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85화 (185/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85화 *

“로가토!”

그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일리디우스가 애절한 목소리로 달려들며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체액과 함께 체온을 잃으며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오히려 더 지면에 가까워지려고 할 뿐이었다. 일리디우스가 그를 양팔로 붙들며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힘이 빠지며 늘어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쪽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일리디우스의 어깨에 칼날을 올렸다. 목에 최대한 밀착시키며 카니지의 잔인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눈에는 원망이 서려있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우리에게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우린 동료(coworker)이지 않습니까! 친구잖습니까!"

“멋대로 정하지마. 적어도 내게 친구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고도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바츠는 울분을 토하듯 외치는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그러자 그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전에 보여주었던 그 섬뜩함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당신은 집사잖습니까?”

“그렇다고 아무나 하는 고백(confess)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바츠는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양손으로 쥐고는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일리디우스의 시선이 바츠의 얼굴을 떠나, 카니지를 쫓았다. 그 사이 로가토의 두 눈은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미동조차 없이 물에 젖은 솜처럼 일리디우스의 품안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바츠는 그 모습들을 차례로 살핀 뒤에 일리디우스의 목을 향해 카니지를 휘둘렀다. 냉정하게 날아가는 카니지의 칼날이 어둠을 스치며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일리디우스는 저항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런 그를 베지 못했다. 그의 처연한 모습에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목에 칼날이 닿기 직전, 옆에서 뭔가가 빠르게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실루엣이었다. 바츠는 중간에 검의 궤적을 바꿔, 손잡이를 쥔 양손으로 있는 힘껏 그 물체를 향해 가격해야만 했다. 주먹을 쥔 손에 묵직한 감각이 전해지는 동시에 투박한 소리가 주위에 울렸다. 그러자 그 형체는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고는 뛰어온 속도를 이기지 못한 채, 바츠와 일리디우스 사이로 미끄러지듯 처참하게 나자빠졌다.

“패토스, 뭐하는 짓이야?”

바츠는 차분한 목소리로 발아래 수북이 쌓인 눈처럼, 갑자기 차오르는 엄청난 양의 살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사람보다 두 배는 더 비대한 몸집과 달려온 방향 그대로 엎어지며 보여 지는 등을 통해 어렵지 않게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등 위에 솟구치듯 튀어나온 작은 사람은 오로지 패토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자 그가 바츠를 향해 무릎으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지 마라! 아픈 거 하지 마라!”

패토스는 앞니가 하나 부러지고 입술이 터진 채, 코피를 흥건하게 쏟고 있었다. 그의 입가를 비롯해서 얼굴 절반이 벌써 붉은 혈흔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말하는데 바빴다. 똑바로 보지도 못하면서 눈높이가 거의 일치하게 된, 바츠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바츠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괴이한 눈동자가 횃불의 얼굴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찐 버니에투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일리디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곳곳에 기록된 수많은 기도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간절함이 그림과 문장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겁니다. 인간의 큰 실수가 세상을 더럽혔고, 이제 우리는 그 실수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애원이 들리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눈물이라도 얻길 바라고 있습니다...그 눈물에 대해서 본적이 없는 겁니까?...”

바츠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옮겨, 패토스의 어깨너머로 일리디우스를 찾아보았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바닥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젖어들고 있는지, 힘이 없는 눈빛으로 혼잣말을 하듯 늘어놓았다. 바츠는 그런 일리디우스의 얼굴을 보며, 오래 전 일리트시의 주민들과 폐교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그가 말한 비슷한 그림들과 문구들을 본 기억이 있었다. 더불어 그곳에 남겨진 바론도 생각났다. 그의 마지막 얼굴이 지금의 일리디우스와 꽤나 닮아있다고 느껴졌다. 근본적인 의미는 달랐지만, 목적을 잃은 자들의 소침한 모습임에는 분명했다. 일리디우스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힘을 잃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짧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으며 예전의 기운을 금세 되찾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패토스를 노려보는 눈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그 눈물에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의 은총을 얻지 못한 자들이, 작은 은정이라도 얻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당신과 우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들의 외침을 곡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린 오로지 정화에 앞장서야만 하는 겁니다! 선을 행하며 악을 제거하는 정화! 그분의 뜻을 대신 전하고 행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었습니까! 성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거대한 악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분명 이놈을 말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보십시오! 저 흉측한 괴물을! 놈을 심판해야 합니다! 우린 그분의 뜻을 도와, 정화에 앞장서서 남은 인간들을 구원해야 하는 겁니다! 당신의 칼날은 우리에게로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놈에게로 향해야 하는 겁니다!”

