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92화 (192/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92화 *

바츠는 자신이 얼마나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아델리나의 단단한 부탁이 없었더라면 이미 한참 전에 돌아갔을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 와 있을 일도 없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매우 찝찝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두기에는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공기는 매우 무거워졌고, 사람들은 질겁하고 있었다. 그들이 작은 변명이라도 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기대가 정말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강일에게 총구를 겨눴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슬쩍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아무래도...제가 아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야윈 사내였다. 얼굴의 골격이 흉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고, 눈 밑은 어둡게 쑥 꺼져 있었다. 핼쑥하다 못해 초췌해 보일 정도로 안쓰러운 얼굴이었다.그런 그가 불안한 눈으로 붉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츠의 시선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대여섯 걸음 앞에 있는 바츠와 일행들 쪽으로는 잠깐도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저쪽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붉은 얼굴의 안면만 살피는데 급급했다. 그의 얼굴에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붉은 얼굴의 표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얼굴은 그가 나서자 반색하며 물었다. 섣부른 기대로 조금 조급해하는 목소리였다.

“건조한 질흙, 알면 아는 것이지 아는 것 같은 것은 무엇이고 아무래도는 무슨 말인가? 자네가 알고 있다는 말인가 모른다는 말인가?”

붉은 얼굴의 닦달에 가까운 말에 건조한 질흙이라고 불린 사내의 시선이 바츠의 얼굴을 빠르게 다녀갔다. 몹시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인지, 맨발로 얼음이라도 밟은 사람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달아났다. 들고 있던 소총의 총구가 어느새 바닥에 닿은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이 황망해 보였다. 전혀 힘이 없어 보였다.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더 처량하게 변해있었다. 그가 완전히 힘을 잃고 죽은 사람처럼 힘겹게 대답했다.

“아, 아마 본 것...같습니다.”

“우리의 인내심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아델리나가 보다 못해 나섰다. 그녀는 바츠 앞을 가로막으며 튀어나왔을 만큼 의욕이 넘쳤다. 바로 옆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바츠가 순간 움찔했을 만큼 저돌적으로 보였을 정도였다. 그녀가 그에게로 달려드는 줄로만 알았다. 그녀의 책임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책임감은 그를 더욱더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가 겁에 질려 다시 제자리로 뒷걸음질 쳤다. 기존에 섰던 자리보다도 몇 걸음이나 더 물러났다. 나란히 총구를 겨누고 있던 다른 동료들이 오히려 몇 발짝 앞으로 걸어 나온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를 따라 바닥을 끌며 따라오는 총구의 끄릉거리는 소리가 그를 대신해서 비명을 지리는 것 같았다.

“아델리나.”

바츠는 그녀를 부드럽게 불러 진정시키고는 대신해서 그에게로 물었다. 방금 전 겁을 주기 위해 끌어올렸던 감정은 저 멀리 던져버렸다.

“말해봐. 뭘 봤다는 거지?”

“...어, 어젯밤에 우연히 그 앞에서 보았습니다. 절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전 여자를 살 돈이 없습니다. 정말 우연히 그 앞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크레타 여관 맞은편은 밤이 되면 가장 어둡거든요. 거기 조용히 앉아있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거기 앉아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던 겁니다. 밤에는 헐벗은 여자들이 많이 돌아다니니까요. 절대! 정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똑똑히 기억합니다. 눈에 확연히 띄는 모습이었거든요. 헐벗은 여자들도 각자 잘 곳을 찾아가고 난 뒤였습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죠. 저도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크고 검은 실루엣이 여관으로 순식간에 들어갔습니다. 꼭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죠. 금방 다시 돌아 나왔는데 분명 어깨에 뭔가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반대쪽 손에는 둥그런 것을 쥐고 있었고요. 어두워서 정확히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깨에 짊어진 게 아이 같아서...아니, 아이 같았습니다...”

그가 겨우 용기를 내서 실컷 말을 늘어놓고는, 마지막에는 호우 속의 모닥불처럼 용기를 빠르게 꺼뜨리며 또 다시 풀이 죽었다. 답답하고 한심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로서는 대견한 일이었다. 그는 말을 잇는 동안, 바츠는 물론이고 그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중간에 붉은 얼굴을 향해 계속해서 다녀오며 끊임없이 눈치를 살폈다. 그때마다 붉은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며 북돋아주지 않았더라면 말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바츠는 그에게 나름대로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는 왜 가만히 있었지? 당신들은 이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잖아. 수상쩍은 모습이 보이면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최소한 누군가에게 알리기라도 했어야지.”

“너, 너무...너무 무서워서...워낙 무서워서...무서워서 그랬습니다...검은 실루엣이었는데 덩치가 너무 컸거든요. 헤러티커만큼 컸습니다. 그런데...그런데 그렇게 큰 덩치가 정말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진짜! 진짜 헤러티커를 보는 것 같았단 말입니다!”

그가 바츠를 향해 소리쳤다. 그 초라한 두 눈에 가녀린 눈물이 고였을 만큼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자신의 소총을 바닥으로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정확히는 떨어뜨렸다고 해야 했다. 그는 그때의 기억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바츠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헌터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더 두려워하는 기억이라니 쓴웃음이 지어졌다. 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얻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범인으로 추측되는 누군가를 목격한 것뿐이었다. 또 다른 목격자가 있으면 좋겠지만, 다들 침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붉은 얼굴이 그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가 아닐까요? 작은 머리말입니다. 아마도 그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츠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째서?”

