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89화 (189/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89화 *

그녀의 분노는 차갑게 얼어붙던 테이블의 분위기를 더욱더 빠르게 냉각시켰다. 검을 뽑아들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그녀의 칼날은 테이블 위에서 수십 차례 휘둘러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를 일순간에 긴장시켰다. 심지어 무관심하던 패토스마저도 기겁하며 바라봤을 정도였다. 그가 우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하지 말라며 몇 번이나 말려 세웠다. 하지만 그녀의 싸늘한 시선은 붉은 얼굴이라고 불리는 사내에게서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질수록 주변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워졌다.

“어쩔 수 없군요. 계속해서 두 분의 식사를 방해할 수는 없죠. 알겠습니다.”

붉은 얼굴이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더 이상은 견뎌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맞선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바츠와 아델리나 둘의 시선을 한꺼번에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떨구고는, 수하들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사미르와 강일은 물론이고 노예들을 겨눴던 위협이 하나둘 치워졌다. 붉은 얼굴은 그 와중에도 슬쩍 시선을 다시 들어 바츠와 아델리나를 살폈다. 그가 말했다.

“이곳에 계산은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시를 찾아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헌터들이 지나면 주변 상황이 진정되는 효과가 있거든요.”

“호의로 내 환심을 사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미리 말해두지.”

바츠의 냉담한 태도에 그가 전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냥 친절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나둘 그의 뒤를 쫓는 수하들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아직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없군.”

붉은 얼굴과 그의 수하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그 보다 먼저 돌아서는 몇몇 수하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완전히 겁을 먹고 경직되어 있었다. 붉은 얼굴이 돌아선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세우고는, 지금까지 중 가장 어두운 표정과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츠는 그가 처음처럼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나서, 밖을 향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중간에 시종 이쪽을 주시하던 손님 일부를 향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걱정스런 표정을 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손짓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씩 자신의 얼굴을 다시 밝게 만들었다. 그의 행동이 위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식사를 계속 이어가기 시작했다. 제법 흥미로운 모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밖은 이미 꽤 어둑어둑 했다. 땅거미가 길게 드리워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과 다르게 이곳에서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의 밤거리는 여타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훨씬 밝았다. 모두 건물마다 그 앞에 내걸린 형광 간판 때문이었다. 형형색색의 형광 간판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불꽃처럼 사정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만큼 화려했다.

“눈부시죠? 방전등입니다. 가끔은 밤새도록 반짝일 때도 있습니다. 덕분에 이곳의 밤은 매우 짧습니다. 키예프 시티의 번화가가 부럽지 않은 정도죠.”

사미르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는 밤이 부족한 것 같았다. 다른 도시였다면 이미 사람들이 종적을 거의 다 감췄어야 할 때인데, 여기에는 아직까지도 50여명의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대부분 헐벗은 여성들이 중심이 된, 낮에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야릇하게 들뜬 분위기가 거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저쪽으로 가시죠.”

사미르가 그들 사이를 지나, 바츠를 근처 건물로 안내했다. 규모는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지만 오데사 시티에서 보았던, 호텔이라고 불렸던 칼리굴라의 건물과 유사한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홀과 계산대가 있었고, 매 층마다 중앙을 관통하는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방이 늘어서 있었다. 바츠가 머물게 된 곳은 2층 구석에 위치한 방이었다.

사미르는 전부 4개의 방을 빌렸다. 자신과 강일이 각각 노예를 하나씩 데리고 방을 나눠썼고, 패토스에게도 방을 따로 내주었다. 바츠와 아델리나에게는 한방을 쓰도록 했다. 바츠는 각자 방으로 들어가기 전, 자신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미르가 불쾌했지만, 패토스가 아델리나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며불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별도로 따져 묻지는 못했다. 패토스가 얌전해지도록 자는 모습을 보고 오겠다는 아델리나를 복도에서 조용히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사미르가 그런 눈으로 바라본 이유를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얼마 뒤, 속살을 드러낸 채 거리를 거닐던 여인 둘과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흐뭇한 얼굴로 바츠 앞을 지나, 그 여인들을 패토스의 방으로 밀어 넣었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바츠는 절로 터져 나오는 코웃음을 애써 참아내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사미르가 물었다. 조심스럽고도 진중한 목소리였다.

“저...그런데 왜 우리를 도와주었던 겁니까?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언제든지 그냥 갈 수 있었잖습니까?”

