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82화 (182/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82화 *

바츠는 그 이유를 덤덤하면서도 짧게 따지듯 물었다. 고작 한마디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프레이 고기의 기름이 불길에 틱틱 거리며 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끔 화덕으로 기름이 흘러내리기라도 하면, 터지듯 폭발하며 불꽃을 주변에 흩날리기도 했다. 바츠의 차가운 시선이 그 옆을 달려 일리디우스의 기묘한 표정에 정면으로 꽂혔다. 그가 입가의 미소를 더욱더 진하게 만들며 대답했다.

“미풍의 칼날은 저 아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자죠. 더불어 그 바로 옆에 있는 다리와 함께 그 너머의 광야를 주름잡은 실력가입니다. 그의 허락이 없으면 북쪽으로 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그게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필요와 가치를 찾는 법이니까요. 문제는 그 자가 그런 필연성을 악의적으로 이용해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이죠. 그게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이미 그의 수하들을 만나보셔서 아실 겁니다. 불경스러운 자들이죠.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을 겁주고 살해해서 이득을 취하고 있죠. 비클레타를 이용한 강습은 그들의 상징이 된지 오래입니다. 그가 미풍의 칼날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폄하하기 위해 작은 머리라는 이름을 더 많이 부릅니다. 그가 딱 질색하는 이름입니다. 그의 아래 머리가 너무 작아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니까요. 가랑이 사이에 있는 머리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민스크 시티의 붉은 얼굴조차도 한 발 물러나 줄 정도입니다. 물론 그가 미풍의 칼날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껄끄럽기 때문일 뿐이죠. 그는 대화가 통화지 않을 정도로 외곬입니다. 정확히는 고집불통이죠. 붉은 얼굴이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습니다. 전 이곳에서 그 자를 벌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죠. 그의 삶을 문제 삼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말 한대로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와 가치로 인한 다양성일 뿐이니까요. 지상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들의 삶에 대한 것으로는 심판하기에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그랬다가는 억지가 되겠죠. 하지만 오늘 드디어 그들을 응징할 분명한 명분이 생겼습니다. 감히 헌터를 습격하다니 말입니다. 제게 조금 전처럼 간단하게 한마디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제가 그 괜한 수고를 덜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츠는 그가 원하는 대답대신 냉담하게 말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군. 그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야. 내가 하려던 일이지.”

“압니다. 제가 어찌 고명한 헌터의 뜻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간청하는 겁니다. 제가 당신을 대신해서 주님의 뜻을 따라 그자들을 명확하게 심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제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일리디우스가 갑자기 바츠를 향해 바닥에 이마를 대고 넙죽 엎드렸다. 정말 간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굽은 등이 엄숙해보이기까지 했다. 그 뒤에서 로가토와 보나 역시 조용히 고개 숙여 그에게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츠는 밖에서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곤란함을 느꼈다. 이들은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쓴웃음이 절로 났지만 애써 참아내며 그가 원하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아야 했다. 절실해 보이는 그를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동시에 그들에 대한 훈육을 꼭 직접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하더라도 그 결과만 같다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 대한 불쾌한 감정은 이미 어젯밤 그들을 대량으로 살해하면서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좋을 대로 해.”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걸고 그 믿음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일리디우스가 몸을 일으키며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미소가 더욱더 진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가 정말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강일이 입을 열었다. 그도 같은 생각인지, 목소리에 의아함이 잔뜩 묻어났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그리 곱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군요. 이미 그자들은 오랫동안 무고한 떠돌이들을 희롱하고 갈취해 왔습니다. 가끔은 이번처럼 칼맨을 상대로도 악행을 저지르고는 했죠. 그런데 지금까지는 내내 방관만 하다가 이제 와서 그들을 응징하겠다는 겁니까?”

“쓸모없는 질문을 하는군요. 당신들이 어찌 우리의 원대한 뜻을 알겠습니까?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삶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 모두가 벌을 받아야 하죠. 물론 그게 우리들이 가진 원죄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아주 자비로운 분이시죠. 우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유예기간을 두신 겁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의 삶이죠. 그들에게도 공정하게 그 기회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니까 말입니다.”

일리디우스가 강일을 쳐다보지도 않고 조금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에 강일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듯한 감정이 묻어났다. 끝까지 말을 잇는 동안 친절함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바츠에게 고정된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바츠는 그가 강일에게 말을 건네는 내내, 자신을 향해서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워낙 작은 움직임이어서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 의도를 알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바츠는 그가 자신에게서 공감과 동의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강일이 그런 그에게 다시 말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들이 하는 짓을 방금 당신 입으로 말하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설마 그새 잊은 것은 아닙니까?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정말 있는지도 모르는 그 빌어먹을 기회에는 관심이 없단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정말 어리석군요. 당신을 나무라지는 않겠습니다.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무수히도 많죠. 그래서 그분의 뜻을 받드는 우리들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있는 이유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그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겁니다. 당신을 포함해서 말이죠. 무지한 자들은 당신이 말 한대로 그 기회를 모르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말하는 정화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단지 지금 우리에게는 미풍의 칼날에게 정화를 행할, 마땅한 명분이 없었을 뿐이죠. 아무리 우리가 그분의 종이라지만, 모든 것을 우리 뜻대로 한다면 그것은 정화가 아닌 폭력일 뿐입니다. 그분의 뜻을 반하는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린 지금 그 명분을 오늘 이 자리에서 얻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당신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모든 게 주님을 믿지 않아서 비롯된 겁니다. 당신들도 그분을 믿으면 됩니다. 그럼 우리를 이해하게 될 겁니다.”

