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81화 (181/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81화 *

바츠는 그로인해 생겨나는 염증을 이겨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들의 그 추임새가 달아나려는 자신의 관심에, 일리디우스가 하는 말을 강제로 구겨 넣으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꼭 아르크의 폐기물 처리장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곳의 악취가 레벨1로 흘러드는 것처럼, 그들의 외침이 머릿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 만큼 고약한 냄새가 느껴졌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전력으로 달려온 것처럼 기진맥진해졌을 정도였다. 정신이 멍하고 온몸에는 그들의 추임새가 단단히 배있었다. 그 앞에서 더 이상 지론을 이어가지 않는 일리디우스를 따라 그들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지만, 그들의 추임새는 귓가에 계속해서 울림으로 남았다.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허리춤의 카니지를 뽑아들고 싶은 충동을 느껴야 했다. 가까스로 참아낸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지 일리디우스가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걸음을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전처럼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이곳에 온지는 꽤 됐습니다. 벌써 몇 해가 지났군요. 그동안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정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미처 이곳을 꾸밀 기회가 없었죠. 누추하지만 부디 저희의 부끄러움을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바츠는 그에게 무감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지상에서 융숭한 대접을 바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대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어리석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심드렁하게 반응한 이유는, 이미 그들의 조잘거림에 지쳐버린 심신 때문이었다. 이렇게 쉬고 싶다고 느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처음인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지나친 호의에 곤란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키예프 시티에서도 이토록 절실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일리디우스가 한 발 먼저 걸음을 옮기며 바츠를 안으로 안내했다. 바츠는 아델리나와 함께 그의 뒤를 따랐고, 로가토와 보나가 그 뒤를 이었다. 남은 일행들은 그 다음이었다. 사미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크기로 뭔가 불만을 토로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노골적으로 홀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대한 불평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바츠 역시도 그의 투정에 따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바짝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는 아델리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츠, 봤어?”

바츠는 그녀의 두루뭉술한 물음에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분명 건물 앞에 잠깐 멈춰 섰을 때, 반대쪽 뒤편으로 있던 것들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바츠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을 만큼 매우 인상적인 것들이었다. 얼핏 살펴본 것이었는데도, 신경이 곤두선 채로 한참동안 들어야 했던 그들의 추임새만큼이나 뇌리에 남았다.

“묘지 맞지?”

바츠는 다시 속삭여 묻는 그녀의 물음에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200여개나 되는 무덤이 모여 있는 거대한 묘지였다. 모래알처럼 빼곡하게 늘어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무덤마다 각종 버려진 자재들로 만들어진, 十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조금 전 커다란 창고에서 글귀와 함께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모양이 건물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입구와 맞은편에 있는 벽에 내걸려, 안으로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그 무게만도 상당해보였다. 마찬가지로 버려진 자재들을 이용해서 만들어 둔 것이었다. 썩은 나무 조각, 녹슨 철근, 낡은 고무까지 다양한 고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뼈대를 먼저 걸어 올리고 난 뒤, 덮어씌우듯 하나하나 쌓아 만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오랫동안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화덕이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벽을 향해 집기였던 것으로 보이는 낡은 폐자재들이 반원을 그리며 수북이 놓여있었다. 그 높이가 1미터쯤 됐다. 일리디우스가 바츠와 일행을 그쪽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덫에 걸려있는 프레이를 금방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바츠와 일행들을 화덕 가까이로 안내하고는, 로가토와 보나를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바츠, 이 사람들이 다 저지른 걸까?”

그들이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아델리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녀는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복잡한 심경인 듯 보였다. 타다만 나뭇가지로 불씨만 겨우 남아있는 화덕 안을 심심하게 들쑤셨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붉은 점들이 뜨겁게 피어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바츠는 그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어. 아마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하나씩 묻은 것 같아. 전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 아멘이라고 외치는 소리도 정말 끔찍해.”

“그것도 그렇지만 난 묻고 싶은 게 있어.”

바츠는 잿더미를 들쑤시던 나뭇가지를 던져놓고 몸서리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옮겨, 그 사이 저쪽 구석으로 강일과 함께 빅도그를 세워두러 다녀오는 사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츠가 느닷없이 바라보자 반대쪽 벽을 등지고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엉거주춤하며 행동을 멈췄다. 자신도 모르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눈동자가 바츠와 아델리나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물었다.

“왜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한 거지? 저들이 별로 내키지 않잖아.”

사미르가 때마침 자신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강일을 따라, 마저 엉덩이를 바닥으로 붙이며 대답했다. 아이들은 강일과 아델리나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패토스는 뒤늦게 달려와 아이들 사이를 굳이 비집고 들어왔다.

“저놈들은 미치광이라고요. 말하는 걸 보셨잖습니까. 우릴 못 알아보는 게 말이 됩니까? 저렇게 커다란 기계가 바로 옆에 있는데 말입니다. 그 음흉한 눈이 심상치 않았다고요. 아마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놈들이 가지러 간 건 프레이가 아니라 우리들의 목이었을 겁니다.”

