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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84화 (184/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84화 *

바츠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앞 쓰레기더미 벽을 손으로 딛고 날렵하게 뛰어넘었다. 그러자 보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이쪽을 향해 무섭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말뚝과 몽둥이가 각각 꺼내져 있었다. 불같은 성격만큼이나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발소리가 악에 바친 고함처럼 울려 퍼졌다.

바츠는 침착하게 검을 세우며 그녀를 기다렸다. 상대적으로 짧은 무기를 지닌 그녀가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 다다르면 간단하게 검을 휘둘러 혼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델리나의 몫이었다. 그녀는 한발 앞서 보나를 맞이했다. 둘 사이로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는 반대로 보나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는 카니지를 보나에게로 크게 휘둘렀는데, 그녀는 보나를 통째로 베어버릴 작정인 듯 했다.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를 향해 사선으로 뻗어나가는 칼끝에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보나는 자신의 속도를 가까스로 이겨내며, 오른편으로 몸을 날려 용케 피해냈다. 그녀의 왼쪽 옆구리가 아델리나가 일으킨 바람에 잘리는 소리가 났다. 저쪽에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내려선 그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그려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잘려나간 옷깃을 확인하며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낯빛에 당황스런 기색이 묻어났다.

“헌터에게 달려든다면, 이 정도 각오는 했을 것 아니야?”

아델리나가 그녀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어깨 위로 검은 기운이 자욱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보나가 뭔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지면을 스치는 바람 같았다. 뒤로 쭉 뻗히는 망토가 아델리나의 빠른 몸놀림을 눈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보나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접근했다. 그리고는 방금 전보다 간결하지만 훨씬 빠르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을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벌써 두어 번이나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잠깐의 실수로도 치명상을 입기 충분한 아델리나의 칼날을 침착하게 견뎌내고 있었다. 노련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능란했다. 팔뚝 길이밖에 되지 않는 몽둥이와 그보다도 훨씬 짧은 말뚝을 교차로 혹은 동시에 사용하며 막아냈다. 아델리나의 기세에 뒷걸음질을 치며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따금씩 옆으로 빠져나오며 회심의 일격만큼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솜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손에 든 생김새가 독특한 몽둥이가 한 몫 제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었다.

보나의 몽둥이는 생김새만큼이나 휘둘러지는 궤적이 상당히 특이했다. 상식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옆으로 튀어나온 뿔 같은 손잡이를 잡고는 환풍구의 팬처럼 빙글빙글 회전시켰는데, 짧은 길이가 오히려 장점이 되며 매우 빠른 속도로 기하학적인 궤도를 그리고는 했다. 꼭 폭발로 튀어나온 환풍구의 팬을 손에 들고 휘두르는 듯 했다. 게다가 다른 손에 들고 있는 말뚝은 가끔은 반대 손을 돕거나, 또 가끔은 아델리나의 빈틈을 향해 찔러 들어가며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녀가 거리낌 없는 당당함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둘에 대결의 끝이 몹시 흥미로웠다. 하지만 바츠는 그 끝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로가토가 이미 코앞까지 달려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톤파(tonfa)라는 겁니다. 살을 찢거나 사지를 절단하는 그런 냉혹함은 없지만,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부수죠. 우리를 상대하려면 어디 한군데가 부러질 준비는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헤러티커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로가토가 뒤에서 외치는 일리디우스의 목소리를 등에 업고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보나만큼 빨랐다. 그리고 그녀보다도 더 힘이 있었다. 그의 톤파가 뻗어지는 팔을 따라 한 번 회전을 하며 날아왔다. 궤적이 정확하게 왼쪽 관자놀이를 향하고 있었다. 바츠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는 미끄러지듯 왼쪽으로 몸을 빼냈다. 로가토의 등이 저절로 드러났다. 카니지를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그의 등을 벨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톤파가 먼저였다. 그의 톤파는 잡아당겨지는 그의 팔을 따라 다시 반대로 1회전하며 날아와 바츠의 카니지를 가볍게 튕겨내 버렸다. 더불어 그의 반대 손이 앞으로 내딛어진 바츠의 무릎을 향해 말뚝을 찔러 넣기까지 했다. 바츠는 재빨리 발을 빼내며 피해냈지만 가슴이 서늘할 만큼 흠칫해야만 했다. 호흡을 위해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가 충분히 쫓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싸늘한 미소를 그려 넣는 것이 보였다.

“당신을 해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린 당신들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후회하게 해드릴 수밖에요.”

바츠는 그의 조롱에 가까운 말투를 애써 무시하고는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빠르지 않고 침착한 걸음이었다. 그에게 말했다.

“그 여유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궁금하군.”

“아직 못 느끼시는 겁니까? 내가 당신보다 훨씬 빠릅니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가 또 한 번 민활하게 움직였다. 좌우로 한 발씩 통통 튀는 움직임으로 어스름한 어둠을 헤치며 다가왔다. 그의 싸늘한 미소가 횃불로 인해 반쪽은 붉은 빛과 어둠으로 얼룩덜룩하고 다른 반쪽은 그림자로 가려져 사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톤파는 사악한 미소를 따라 허공을 휘저으며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현란하게 회전을 하고 있었다.

