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91화 (191/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91화 *

다음날, 바츠는 조금 짙은 소란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야 했다. 복도에 알아듣기 힘들만큼 많은 수의 웅성거림이 배회하고 있었다. 비록 요란스럽지는 않았지만, 이정도가 될 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볼 수 있었던 그녀의 보드라운 속살 때문인 것 같았다. 매끄럽고 작은 그녀의 배였다. 살짝 부풀었다 꺼지길 반복하는 모습이 탐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바츠의 머리를 온몸으로 둥글게 말아 끌어안고 있었다. 바츠는 그녀의 미끈하고 녹녹해 보이는 배에 수차례 키스를 해주고 나서 머리를 빼냈다. 다른 곳과 다르게 생채기조차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상흔이 전혀 없는 부위였다. 그러자 그녀가 아직 좀 더 자고 싶은지,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는 몸을 꿈틀거리는 애교를 부렸다. 바츠는 그녀 옆에 더 눕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어수선한 분위기로 유난히 시끄러운 복도가 신경 쓰여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어야만 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르지.”

“야, 야! 헌터다!”

복도로 나오자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주위를 오가며 떠들고 있었다. 몇몇은 먼발치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한쪽에 모여서 특정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가 모습을 드러내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부터 차례로 서로 눈치를 주며 복도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풀이 죽어 기운이 없는 표정이었다.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굉장히 찝찝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바츠는 그들이 복도를 비우고 사라질 때까지,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각자의 방으로 숨어들고, 위축된 모습으로 앞을 지나 빠져나가는 모습들이었다. 복도를 빠른 속도로 고요하게 만들었다. 멀어지는 발자국소리처럼 소란이 하나둘 떠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아래층에 다시 모여들며, 긴장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자리를 피한 사람들이 밑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복도 끝 계단 앞에 앉아있던 사내는 의자와 함께 보이지 않았다.

바츠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이 모여서 들여다보던, 그 방을 향해 다가갔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작은 여자아이가 혼자 남아 안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바츠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돌아보더니, 굳은 얼굴로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바츠는 그 아이가 어제 강일과 함께 방을 쓴 사미르의 노예라는 것을 단 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아이가 들여다보고 있던 방은 사미르가 쓰려던 방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방안은 차분했다. 중앙 테이블 위에는 어제 밤 별도로 주문한 것으로 보이는 식기들 위에 음식물이 반쯤 남아있었고, 빅도그에 싣고 다니던 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저쪽 구석에 차곡히 쌓여있었다. 모든 집기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어떤 특이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한쪽에 놓인 침대가 눈에 띌 뿐이었다.

침대는 다른 방과 똑같은 단철로 제작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녹이 보이기는 했지만, 앞으로도 수 년 간은 더 사용해도 충분해 보였다. 그 위에 시트와 담요도 조금 지저분하고 낡아있었지만 세월의 흔적일 뿐이었다. 그 위를 흠뻑 적신 붉은 혈액이 아니었더라면, 그 어떤 것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것은 없었다. 바츠가 침대에 관심을 빼앗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강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조용히 누워 있는 사람의 손을 양손으로 붙들고 있었다. 시트와 담요를 다시는 사용하기 힘들만큼 붉게 적시고 있는 사람의 손이었다. 강일의 모습이 꼭 그에게 애원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그 어떤 감정보다도 싸늘함으로 가득했다. 침착한 것인지 정신을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바츠는 그 옆에 나란히 서고 나서야, 그가 붙들고 있는 사람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머리를 잃어버린 채, 침대에 푹 가라앉듯 누워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혈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미 한참 전에 숨을 거둔 것으로 보였다. 강일은 머리가 없는 시신을 그렇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미르입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죠. 이렇게 손만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홀로 지상을 떠돌 때 유일하게 내밀어준 손이니까요.”

강일이 사미르의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는 한결 같았지만, 몹시 힘이 없고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미르의 모습을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지상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사미르가 아니었더라면 강일이 대신 살해당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강일이 자신의 가족들을 잃은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번만큼은 바츠나 아델리나였을 수도 있었다.

바츠는 조용히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자신이 너무 안일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요 며칠 전만해도 무지막지한 습격에 가슴을 졸여야 했는데, 고작 자그마한 문명 안에 들어와 있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 강일의 목소리가 뒤에서 어깨를 잡아왔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도와주십시오.”

바츠는 걸음을 멈췄다. 문 바로 앞에 사미르의 노예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정작 사미르와 함께 했던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아이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강일이 그런 바츠를 향해 다시 말했다.

“틀림없이 그 자입니다. 붉은 얼굴 그자의 짓이 틀림없습니다.”

바츠는 강일을 고개만 돌려 쳐다보았다. 그가 여전히 사미르의 손을 양손에 쥐고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츠는 따분해 보일 만큼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보십시오. 값비싼 물건들이 모두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사라진 것은 사미르가 데리고 있던 아이뿐입니다. 놈이 어제 우리에게 경고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후회할거라고 감히 으름장을 놓았지 않습니까? 놈들이 분명 보복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강도였더라면 물건들을 가지고 갔을 것 아닙니까?”

바츠는 그의 대답에 구석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짐들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정리된 이후 따로 손길이 닿은 적이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보복이라면 나에게 해코지를 해야지, 무엇 때문에 당신 친구를 살해했겠어?

“잊으셨습니까? 놈은 분명 협박할 때, 우리를 인질로 잡았지 않습니까? 놈은 우리를 일행으로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보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겠죠. 우리를 위협해서 당신들이 요구를 들어주도록 만들기 위해 한 것이란 말입니다. 당신들에게 해코지를 한다고요?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놈들은 당신들의 힘이 필요한 겁니다.”

