불리는 기계를 둘이나 운영하고 있었고, 비록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헌터의 카니지를 사고 팔 정도 규모의 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노예도 셋이나 거느리고 있었고, 심지어 지난번 작은 머리의 수하들에게 당한 봉변으로 최소 절반에 가까운 물품을 잃었는데도 따로 크게 분개하지 않았었다. 기껏해야 약간의 서운함과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을 뿐이었다. 아무리 긴급을 요하는 자리였고 그 대상이 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지만, 비용이 결코 적은 액수임이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들에게 잃은 물건 외에도, 최소 그만한 여유가 다른 곳에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 입은 피해가 심각한 정도가 아닌 것이다. 바츠는 이제야 그런 사실을 인식하는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러자 강일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는 포기한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엑소시스트들 같습니다.”

바츠는 그의 말에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그들을 찾아보았다. 분주하던 그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잔잔하면서도 자신감이 엿보이는 말투였다. 작은 머리의 사냥터를 지날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였는데, 지금은 평소처럼 단호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먼저 선제공격을 할까요? 놈들의 몸놀림도 헌터 못지않게 날렵합니다. 거리가 좁혀지면 사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미리 겁이라도 주는 것이 우리에게 이로울...”

“일단은 지켜보는 걸로 하도록 하지.”

바츠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답했다. 사미르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지만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그들이 자신보다 지상에 대해서 해박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 만났던 레이븐과 캣에 대한 기억 덕분이었다. 그들이 했던 말이 정확히 떠올랐다. 그들이 했던 말이 사실이고, 강일이 저들을 제대로 알아보았다면 결코 이곳에서는 불필요한 말썽이 생길 까닭이 없었다. 그들은 분명 그날 밤, 엑소시스트들에게 있어서 헌터는 존경의 대상이라는 말을 했었다. 바츠는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눈치가 빠른 강일은 순순히 바츠의 뜻을 따랐다. 그는 단번에 바츠가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듯 보였다. 그에 반해 사미르는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애써 마음을 짓누른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상대가 헌터가 아닌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벌써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중이 산산조각 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바츠의 판단이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들 중, 가장 앞에 선 사내가 바츠에게 말했다.

“짐작한대로군요. 헌터들은 그 특유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죠. 수북한 눈 위를 지나는 바람 같은 걸음 말입니다. 숙련된다면 헤러티커도 찾기 힘들 만큼 위대한 기술이죠.”

그의 말투에 정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자랑하는 부모처럼 한껏 달아올라 감격에 젖은 듯한 분위기였다. 뒤쪽에 있던 아델리나를 향해서 별도로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을 정도였다. 그는 한눈에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친절한 목소리보다도 그들의 차림새에 더욱더 눈이 갔다. 그들은 앞에 선 사내를 중심으로,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뒤쪽에 좌우로 간격을 맞춰 대열을 만들고 있었다. 꼭 미사에서 검술 훈련하기 전, 줄을 맞춰 정렬했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헌터들처럼 검은색 옷을 모두가 갖춰 입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생김새가 너무도 똑같아 보였다. 정말 또 다른 헌터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다른 점이라고는 가장 앞에 선 그의 벨트가 다른 두 사람과 다르게 보라색이라는 점뿐이었다. 그가 말했다.

“음, 저희를 처음 보신 모양이시군요. 맞아주시기에 잘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냥 이야기로만 들어보셨던 것이겠죠? 뭐, 어쨌든 이건 우리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그가 시선에 순간적으로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고는 서둘러 감춘 뒤, 자신의 보라색 벨트를 슬쩍 보여주었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헌터들의 것과 흡사하게, 서너 개의 수납할 수 있는 주머니가 달려있어서 여러모로 편리해 보이는 벨트였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일리디우스입니다. 민스크 시티를 중심으로 동쪽과 북쪽의 전도를 맡고 있죠. 이쪽은 형제(brother)인 로가토이고, 이쪽은 자매(sister)인 보나입니다. 가까이에서 절 돕는 소중한 조력자들이죠.”

“그러니까 당신들이 엑소시스트라는 소리입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사미르가 물었다. 그러자 일리디우스가 그를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방독면의 렌즈 밖으로 보일 정도로 진한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시선은 그가 아닌 바츠를 향해 다시 옮겼다.

“그렇습니다. 헌터 분들과 함께 세상을 정화하는데 앞장서고 있죠. 세상은 온갖 악이 넘쳐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심판할 것입니다.”