“작은 머리 그자의 덩치가 꽤 크거든요. 이 주변에서 그만큼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바츠의 목소리가 차가웠는지, 그가 입술을 한차례 혀로 적시고는 대답했다. 겁에 질린 건조한 질흙의 얼굴을 다녀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건조한 질흙이 냉큼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지도 모릅니다! 그자일 겁니다!”

“그가 혼자서 우리를 찾아왔다고? 우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인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그자는 충분히 혼자서 가능합니다. 힘도 세고 몸도 빠르거든요. 우리가 그 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매우 강합니다. 날렵한 몸과 강한 힘으로 칼을 매우 잘 다루죠. 우리가 그와 더 이상 맞서지 않고 도시를 지키는 데에만 주력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와 괜히 맞서서 이로울 게 없었습니다. 기동성이 좋은 비클레타를 상대하기도 버거운데, 그가 직접 나타나기라도 하면 오히려 우리가 더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죠.”

바츠는 그의 말이 못미더웠다. 거짓말처럼 맞아떨어지는 저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의심스러웠다. 마치 의도된 것처럼 그들의 요구대로 흘러가는 분위기가 매우 마음에 안 들었다. 찜찜한 기분으로 아델리나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녀의 얼굴이 굳은 의지로 차분해져 있었다. 그녀 역시 내키지 않는지 신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방독면을 뒤집어쓰는 행동은 바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대신 말해주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고 붉은 얼굴에게로 물었다.

“놈이 어디에 있지?”

붉은 얼굴은 남쪽으로 곧장 작은 머리의 다리까지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반나절을 올라가야 한다고 했는데, 나름 정비된 흙길을 따라 좌우로 건물이 여러 채 늘어서 있어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게 어려우면 작은 머리의 다리에 있는 초소나 그 건너편 창고 건물에 있는 그의 수하들을 볼모로 잡아 안내를 받아도 된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초소에 새롭게 와 있던 그의 수하들이 다리로 접근하는 바츠와 일행을 멀리서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아나고, 건너편 창고 건물에 있던 자들마저도 그들과 함께 덩달아 내빼버렸는데에도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강일이 그들을 쫓아야 한다고 초조해했지만 차분하게 다리를 건넜을 뿐이었다. 붉은 얼굴의 말대로 그저 강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외부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한 모습을 전혀 갖추지 않은, 평범하다 못해 버려졌다고 느껴지는 그런 작은 마을이었다. 정비된 흙길이 아닌 사람이 다닌 흔적으로 만들어진 구색이나 갖추고 있는 길이 나있었고, 그 길을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불면 전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낡고 작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마저도 거의 다 비어있고, 10여 채 정도만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딱히 경계를 서는 사람도 없었다. 가끔 겁을 먹고 몸을 숨기는 아낙들만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눈이 마주치면 한결같이 같은 방향으로, 같은 건물을 향해 가리키고는 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우리를 보고 달아난 자들이 있었는데도, 너무 조용한 것 같은데요...”

강일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모습으로 주위를 끊임없이 경계하며 혼잣말을 하듯 속삭였다. 바츠는 그 분위기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까지 함께 온 패토스가 더욱더 신경 쓰였다. 사실 이곳에 오려는 건 자신 혼자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꼭 누군가 따라나서야 한다면, 복수를 하고 싶다는 강일로 족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델리나가 함께 가겠다고 말하면서 복잡해졌다. 패토스가 덩달아 아델리나를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바츠로서는 둘의 고집을 꺾을 방법이 없었다. 아델리나는 어릴 적부터 그 고집을 이겨본 적이 없었고, 패토스는 겁을 줄 수는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델리나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바츠로서는 참 귀찮고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곳인 것 같습니다.”

그 사이 이곳에서 본 사람들이 가리킨 건물 앞에 다다랐다. 오데사 시티의 조시안느 샬롱과 비슷한 생김새의 건물이었다. 지상 이곳저곳에 홀로 버려진 집들처럼 그보다는 낡고 해져 있었지만, 보여지는 구조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그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건물은 복층 대신 천장이 높았고, 중앙에 넓은 홀을 중심으로 양옆에 크고 작은 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으로는 보이는 홀의 끄트머리에, 20명이 덮어도 충분해 보이는 크기의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다양한 크기의 담요들을 한데 모아 쌓아둔 것이었는데, 그 넓이가 어지간한 방보다 넓었고 높이는 무릎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위에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몸을 반쯤 뉜 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 각종 총기로 무장한 사내 10여명이 있었고, 각각의 방 안에서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한숨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꽤나 지친 모습이었다.

“정말 무슨 날들인가 보군. 네가 내 가게에서 난동을 부린 그 헌터 맞지? 엑소시스트에 헌터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어차피 저 놈들은 언젠가 손봐줄 생각이었지. 저 놈들 덕분에 수익이 뚝 떨어졌거든. 제 발로 기어올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잘된 일이야.”

바츠는 그의 왼쪽 어깨에 감겨진 붕대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가 응시하는 구석을 향해 시선을 옮겼는데, 그곳에는 아주 익숙한 얼굴을 한 머리가 거꾸로 박힌 긴 말뚝에 꽂혀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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