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93화 (193/268)

< --   12. 진정한 순례자   -- >         * 193화 *

“그런데 넌 전혀 계획에 없었는데...무슨 볼일이지? 우리 사이에 계산은 이미 끝난 것 아닌가? 넌 우리를 위협했고, 난 그에 대해 보복을 했지. 그리고 넌 그 보복을 물리쳤고 그대로 우리들 사이의 마찰은 끝났다. 내 착각인가?”

그의 시선이 천천히 바츠 쪽을 향해 기어왔다. 그는 한 눈에도 크게 불편해 보였다. 주위에 무장을 하고 선 사람들이 없었다면 정말 초라해보였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를 비장한 각오로 보호하고 있었다.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한 데도 불구하고 주눅 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자리를 꿋꿋하게 지켰다.

바츠는 아델리나와 강일에게 눈치를 주고는 혼자서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서 표정이 어두웠지만, 선이 굵은 이목구비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체격도 건장했는데, 팔뚝은 꾸준히 단련한 사람처럼 우람했고 누운 자리에서도 훤칠해 보일 만큼 키도 꽤 컸다. 건조한 질흙이 묘사한 외관과 거의 일치하는 체형이었다. 어깨의 상처는 자상보다는 심한 타박상으로 보였다. 팔 전체를 안쪽으로 구부려 단단히 고정시킨 것을 보면 뼈에 이상이 있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쇄골에 금이 갔거나 골절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츠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그의 옆을 지키던 사내들이 하나둘 서로 눈치를 보며 총구를 들어올렸다. 극심한 긴장감이 그들의 움직임을 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세를 단 번에 취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고쳐 섰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자리에 누워 있는 사내만큼은 큰 긴장감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킬 뿐이었다. 저쪽 어딘가에서 두 젊은 여성이 황급히 달려와 그가 몸을 일으키는 걸 도왔다.

바츠는 담요 더미 위로 올라서지 않고 그 끝에 멈춰 섰다. 그러자 도움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그가 말했다. 고작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든지 호흡이 살짝 가빠져 있었다.

“왜? 내 말이 틀린가? 너희 둘. 너희 둘이 맞잖아. 머릿수가 좀 줄어들기는 했지만 날 속이지는 못하지. 특히 저 미친 여자의 괴물이 같이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고. 너희들이 지난 번 내 가게에서 소란을 피우고 다리를 공짜로 건넌 놈들이지?”

“당신이 작은 머리인가?”

바츠는 그에게 물으며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격자나무를 끼워 맞춘 바닥에 검붉은 얼룩들이 있었다. 걸음을 옆으로 그리고 뒤로 몇 번 작게 움직이며 확인해보니, 추정 시간이 각기 다른 혈흔들이 뒤엉켜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래, 내가 미풍의 칼날이다. 그 재수 없는 이름은 네 어미를 부를 때나 쓰라고. 왜? 핏자국을 처음 보는 건가? 네 놈들의 그 검은 슈트에 찌든 피비린내에 비하면 향기로 느껴질 텐데? 그 바로 옆에 있는 것이 바로 저 놈이 며칠 전에 이곳에 와서 난동을 부리며 만들어낸 것이지. 그 뒤쪽 말이야. 정신이 완전 나간 놈이었다고. 저 자식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4명이나 크게 다쳤지.”

바츠는 그가 눈으로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멀어서 방향이 정확한지 의심스러웠지만, 그쪽에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뚜렷한 혈흔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것을 보면 제대로 찾아본 것 같았다. 그리고는 구석에 꿰어있는 머리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지난번 만났던 엑소시스트 중 하나인 일리디우스가 분명했다. 그가 이곳에서 창백하다 못해 검은 얼굴로 외롭게 살해당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짐작해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신봉하던 신념인, 정화를 위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이 비록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만, 추구하던 생각을 행동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바츠는 고개를 다시 작은 머리를 향해 돌렸다. 그가 피곤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용케 민스크까지 다녀왔군.”

“무슨 헛소리야.”

그가 귀찮은 지 싱겁게 대꾸했다. 옆에서 자신을 거들고 있는 여인들이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손길을 느끼는 데나 바빴다. 바츠는 물었다.

“그런 몸으로 굳이 우리를 추적해 온 이유가 뭐지? 왜 그를 살해하고 간 거야? 겁이라도 났나? 조금 더 용기를 내보지 그랬어. 그럼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마주보고 설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서로의 수고를 더는 일이지.”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냐. 헌터 자식들이 다 미친 건 알지만 최소한 알아듣게는 말하라고.”

그가 이제는 살짝 짜증스런 목소리로 변하자, 아델리나가 뒤에서 소리쳤다.

“왜 아이를 데려갔느냐고 묻는 거야!”

그녀는 작은 머리가 매우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의 퉁명스런 태도에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가 강일을 대신한 피해자 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자 작은 머리가 상체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여, 바츠를 피해 아델리나를 훔쳐보고는 허탈한 헛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내뱉으며 말했다.