바츠는 피하지 않았다. 달려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카니지를 밑에서부터 크게 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톤파가 카니지와 부딪히며 둔탁한 비명을 지르더니 빠르게 뒤쪽으로 달아났고, 그의 팔은 톤파를 쫓아 반대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겨졌다. 그의 오만한 얼굴이 삽시간에 놀라움으로 채워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큼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표정을 관리할 틈도 없었다. 충격으로 크게 휘청거리는 몸통을 바로 잡는데 급급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가 빠른 판단으로 전진하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발을 디딤으로 균형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록 자세가 무너지며 허우적거리는 바람에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한 최선이었다. 물론 조금 전 바츠처럼 황급히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급속도로 굳어지는 표정과 함께 균형을 잡느라 볼썽사나워진 모습으로 제자리를 향해 돌아갔다.

바츠는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다음을 대비해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기회는 충분했다. 그가 자랑하던 빠른 움직임보다 훨씬 빠르게 그를 향해 접근했다. 몸을 내던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앞으로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그리고 급속도로 커지는 그의 눈동자를 향해 정확히 왼 주먹을 날렸다. 그가 한동안 눈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게 될 것이 절로 상상이 됐다. 하지만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만 끝났다. 그의 톤파는 기대 이상으로 현란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아래서 춤을 추듯 빙글 회전하더니, 그의 안구를 강타하기 직전의 바츠의 팔꿈치를 되레 강하게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감각을 잃었을 만큼 큰 충격이었다. 문틈에 끼었던 것처럼 팔꿈치부터 손까지 전부 얼얼한 정도였다. 슈트가 아니었더라면 뼈에 금이 가서 다시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만 같았다. 입에서 절로 탄식과 앓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그도 무리하게 움직였는지, 결국 불안하게 유지하던 균형을 잃고는 뒤쪽으로 넘어진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낮은 벽에 부딪히고는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바츠는 왼쪽 팔이 몹시 신경 쓰였지만, 침착하게 그를 놓치지 않고 눈으로 쫓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가슴팍을 향해 카니지를 길게 찔러 넣었다. 양손을 다 딛고 있는 그로써는 더 이상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능력은 놀라웠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재능이 특별해도 사용할 수 없다면 무의미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억울한 눈을 부릅뜨며 바라보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부릅뜬 눈이 전해오는 분한 마음이 왼쪽 목덜미를 따끔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서둘러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자 갑자기 불어온 강한 바람이 조금 전까지 머리가 있던 곳을 뒤에서부터 빠르게 몰아치며 지나갔다. 몸을 돌려세우며 한쪽으로 빼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조금 지나치시군요. 우린 그저 버릇을 조금 고쳐드리려고 했는데, 실제로 살의를 품으실 줄이야.”

어느새 달려온 일리디우스가 손에 들려있던 톤파를 유려하게 휘돌리며 거두고는 자리에 섰다. 그의 얼굴이 진심으로 섭섭해 하며 씁쓸하게 변해갔다. 바츠는 그에게 말했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라고 말했을 텐데.”

“정녕 저희를 상대로 진심으로 싸우시겠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대체 그 자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집착하는 거지? 지켜보고 있다면 당장 앞에 나서라고 해. 그럼 지금 이 상황을 좀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주님을 모르시다니, 안타깝기 그지없군요. 그분은 세상 유일한 신이십니다. 신이 뭔지 모르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설마 그분을 부정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가 없었을 겁니다. 그분 덕택에 우리가 태어났고, 그분 덕택에 우리가 살아남았죠. 우리가 이렇게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그분을 믿으신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의 비호는 믿음에서 나오고, 그 믿음은 세상을 관통합니다.”

바츠는 그때까지도 얼얼한 팔을 움직여 점검해보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신과 비슷하군.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 신은 아닌 모양이야. 묻고 싶군. 너의 그 신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나?”

“내 삶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럼 네 그 삶은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내가 알고 있는 한, 신은 바로 나다.”

바츠는 일리디우스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아직 왼쪽 팔이 불편했지만,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와의 거리를 좁힌 뒤, 카니지를 양손으로 쥐고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자 어느 틈에 자리에서 일어난 로가토가 그의 뒤에서 외쳤다.

“이단이다!”

이미 여러 번 들어서 아무런 감흥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뱉어진 일리디우스의 말은 전혀 달랐다. 그가 소스라치며 말했다.

“집사?”

어찌나 크게 놀랐는지, 그는 자신의 이마를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피할 생각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로가토가 앞으로 뛰쳐나와 대신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반쪽이 되어서 숨을 거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가토가 조금 전 그에게 진 빚을 갚은 셈이었다. 로가토의 톤파가 바츠의 카니지를 다시 한 번 튕겨냈다. 언제 봐도 이채로운 움직임이었다. 빠른 회전으로 힘을 얻어 카니지를 쳐내고는, 준비동작이 거의 없이 바로 다음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었다. 오른쪽 바깥으로 회전하며 뻗어가던 것이, 벌써 동작을 멈추고는 반대로 회전하며 안쪽으로 접어 들어오며 바츠의 턱을 노렸다. 하지만 바츠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미 톤파의 움직임은 눈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턱을 향해 날아드는 톤파의 끄트머리를 제자리에서 몸을 휘어 돌리며 흘려내고는, 팔을 뿌리치듯 카니지를 재차 휘둘러 로가토의 복부를 가로로 깊숙하게 베었다. 아직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손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 이번에는 그가 비켜내지 못했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그의 넋이 나간 듯한 표정과 더불어 완전히 경직된 몸과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그의 복부를 확인함으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발밑이 검붉게 얼룩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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