일리디우스의 대답에 강일이 입을 닫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을 잃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가 다시 말했다. 전보다는 더 단호해진 목소리였다. 일리디우스에 대한 혐오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당신들은 이미 그 폭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군요. 자신들이 필요에 따라 입맛에 맞는 명목을 찾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까? 공정함이나 일관성은 전혀 없이, 오직 당신들이 내킬 때 필요에 따라서 말입니다. 갑자기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들은 언제라도 그들을 응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죠. 난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겁니다. 그들을 응징하려는 이유가 고작 헌터들을 위협했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무고한 떠돌이들이 희생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단이다!”

강일이 말을 마치자, 옆에서 지켜보던 로가토와 보나가 동시에 그를 향해 외쳤다. 거짓말쟁이에게 면박을 주는 것처럼, 크게 나무라며 몰아붙이려는 모습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내뱉으며 강일을 당황시켰다. 일리디우스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어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강일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강한 어조로 말했다.

“믿으십시오. 믿어야만 합니다.

그가 바츠와 아델리나 외에 다른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 둘을 제외하고는 기껏해야 곁눈질로만 바라보고는 했다. 그것도 매우 짧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방독면 렌즈 안으로 뚫고 들어갈 것처럼 보일만큼 강렬한 눈빛이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그려져 있었지만, 결코 웃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했다.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싸늘하게 만들었다. 화덕의 불길이 무색할 정도였다. 자리에 빠른 속도로 침묵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부산스럽던 패토스마저도 얌전해졌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오직 프레이가 화덕 위에서 익어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고기가 타는 군.”

바츠가 그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를 재빨리 깨뜨렸다. 그러자 일리디우스가 다시 바츠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그럼 이제 드시죠. 방독면을 그만 벗으셔도 됩니다. 아이들도 편히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죠.”

그의 말에 사미르가 먼저 방독면을 벗었다. 그는 한차례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큰 고민 없이 방독면을 벗어던졌다. 일리디우스가 손수 해체해서 건네는 고기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았다. 아이들도 그를 보고 따라서 방독면을 벗었다. 그리고는 역시나 일리디우스가 건네는 고기를 맛있게 받아먹었다. 강일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바츠와 아델리나의 움직임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는 혼잣말을 하듯 일리디우스에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건넨 고기를 맛있게 받아먹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이 아니면 방독면을 벗을 생각이 없어.”

“역시 헌터입니다. 그 강직함을 감히 따를 수가 없군요. 당신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고기는 고기일 뿐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바츠를 돌아보며 말했다. 감격에 젖은 듯한 목소리와 표정이었지만, 이면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바츠에게 처음으로 호의적인 감정 외에 다른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여긴 모든 것이 내키지 않았다. 전부 의심스럽게 보였다. 아델리나도 마찬가지인지, 슬그머니 한쪽 손을 꼭 잡아오며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애틋하게 지켜봐줄 뿐이었다. 가끔 패토스가 프레이를 직접 손으로 잡아 뜯을 정도로 욕심을 부릴 때에나,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마디씩 했다. 패토스는 아델리나의 주의가 아니었더라면, 프레이를 혼자서 다 먹어치웠을지도 모를 만큼 탐욕스러웠다. 일리디우스가 그에게는 특별히 다른 사람의 몫보다 크게 잘라주고는 했는데도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건넨 것을 단숨에 먹어치우고는 배고프다며 몇 번이나 투정을 부리고는 했다. 먹는 것도 끔찍한 생김새만큼이나 게걸스러웠다. 우적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낼 뿐만 아니라, 입안에 고인 침을 주체하지 못하고 턱밑으로 흘리고는 했다. 때때로 고기 일부도 함께 흘러내렸다. 그때마다 그는 혼자서 화들짝 놀라며 흘린 고기를 주워 먹기 위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분위기는 오히려 한풀 누그러졌다. 처음에는 다들 그를 못마땅하게 흘겼지만, 나중에는 그 어리숙한 모습에 즐거워했다. 얼빠진 듯한 그의 행동이 익살스러운 모양이었다. 바츠가 경계했던 것과는 다르게 식사시간이 즐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미르와 강일에게는 쌀쌀맞게 굴어도 아이들에게만큼은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일리디우스의 태도도 한몫했다. 그는 아이들이 사미르의 노예라는 사실을 모르는지 각별하게 챙겼다. 맛은 어떤지, 양은 충분한지 세심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물론 기회가 될 때마다 그분과 함께 해야 한다는 둥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대체로 분위기가 좋았다. 이전에 잠시 긴장감이 흘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로가토와 보나가 사미르나 강일과 대화를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조금 드셔보십시오.”

식사가 거의 끝나갈 쯤, 일리디우스가 자신의 몫 중 일부를 바츠에게 권했다. 남은 것을 자신의 입으로 밀어 넣으며 기대감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츠는 그런 그의 얼굴과 손을 한 차례씩 바라보고 나서야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고 있는 패토스에게로 건넸는데, 그를 향해 툭 던지듯 건네는 바람에 그가 미처 받아내지 못하고 뒤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가 투정을 하느라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고깃덩이는 뒤로 날아가 바리케이드에 가서 부딪히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패토스가 앉아있는 바로 뒤였다. 그냥 손만 뻗어도 충분히 손에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는 비명을 닮은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몸을 뒤집었다. 조금 뒤뚱거리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그때, 반대쪽에서 높고 가파른 외침이 들려왔다. 아까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외침이었다.

“이단이다! 이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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