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83화 (183/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83화 *

바츠는 그 외침이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틀림없이 외침 그 자체는 같았지만 전보다 훨씬 도전적이었다. 의분을 참아내지 못하고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있는 보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패토스의 거대한 몸집이 이제야 놀라운지, 그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생김새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빛에 불쾌함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패토스는 그런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태연하게 바닥에 떨어진 고깃덩이를 집어서 툭툭 털어내고는, 입안으로 냉큼 집어넣는데 급급했다. 우적거리며 자리로 돌아와 앉는 그의 행동이 따분해보이기까지 했다.

“주교님! 이단자입니다!”

보나와 나란히 앉아있던 로가토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따라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리춤에 있던 독특한 모양의 몽둥이를 꺼내들기까지 했다. 강일이 말했던 뿔처럼 튀어나온 손잡이를 쥐고는 거꾸로 들었는데, 꼭 부목처럼 그의 팔뚝에 착 달라붙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형제님, 자매님. 무슨 짓입니까? 헌터 분들과 함께하는 엄숙한 자리입니다. 자중하세요.”

일리디우스가 이번에도 역시 그들을 침착하게 달래듯 말했다. 그는 자꾸만 얼굴을 붉히는 둘이 난감한 듯 했다. 애써 웃어 보이는 그의 미소가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하지만 보나는 조용히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저 자를 보십시오! 등에 아이를 품고 있습니다! 돌연변이입니다! 이단자입니다!”

그 사이 강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서둘러 자신의 소총을 들어올렸다. 그의 기민한 동작은 언제 봐도 신속하고도 정확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옆에 선 보나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에 반해 사미르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굳은 얼굴로 살짝 엉덩이를 뒤로 빼 앉으며 벽으로 등을 가까이 댔다. 그에게서는 총을 들어 올리려는 의지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조금 겁에 질린 눈을 빠르게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는 점점 음흉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만 그 사이에서 곤란해지고 있었다. 손에 남은 프레이 고기를 마저 해치우지 못하고, 불안한 눈을 크게 뜬 채 굳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당사자인 패토스가 가장 편안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감각하게 화덕 안의 불꽃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이나 긁적였다. 입안에 남은 고기를 질겅거리는 모습이 퉁명스럽게도 보였다. 그는 분위기가 요동치는 것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허, 자매님. 경거망동 하지 말아요. 당신에게 축복이 가득하기를.”

일리디우스가 다시 한 번 보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패토스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는데, 자신의 이마와 양 가슴을 손끝으로 한 번씩 선을 긋듯 집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보나가 뒤늦게 로가토처럼 몽둥이를 꺼내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패토스의 얼굴이 그녀를 바라본 것도 그때였다.

“주교님! 이런 돌연변이는 문란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불결합니다! 축복을 빌어줄 것이 아니라 심판이 필요할 때입니다!”

보나는 제멋대로 방황하는 패토스의 시선에, 보다 더 무서운 얼굴을 했다. 그녀의 눈두덩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로가토와 함께 당장이라도 패토스를 때려눕힐 기세였다. 바로 옆에서 강일의 총구가 자신의 가슴팍을 노리고 치켜 들려진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강일을 언제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일리디우스의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냉정함이 묻어나지 않았더라면, 사단이 났어도 벌써 났을지 모를 긴장감이 절로 흘렀다.

“형제님, 자매님. 아서세요. 그들 모두 존경에 마지않는 헌터 분들과 함께 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친구란 말입니다. 이분들의 친구는 우리에게도 친구입니다. 필히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합당한 연유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단호한 심판뿐만 아니라, 원대한 자비를 베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하의 가르침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그리고 헌터 분들을 믿으세요. 이분들의 판단은 결코 틀린 법이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바츠는 자신을 향해 물어오는 일리디우스에게, 고개를 돌려 빤히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온화한 목소리 너머로 보이는 부드러운 눈웃음이 이상하게도 거북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옆에서 누군가가 손끝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지켜보던 아델리나가 얼른 대답했다.

“그래. 그는 내가 보장할 수 있어. 그에게는 당신들의 심판이 필요하지 않아. 그러니 당장 그 무례한 태도는 집어치워.”

“그렇군요. 그에게는 우리의 심판이 필요하지 않군요. 형제님, 자매님. 들으셨습니까? 이제 그만 노여움을 거두세요. 어서요.”

로가토와 보나는 일리디우스의 말에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에는 뜻을 거둬야 했다. 일리디우스의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고,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그 힘에 의해서 무력화 된 것이었다. 여전히 미련이 남는 눈치였지만 그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얼핏 기가 죽은 사람처럼도 보였다. 바츠는 그 분위기를 분명히 느꼈다. 옷깃 속으로 매서운 밤바람이 파고든 것처럼, 소름이 끼치고 몸이 으스스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리디우스는 그 둘이 적개심을 거두자, 바츠와 아델리나에게 심심한 사과를 해왔다. 바츠는 그 사과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지만, 아델리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사과를 마땅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빙그레 웃어주는 모습이 진실로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은 거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그의 사과를 받았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까 느꼈던 그 느낌을 다시 한 번 받았다. 상당히 불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어둠을 타고 찾아왔다.

그날 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한 밤중이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바닥에 몸을 뉘거나 벽처럼 쌓아올린 바리케이드에 등을 기대고 잠들었다. 바츠 역시 한쪽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델리나는 그런 바츠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었다. 바츠는 아델리나가 자는 것을 지켜봐 줄 생각이었지만, 화덕의 열기가 몸을 나른하게 만들어 저도 모르게 선잠에 빠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글거리며 부스럭거리는 소리 정도는 귀찮게 느낄 정도의 조금은 깊은 잠이었다. 진한 현기증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뭔가가 한쪽 어깨를 자극해왔다. 다급하지만 조심성이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쉿.”