바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반쯤 열린 문 앞에 선 그의 얼굴이 어느새 잔뜩 복잡해져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에게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에 이미 대답한 건 같은데? 관심을 갖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가 변함없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듯 했다. 바츠는 그를 피해 문틈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양철로 만들어진 욕조에서 물장구를 치는 패토스가 보였다. 방금 사미르가 밀어 넣은 두 여인이 발가벗은 채 그의 알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패토스만큼이나 밝았다. 아델리나는 그곳에서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바츠는 그녀를 지켜보며 말했다.

“정 궁금하면 저쪽에게 물어보라고.”

“저분은 이쪽에 물어보라고 하던데요...”

사미르가 안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바츠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아상하리만치 입술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애써 노력하며 무디게 입을 열었다.

“...그냥...덕을 보는 거라고 생각하라고. 당신이 말했잖아. 헌터 덕 좀 보고 싶다고. 당신의 안내에 대한 보답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군. 서로 빚은 이제 없는 거라고.”

사미르의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이 보였다.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반응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껴졌다. 방독면을 다시 뒤집어쓰고 싶은 생각으로 간절했다. 때마침 안에서 나온 아델리나가 아니었더라면, 괜한 신경질을 부렸을지 모를 만큼 가슴이 짜증스럽게 뛰었다. 바츠는 서둘러 아델리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다 된 거야?”

“응, 지금 씻고 있어.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아. 고마워.”

아델리나가 옆에 선 사미르에게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작 한마디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사미르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한 발 뒤로 물러났을 정도로 크게 놀란 것 같았다. 아델리나는 그런 그를 보고는,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며 함께 놀라주었다. 곧장 소리 내어 웃었을 만큼 즐거워하는 걸 보면, 진심으로 놀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사미르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정말 놀랐는지, 입을 벙긋거리며 당황스러워 했다. 그리고는 아델리나가 진정하라는 의미로 내두르는 손짓을 보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눈치를 살피기 위해 바츠와 아델리나의 얼굴을 번갈아 본 것이 그보다 먼저였다. 그의 말투가 신중했다.

“그거 아십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십시오. 정말 매력적인 분입니다.”

바츠는 그의 고백에 불쾌감을 느끼며 발끈했지만, 아델리나가 얼음처럼 굳어진 얼굴을 했다가 바로 환하게 웃는 바람에 밖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아델리나가 지금처럼 신이 난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토록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는 상당히 기분 좋아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복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을 쯤, 안에서 여인들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무러치는 절박한 비명소리였다. 아델리나와 사미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츠 역시 몸이 움찔했지만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제자리에서 침착하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욕조에 들어가 있던 패토스가 여인들을 끌어안으며 난동을 부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녀들이 쏙 마음에 드는지, 자신과 함께 욕조 안에 들어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미 그 하나만으로도 꽉 찬 욕조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져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들은 패토스의 억지에도 밝은 모습으로 응대해주고 있었다. 놀라서 난감한 기색이 흐르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혐오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델리나는 그녀들을 패토스에게서 구해주고는 그를 따끔하게 혼냈다. 그의 우는 소리와 함께 워낙 어수선해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화난 얼굴과 단호한 모습이 그에게 주의를 주고 있음에는 틀림없었다. 그 사이 사미르가 여인들을 위로하며 진정시켰다. 그녀들의 어깨를 쓸어주며 다독여주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옮겨, 입구 쪽으로 향하는 복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한 사내가 의자를 가지고 위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1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 바로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는 그 앞에 앉았다. 굉장히 피곤한지 졸린 듯한 표정이었다. 뒤늦게 바츠의 시선을 느끼고는 이쪽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바츠는 그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넌 뭐야.”

“붉은 얼굴이 각별히 모시라고 했습니다.”

고개를 다시 드는 그의 눈썹 위에, 검은 불꽃 문신이 새겨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멋대로 하라고.”

바츠는 그를 향해 콧방귀를 뀌고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다시 돌렸다. 그러자 방에 있던 강일이 막 복도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는지, 웃옷을 다시 고쳐 입으며 다가왔다.

“조금 전 패토스 때문에 소란스러웠던 건가요?”

바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느새 방안의 소란은 많이 잦아든 상태였다. 강일이 그런 방안을 슬쩍 훔쳐보고는, 복도 끝에 앉아있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저자는 뭡니까?”

“그자의 친절이야.”

바츠는 간단히 대답했다. 조금 시큰둥한 태도였지만, 알고 있는 전부이기도 했다. 강일은 실없는 코웃음으로 반응했다.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눈치였다.