“심판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사미르가 잔뜩 긴장한 눈으로 다시 묻자, 일리디우스가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당신에게 대답해야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요. 당신에게서는 우리에 대한 불신이 느껴지거든요.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죠.”

일리디우스의 시선은 여전히 바츠에게로 향해 있었다. 말을 하는 중간 중간 뒤쪽을 한 번씩 다녀왔을 뿐이었다. 아마도 아델리나를 살펴본 것 같았다. 그의 친절은 오로지 바츠와 아델리나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추기는 하지만 다정함이 훨씬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꼭 레나타처럼 특정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상대조차 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사미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손으로 눈치를 주며 가로막고는, 바츠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늘어놓았다.

“혹시 이곳을 지나는 길이시라면 오늘은 저희와 함께 보내시죠. 때마침 프레이 한 마리를 사냥했던 터라,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오염이 없으니, 잠시 방독면을 벗어두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먼 길을 가실 텐데, 저희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시며 푹 쉬시도록 하십시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이틀을 쉬지 않고 걸어야 하니까요.”

바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완전히 구부러진 그의 눈웃음이 왠지 모르게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거짓 없는 순수한 웃음이라는 것이 전해지면서도 알 수 없는 거부감으로 절로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사미르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껴들었다. 약간 조급해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도 함께 해도 되는 겁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칼맨이라고요. 당신들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죠.”

“오, 당신들은 칼맨이었습니까? 우린 칼맨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칼맨은 사람들에게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치는 존재들이죠. 게다가 지금은 헌터 분들과 동행이 아닙니까? 아마도 말이죠. 그럼 대환영입니다.”

그는 이번에도 사미르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대꾸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바츠에게 하룻밤을 함께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여차하면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고 바짓가랑이라도 붙들 심산으로 느껴졌다.

“잠시나마 함께 해주시며 우리 형제와 자매에게 귀감을 보여주십시오. 함께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저는 물론이고 우리 형제와 자매에게 그 위대한 단호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바츠는 그가 이토록 절실하게 애원하자, 쉽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진즉에 평소대로 냉정하게 한마디 내뱉었으면 되었을 것을, 괜한 것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곤란해지고 말았다. 그 난간함 심정을 눈에 담아, 아델리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 역시도 별로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는 듯 했다. 떨떠름한 기색을 애써 삼킬 뿐이었다.

“그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헌터들의 하해와 같은 자비로움은 불같은 단호함과 함께 항상 우리를 감격스럽게 합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저기 보이는 건물이 지금 저희가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그가 몸을 돌려세우며, 조금 전 그들이 서성이던 건물을 향해 가리켰다. 바츠가 지금까지 본 건물 중 가장 독특한 형태를 한 건물이었다. 뭔가 보는 것만으로도 고즈넉함이 느껴지고, 경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상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상에는 오로지 차갑고 흉물스럽고 어두운 것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색다르고 흥미로운 것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주 오래 전에는 과수원을 운영했던 건물이었답니다. 열매를 얻기 위한 공간 말입니다. 누군가는 이곳을 이베의 사원이라고 하던데, 지금은 그저 낡은 건물일 뿐이죠. 사원이 뭔지 아십니까? 경외로운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곳을 말하는 겁니다. 예배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겁니다. 그분께서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가 약간 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지금 향하고 있는 건물에 대해서 잘 아는 모양이었다. 자신 있는 말투로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조금씩 주제를 벗어나더니, 나중에는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그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그분에 대해서 갖가지 미사어구로 찬양을 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모르는 듯 보였다. 오로지 그의 위대함만 칭송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나중에는 황량한 지상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고, 심지어는 그의 신념에 대해서도 들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파하려고 노력했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자칫 짜증이 일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조용히 다 들어주었다. 나름대로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헌터들의 하소연을 듣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의 말들은 대체로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대답하기 꺼려졌을 뿐만 아니라 듣기에도 거북했다. 언젠가 부터는 그의 말을 듣는 척만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을 거슬리는 것은 있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그랬던 것일지도 몰랐다. 옆에서 그를 따르는 동료 둘이 이따금씩 넣는 추임새가 있었는데, 바로 그 추임새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일리디우스가 힘을 준 말끝마다 그 추임새를 넣으며 분위기를 돋우고는 했는데, 왠지 모르게 매우 기분이 나쁜 것이었다. 녹음된 것처럼 반복적으로 계속되었다.

“성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악을 행한 자는 반드시 멸하고, 선을 행한 자 반드시 축복받으리라고 말이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앞에 내용은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놓치지 않고 외쳤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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