바츠는 눈을 뜨자, 어느새 잠에서 깨어있는 아델리나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잔뜩 웅크린 몸과 신중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흡기구에 가져다대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손가락으로 허공에 노크를 하듯, 손끝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리켰다. 바츠는 그녀의 손끝이 등을 기댄 작은 벽 너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놈들이 정체를 드러냈어...”

아델리나가 벽으로 바짝 붙어서 그 너머를 향해 눈만 빼꼼 내밀었다. 바츠는 그녀를 따라 몸을 움직이려다가, 화덕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일리디우스와 그의 일행은 물론이고, 사미르와 강일 그리고 패토스와 아이들도 없었다. 그때 벽 너머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여, 선을 행함에 있어 한 점 망설임 없는 저희를 지켜주옵시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들을 벌하여 주옵소서. 실수를 한 자를 용서하옵고, 기만한 자들은 심판하옵시매, 혼란에 빠진 자들을 구원하소서. 아멘.”

바츠는 그 목소리를 쫓아 아델리나처럼 벽 너머를 훔쳐보기 위해 눈만 내밀었다. 그러자 저쪽 중앙에 대여섯 개의 횃불과 함께 모여 있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총 네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배를 위로한 채 누워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그의 손과 발을 각각 나눠서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다리 사이에 그 사람을 두고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양손을 높게 치켜들고는 뭔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횃불이 도리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어서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횃불의 열기를 고스란히 반사시키는 금속 말뚝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한 눈에도 대단히 위태로워 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바닥에 눕혀진 사람은 입에 재갈이 물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고, 덩치가 다른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거대했지만 결박된 손과 발이 바닥에 단단히 고정까지 되어있어서 몸부림도 제대로 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꿈틀거리며 앓는 소리나 낼 뿐이었다.

바츠는 그제야 자신이 몽롱한 정신으로 느꼈던 작은 소음들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내내 웃고 있던 일리디우스의 그 미묘한 미소가 무슨 의미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구석에 세워두었던 빅도그 옆에 역시나 마찬가지로 결박된 채 구속되어 있는 사미르와 강일을 발견하며 확신했다. 그는 저들까지 차례로 살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불분명했다. 자신과 아델리나는 물론이고 아이들을 그 반대편에서 자유롭게 둔 채 지켜보도록 두었기 때문이었다.

“일리디우스, 지금 패토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바츠는 손에 금속 말뚝을 쥔 사람이, 그것을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을 향해 내리꽂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한창 그 이상한 행동을 하던 사람들 전부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가 대답했다.

“이단자를 심판하려는 겁니다.”

“당신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어. 빅도그가 있는데도 칼맨들을 못 알아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 당신들은 저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었어. 생각이 많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한 것이었지. 거짓말쟁이들이 으레 하는 행동들이야. 진심을 들어내고 그 안에 급히 가식을 채워 넣다보니 허점이 생기고만 거지. 그런데도 내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아? 궁금했어. 당신들의 의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미소가 무엇인지 말이야.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거라고. 재미있게도 나를 향한 호의는 분명하더군. 정확히는 헌터들이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잖아. 당신이 끝까지 관심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당신이 끝끝내 외면하려고 노력했던 그것이 곧 목적이었잖아. 내말이 틀린가? 아마도 내가 고기를 제대로 던져줬더라면 그 의도를 지금보다는 더 잘 감출 수 있었겠지. 두 사람의 혈기 넘치는 의욕이 답답하거나 원망스럽지는 않았나? 어때? 혹시 내가 녀석에게 고기를 잘못 던져준 것이라고 생각해?”

일리디우스의 진중하던 얼굴에 이전에 보았던 미소가 미끄러지듯 스윽 걸렸다. 입 꼬리가 말아 올라가며 그의 눈 꼬리까지 닿을 것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작은 횃불에 의지한 검붉은 미소였다. 그의 표정이 오데사 시티에서 느꼈던 스타드의 기운만큼이나 섬뜩하게 느껴졌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경계해야 한다고 발악하는 심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가 말했다.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자는 이단자입니다. 분명 저 칼맨들과 함께 왔겠죠. 헌터가 이런 자들과 함께 할 리가 없습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으셨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그런 것 말입니다. 어쩌면 그냥 따분하셨을 지도 모르고요. 결국에는 두 분의 손에 모두 살해되겠지만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칼맨들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명확하게 가르치지만 종종 이렇게 악을 전염시키기도 합니다. 세상 정화에 작은 골칫거리들이죠. 이자를 처리하고 나면 저들을 심판한 뒤 아이들은 우리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분의 자비로움이 아이만큼은 용서하실 겁니다. 제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게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의지를 보여주십시오.”

바츠는 자신을 향해 괴이한 미소로 고개를 숙이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대꾸했다.

“내가 지상을 돌아다니며 느낀 것 중 하나가 뭔지 알아? 사람들은 각자 그 만의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되뇌며 자신의 믿음을 공고히 한다는 거야. 혹시라도 자신의 신념이 틀릴 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그랬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삶 자체가 전부 부정되어버리니까. 그것을 견디기 힘들겠지. 그래서 실제로 증명될 기미가 보이면 더욱더 필사적으로 변하고는 하지.”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일리디우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바츠는 카니지를 뽑아들며 대답했다.

“내게 그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여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옆에서 지켜보던 보나가 바츠를 향해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패토스를 향해 소리칠 때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이단이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향해 비웃으며 말했다.

“이단(heresy)이라고? 그건 헤러티커(heretiker)에게나 쓰라고, 이 빌어먹을(holy shit)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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