“아주 신났던데. 저 녀석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여자들이 좋은 가봐. 섭섭하네. 사미르가 대신 있어주기로 했어.”

그때 아델리나가 안에서 나오며 바츠와 강일 사이를 지나갔다. 그녀는 건너편 방으로 들어가며 바츠에게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강일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에게 물었다.

“더 할 말이 있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강일이 바츠의 물음에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지만, 노련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바츠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는 항상 진정성이 있는 행동을 해왔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듬직하게 보였다.

“우리랑 함께 가지 않겠어? 칼맨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던데. 나와 가면...”

바츠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아르크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나 전진기지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숨을 참으며 그냥 안으로 삼켜버리고는, 에둘러 말을 이었다.

“나와 가면 좀 더 신나는 일이 있을지도 몰라. 의미 있는 일들 말이야.”

강일이 굳은 얼굴로 반쯤 돌려 세운 몸을 멈추고는, 이내 소리 없이 웃었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의미였다. 바츠는 그를 향해 내쫓듯이 성의 없는 손짓을 내두르고는 먼저 몸을 돌려 세웠다.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자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날아들었다.

“전 떠돌이였습니다. 가족도 있었고 동료도 있었죠. 하지만 다 잃었습니다. 헤러티커의 습격, 노상강도들, 아이기스까지 수 없는 약탈자들 때문이었죠.”

바츠는 고개만 돌려 그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어두운 복도의 조명이 그림자를 만들어, 그의 표정을 직접 볼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추측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표정까지 대변하고 있었다.

“날 구해준 건 사미르입니다. 녀석을 버릴 수 없습니다. 녀석은 이제 제게 유일한 가족입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바츠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결국 그를 다시 불러 세워야만 했다.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역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아, 그런데 혹시 한국 혈통인가?”

“한국이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쪽이랑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몇 있거든. 이름이 비슷한 형식이었어. 그래서 묻는 거야.”

“아, 네. 한국...맞습니다. 제 핏줄이 그쪽이라고 하더군요.”

그가 뜻밖인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로 어리둥절한 채 대답했다. 바츠는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럼 고대어를 읽을 줄 아나? 한글이라는 것 말이야.”

“음...대략적으로는 요.”

“이것 한 번 봐볼 테야?”

바츠는 테라치에게 받았던 쪽지를 그에게 보였다.

“이게 뭡니까?”

“수수께끼 같은 건데, 뭔가 맞춰봐. 특별한 숫자일수도 있다고 하더군.”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글쎄요. 저 같은 사람이 이런 걸 본다고 알겠습니까?”

“그런가?”

바츠는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쪽지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강일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그가 다급하게 잡아채는 바람에 다시 꺼내놓아야 했다. 그가 바츠에게 미안함을 고개와 눈빛으로 표하고는 쪽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꽤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 잠깐만요. 이게 숫자라고요? 아...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간단한 말장난입니다.”

“말장난?”

“네, 카르카손에 비슷한 놀이가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것은 아니고, 정말 말장난 같은 겁니다. 쉽게 이런 거죠. 직각의 삼각형인데,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를 두 번 곱해서 더한 값이, 남은 빗변의 길이를 두 번 곱한 값과 같다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건 수학 공식이라는 것 중 하나야.”

바츠는 조금씩 흥분하는 그를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가 말한 것은 이미 아르크에서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피타고라스의 정리였다. 일반학교에서도 수학을 접한다면 손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인지, 확신에 찬 눈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서서히 흥분하는 그의 얼굴에 환희가 보일 정도였다.

“뭐 어쨌든요. 그런 겁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 것 같아?”

바츠가 떨떠름하게 묻자,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켠 후 차분하게 대답했다.

“만약 숫자가 맞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 문장은 9를 말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9? 어째서 그렇지?”

“보시면 ‘내가 어떤 나를 만나더라도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차례로 끝까지 힘을 합친다면 다시 내가 된다.’고 하잖아요. 숫자 9가 가진 특징이거든요. 9에 어떤 수를 곱하더라도 나온 숫자를 앞에서부터 차례로 더하면 다시 9가 되거든요. ‘내가 어떤 나를 만난다.’라는 것은 곱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당연히 배수일 테고요. 9에 9를 아홉 번 곱하면 81이잖습니까? 81을 차례로 더하면 9가 되죠. 9에 9를 15번 곱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답은 135이죠? 앞에서부터 차례로 더하면 역시나 9입니다. 9에 32번을 곱하면 288이죠? 하지만 앞에서부터 차례로 계속해서 더하면 18 그리고 다시 9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라? 정말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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