바츠는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자리를 옮기지 못하고, 불편하게 상체를 반만 틀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분노로 가득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무장을 하고는 놈들에게 달려갈 기세였다. 하지만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애절하게 말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미안하군. 우린 이미...!”

“도와주자.”

그때였다. 바츠가 막 입을 열었을 때, 뒤에서 아델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어느새 채비를 하고는 달려와 있었다. 돌아보았을 때에는 그녀가 문 앞에 있던 아이를 안아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멀뚱히 바라보는 패토스도 보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가서 이유도 들어보자. 정말 우리 때문인 거라면 너무 괘씸하잖아.”

“아델리나, 하지만 그에 대한 평판은 좋았잖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 것이 사미르였어. 그가 이곳에서 존경받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지. 그리고 식당에서 보았을 때에는 정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보였고 말이야. 그런 그가 자신의 목적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고? 물건을 도둑맞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사라졌잖아. 아이만 해도 비싼 돈을 줘야 한다고. 누군가가 다급했던 것일 수도 있고, 손이 모자랐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가 그랬다고 장담할 수 있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까 가서 확인해보면 되잖아.”

바츠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아델리나가 한 걸음씩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 얼굴에는 평안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이는 미소였다. 바츠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서서 웃어주는 그녀의 얼굴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부쩍 자주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가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좋아. 그자를 만나보자고.”

결국 바츠는 그를 만나기 위해 나서야 했다. 건물 주인을 찾아 붉은 얼굴의 거처를 물었고, 그의 안내를 받으며 붉은 얼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혼자서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아델리나가 혼자 보낼 수 없다면 따라나섰고, 패토스가 아델리나와 같이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 역시도 데려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강일도 자신의 소총에 탄약을 가득 채우고 의지를 불태워서 그도 함께 해야 했다. 짐과 아이는 붉은 얼굴의 거처까지 안내해준 건물 주인에게 부탁해두었다. 그는 귀찮고 불편할 법도 한데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방을 시신으로 얼룩지게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곤란하면서도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바츠는 그를 돌려보내며 나중에 보답을 해야겠다며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붉은 얼굴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곳에서부터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한 20층짜리 빌딩이 바로 그의 거처였다. 입구에서부터 무장한 사내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경계를 하면서도 그에게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억울한 빛까지 돌고 있었다.

“거짓말 하지 마! 당신이 우리에게 한 짓을 벌써 잊었나?”

강일이 그를 향해 큰소리로 일갈했다. 그가 이만큼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총구를 위협적으로 움직였을 만큼, 이성을 잃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감정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붉은 얼굴의 수하들이 일제히 크고 작은 총구들을 들어올렸다. 10여명이 넘는 수가 강일을 노렸다. 하지만 붉은 얼굴은 침착하게 그들을 손짓으로 일러 진정시켰다. 그가 강일이 아닌 바츠에게로 말했다.

“정말입니다.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런 짓을 하면 이렇게 바로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 뻔한데,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습니까?”

바츠는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어제 무례한 짓을 했지만,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강일만큼 진솔한 눈과 정직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바츠는 물었다.

“그럼 누구지? 누가 우리에게 그런 짓을 한 거지?”

“모릅니다.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곳에서 살인이 일어난 것은 유감스럽지만, 지상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여기는 다른 곳에 비해서 그 빈도가 적을 뿐이지, 아르크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군. 당신은 이곳에서 한마디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잖아.”

“그렇다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우린 헌터들이 아닙니다. 밤이면 잠을 자야하죠.”

바츠는 그의 말에 어제 그의 지시를 받고 왔다던 사내를 떠올렸다. 상당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였다.

“어제 우리를 감시하라고 보낸 그 자는 어디에 있지?”

“감시? 아, 제가 두 분을 지켜보도록 한 것 말씀하시는 군요.”

그가 한쪽에 있는 사내에게 누군가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그의 지시를 받고 나간 사내가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얼마 뒤에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틀림없이 어제 계단 앞을 차지하고 있던 그였다.

“굽은 발입니다. 부르기 어려우시면 그냥 발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굽은 발이라고 불린 사내는 앞으로 끌려나오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는 눈치를 살피는데 바빴다. 붉은 얼굴이 그에게 안심하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큰 효과는 없는 듯 했다. 그때마다 애써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붉은 얼굴이 그에게 물었다.

“발, 어제 내 지시로 크레타의 여관에 갔었지? 그곳에서 특별한 것을 본 적 있나?”

굽은 발이 바츠 쪽을 한 차례 돌아본 뒤, 다시 붉은 얼굴을 마주보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저분들이 잠드는 걸 보고 돌아오라고 해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붉은 얼굴이, 그를 대신해서 바츠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어깨를 한 차례 으쓱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행동이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강일을 훔쳐보았다. 그는 그 모습을 함께 바라보고도 믿을 수 없는지, 무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의문들이 남은 모양이었다. 바츠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아델리나를 찾아보아야 했다. 더 이상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를 찾아왔고, 사실을 확인했다. 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녀 역시 그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지만, 그녀를 위해서 행동으로 말했다. 싸늘한 감정을 시선에 담아 붉은 얼굴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질리게 만드는 것이다. 바츠는 자리에 있는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고는 붉은 얼굴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이 급격히 커지며 숨을 쉬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에게 차갑게 말했다.

“여기서 전부 서럽게 죽어가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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