바츠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려다말고 질문을 도로 삼켰다. 그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서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 사미르의 본능을 칭찬했을 뿐이었다. 대신 고개를 돌려, 아이들의 몸을 슬쩍슬쩍 밀치며 장난을 치고 있는 패토스를 살폈다. 그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태평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조차도 이질적인 분위기에 살짝 겁을 먹고 있었지만, 그 만큼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며칠 함께 지냈다고 더욱 긴장감이 풀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은 물론이고 당장 어젯밤에 있었던 일도 모두 잊은 듯 보였다. 때마침 일리디우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에게 어떤 질문을 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만족스러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일리디우스가 허벅지에 고정되어 있던 말뚝 하나를 꺼내, 능숙한 솜씨로 프레이의 가죽을 벗겼다. 그 사이 로가토가 화덕의 불씨를 다시 되살렸고, 보나는 그 옆에서 이상한 주문을 외었다.

“오늘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아멘.”

워낙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해서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끝만큼은 확실하게 들렸다. 그녀는 물론이고 일리디우스와 로가토마저도 동시에 외쳤기 때문이었다. 뭔가 그들끼리 만의 약속인 듯 했다.

“방독면을 벗어도 될 겁니다. 여긴 감염이 없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무사하다는 것이 그 증거죠. 이곳은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안전한 곳입니다.”

일리디우스가 프레이를 통째로 화덕 위에 올리고는, 바츠 옆에 자리하며 방독면을 벗어 제쳤다. 로가토와 보나는 그 반대쪽으로 나란히 자리했다. 둘 역시 방독면을 벗었고, 셋은 이번에도 역시 동시에 같은 행동을 했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는, 정면으로 보이는 十모양의 대형 조형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들은 말 한마디 한마디는 물론이고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괴이했다. 그때, 바츠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스쳐 지났다. 레이븐이 했던 말이었다.

“저게 십자가라는 건가?”

“오, 알고 계시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마 너무 많은 여행을 다니시다보니, 잠시 우리를 잊으셨던 걸 겁니다. 맞습니다. 저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위해 만드신 겁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오로지 믿음뿐이니까요. 우리가 이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지 시험하시려는 겁니다.”

그가 지금까지 중 가장 밝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을 마치고는, 혀를 쭉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혀 위에는 검은색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린 그 믿음을 스스로 확인하고는 합니다. 그 시련을 견뎌내야만 이것을 얻을 수 있죠. 그 시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의 믿음은 강해질 것이고, 그 시련을 이겨내면 이겨낼수록 우린보다 더 강한 믿음을 얻게 될 겁니다.”

그가 자신의 보라색 벨트를 손가락으로 한번 당겨 보여주었다. 색이 독특할 뿐이지,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납용 주머니가 달려있는 벨트는 흔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벨트에마저도 강한 자부심을 보이고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는 ‘아멘’을 외치는 두 사람 때문인 것 같았다. 둘은 그의 벨트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바츠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역시나 거부감을 느껴야 했다.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일어나는 묘한 기분이었다. 그 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대체 뭐지?”

“아, 이것 말입니까? 이것이야 말로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세상의 정화에 앞장서죠.”

바츠의 물음에 그가 눈을 반짝이며, 프레이의 가죽을 벗겨낸 말뚝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 길이의 지름 5cm의 쇠말뚝이었는데, 상당히 정교하게 깎여있는 물건이었다. 사람이 직접 깎아서 만들었다면 정말 많은 공이 필요로 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양손으로 말아 쥐고는 허공에 대고 사용법을 보여주었다. 자창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보였다. 프레이의 가죽을 손쉽게 벗긴 걸로 봐서는,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가 말뚝을 다시 집어넣고는 물었다.

“헌터께서는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남쪽.”

“남쪽? 그럼 U13 아르크에서 오셨겠군요. 그럼 혹시 오시면서 어젯밤 소음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낮에는 엄청난 굉음이 있었는데, 그게 나중이 되니 요란하게 변하더군요. 한밤중에 말입니다. 바람 소리가 방해하기는 했지만, 많은 양의 비명도 있었죠.”

바츠는 그가 말하는 소음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지만, 저쪽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사미르가 얼른 나서며 대신 말했다.

“작은 머리의 수하들이 우리를 습격한 겁니다. 겁도 없이 말이죠.”

“어젯밤 소음의 원인이 헌터셨습니까?”

그는 사미르가 대답했는데도 불구하고 바츠와 아델리나를 번갈아 둘러보며 되물었다. 대답을 듣기 위한 물음은 아니었다. 그가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작은 머리라면 미풍의 칼날을 말하는 거군요. 그가 감히 두 분들을 위협했단 말입니까?”

“네, 놈들 때문에 손톱 수천 개를 손해 봐야 했죠. 물론 놈들은 그 이상 손해를 봤을 겁니다. 적어도 20명 이상이 죽었으니까요. 이 친구도 제몫을 했고요. 두 분께서는 우리를 민스크로 안전하게 데려다 주시고는 남은 놈들을 마저 처리하시겠다고 했죠.”

사미르가 강일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두어 번 내리치며, 조금 흥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특히 안전이라는 단어에 의도적으로 힘이 실어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미르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슬쩍 미소를 걸고는 잠깐 시선이 다녀간 것이 고작이었다. 그 꺼림칙한 미소였다. 그가 다시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미르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기쁨을 넘어 황홀함이 묻어나기 시작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말끝만큼은 정반대로 힘을 잃고 흐려졌다.

“믿을 수가 없군요. 역시 헌터 분들은 대단하시군요. 그럼 그렇죠. 그 자가 어리석은 짓을 한 겁니다. 그런데...”

바츠는 활짝 웃는 그가 말끝을 흐리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웃고는 하던 헤르만과는 비교하기 어려웠지만, 그에 못지않은 광기가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틀림없었다. 그의 얼굴에 지독한 살의가 지나갔다. 그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놈들을 처리하는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