일리디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 꿇고 있는 패토스의 뒤통수에 대고 가리켰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든지, 눈을 부릅뜨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쫓기는 사람처럼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날아드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그 위로 쏟아지며 훼방을 놓았다.

“헛소리 집어치워.”

바츠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지만, 흥분을 급히 가라앉히는 일리디우스의 표정을 보고는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고개만 살짝 돌려 뒤쪽을 찾아보자, 예상한대로 저쪽에서부터 걸어오는 아델리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일리디우스를 향해 뭔가를 던져주며,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다. 바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 서둘러 고개를 돌려 그것을 쫓았다. 그러자 자신감이 전부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머리만 남은 보나가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로가토 곁에 멈춰서며 허공을 향해 두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보나!”

일리디우스의 절규가 크게 울려 퍼졌다. 패토스가 몸을 돌리고는 바닥에 주저앉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는 보나의 참혹한 모습이 믿기지 않는지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입술만 벙긋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델리나가 그런 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이곳에 있던 주민들 모두 당신들이 살해하고 내쫓았지? 그 대가를 치른 것뿐이야. 우리가 뒤쪽에 묘지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대부분 야인을 가장한 노상강도들이었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단 말입니다!”

일리디우스가 아델리나를 돌아보았다. 넋이 나간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정신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아델리나에게 강하게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콧방귀를 뀌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가 못 미더운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자 일리디우스가 하소연을 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의 양손으로 가슴을 쥐어짜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지금까지는 그러지 않았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헌터들이 당신들의 행동에 동의를 해주었다는 것인가?”

바츠가 그에게 되물었다.

“직접적으로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옆에서 지켜보며 아무런 말이 없다면 그건 무언의 동의가 아닙니까? 지금까지 쭉 그래왔습니다! 우린 그렇게 함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헌터들은 항상 말수가 적으니까 말입니다!”

“그냥 관심이 없었던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보군. 그건 헌터의 지침 중 하나일 뿐이다. 주어진 목적 이외에 지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바츠의 말에 일리디우스가 급속도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방금 전 혼잣말 늘어놓는 듯 할 때처럼, 생각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입을 닫고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렇게 한동안 생각을 하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는데, 기대감이 묻어나는 조심스런 목소리 물었다.

“그럼 당신도 우리를 모른 척 해줄 겁니까?”

바츠는 그의 물음에 발 앞에 앉아있는 패토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일리디우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현재의 상황이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사미르와 강일도 찾아보았다. 둘은 어느새 결박에서 벗어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곁에 사미르의 아이들이 보였다. 어느새 아이들이 그 둘 곁에 머물고 있었다. 아마도 패토스는 물론이고 둘을 풀어준 것이 아이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바로 옆에 선 아델리나도 보았다. 그녀는 방독면 렌즈로 차분한 시선을 보내고 오고 있었다. 작게나마 고개를 움직여주었다면 보다 확실했을 테지만, 조용히 보내오는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바츠는 다시 일리디우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실망감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미 자신이 기대했던 대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챈 듯 보였다. 바츠는 천천히 검을 세웠다. 하지만 그를 향해 휘두를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패토스였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 거대한 몸집으로 바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바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가 마치 바닥에서 솟구치는 격벽처럼 느껴졌다. 그가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마라.”

“왜지?”

“아픈 거 싫다. 패토스는 아픈 거 싫다. 아델리나도 하지 마라.”

바츠는 양팔을 좌우로 뻗으면서까지 의지를 확실히 보이는 그를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에게서 대단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고집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고집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이미 일리디우스를 살해하겠다고 결심한 뒤였다. 바츠는 그 생각을 담아 패토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곧 있으면 그가 달아나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였다. 바츠는 왼쪽 어깨에 올려지는 따뜻한 손길 때문에, 더 이상 그를 노려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온기가 전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착각을 하게 만드는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바츠는 그 손길을 얼른 쫓아야만 했다. 그러자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아닌, 슬그머니 끄덕이고 있는 아델리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희소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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