“너희들 단체로 미친 거냐? 아, 물론 너희들이 정상이 아닌 건 알아. 특히 저 년은 매우 독특하군. 정말 다양한 모습들이야. 미사의 훈련이 나날이 발전하는 모양이군. 나중에는 정말 슈트 없이 야인들 틈에 숨어있으면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겠어. 헌터들은 철저하게 감정을 말살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훈련 강도가 보잘 것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으로 훈련이 발전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저 년이 특이한 것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눈이 있다면 직접 보라고. 우린 이미 전력을 상당히 잃었어.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겁에 질린 여기 7명이 전부라고. 수십 명이 그날 네 놈들 손에 죽은 걸 벌써 잊은 거야? 열흘도 되지 않았다고. 하긴 네 놈들이 그런 걸 기억할 리가 없지. 특이하긴 해도 헌터는 헌터로군. 다시 말하지만 우린 네 놈들에게 신경 껐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아이를 찾고 난리야. 우린 아이들을 사고팔지 않아. 저 놈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 군.”

작은 머리가 일리디우스의 머리가 걸린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숨통이 끊어져도 한참 전인데도,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찬지 고개를 내둘렀다. 그에게 제법 시달린 모양이었다. 그가 바츠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저 놈들은 아이들을 세뇌시키려고 노력하는 놈들이지. 어릴수록 그게 더 쉬우니까 말이야. 그래서 자기들 멋대로 이단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은 전부 살해하고, 아이들만 자신들의 도시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새롭게 키워내는 거지. 지상에서 저 놈들만큼 미친놈들은 헌터들뿐일 걸? 아, 맞다! 엑소시스트들이 그래서 네 놈들을 존경하는 거라는 것 알아? 미친놈이 더 미친놈을 따르는 거라고. 정말 우스운 일이지.”

그가 피곤한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바츠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리고는 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친 콧바람을 내뿜어댔는데, 그마저도 조롱이 가득 담긴 조소였다. 매우 치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친 어깨를 부여잡으며 고통을 삭히는 걸 보면, 통증 때문에 별 수 없이 참아내는 것 같았다. 부상이 아니었더라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듯 했다. 바츠는 그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당신이 칼맨을 살해해 목을 가져가고, 아이를 훔쳐가지 않았다고 말이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난 지금 매우 지쳤다고. 며칠 전부터 지쳐 있었지. 내 꼴을 보면 모르겠어? 그런데 이런 내가 거기까지 다녀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놈들이 지상에서 멋대로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아. 까불지 말라고.”

바츠는 작은 머리와 옆에서 그를 걱정하는 얼굴로 쉬어야 한다고 달래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아델리나가 선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정확히 언제인가부터는 모르겠지만, 일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목적이 너무도 불분명했다. 그저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화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작은 머리가 곤란한 상황에 몰리게 되자, 시치미를 떼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한 것이 그가 이미 헌터 둘을 살해하기 위해 기습까지 감행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이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지자, 모른 척 발뺌 하는 것으로 보일 만 했다.

바츠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얼굴로도 자신의 위상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당장 자리에 누워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꼿꼿이 허리를 펴고 자리를 지켰다. 옆에서 그를 거드는 두 여인만 초조해할 뿐이었다. 바츠와 상황을 두고 불안한 마음에 염려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그를 향한 걱정으로 인한 우려였다.

“나를 원망하지 말도록 해.”

바츠는 그에게 약간의 미안한 감정을 담아 말한 뒤,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정확히는 그가 누워 있는 바로 앞, 두툼하게 쌓아올린 담요 더미의 정중앙이었다. 그곳에 내려서서 카니지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작은 머리를 비롯해서 모두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작은 머리 주위를 지키던 사내들 중 일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를 중심으로 왼편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츠가 빠르게 접근하는데도 불구하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탄약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고, 자신의 동료들이 너무 가까웠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자칫 잘못 방아쇠를 당겼다가는 바로 뒤에 작은 머리는 물론이고 반대쪽에 선 동료들까지 위험했다. 바츠가 노린 일이었다. 소총은 타깃이 마주보고 중첩된다면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껄끄러운 해악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용한 것이었다.

바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을 벴다. 한 사람은 얼굴이 세로로 갈라지며 살해당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옆에서 지켜보다가 방향을 틀어 들어 올리는 바츠의 카니지에 소총과 함께 양팔이 잘렸다. 그의 비명소리가 그 참혹함을 목소리로 대변했다. 그 사이 아델리나는 반대쪽에 남은 사람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몸을 감추고는 가까운 벽을 타고 달린 뒤, 그들 바로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날아온 것처럼 허공에서 나타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눈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모습이, 이미 크게 당황해서 경황이 없는 사람들을 더욱더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반대쪽에 있는 세 사람을 빠르게 제압했다. 바닥으로 내려서며 한 사람의 머리를 벴고, 그 뒤쪽으로 나란히 섰던 두 사람은 카니지를 간결하고도 힘 있게 좌우로 휘둘러 쓰러뜨렸다. 그녀는 그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바츠가 남은 두 사람이 소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드는 모습을 보고, 칼날을 멈춰 세운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입구에 남아있던 강일은 패토스와 함께 가까운 방으로 피신해 있었다. 언제든지 지원해주기 위해서, 몸을 반만 내놓고 사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패토스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 악랄한 놈들. 애초에 네 놈들은 우리를 살해할 핑계가 필요했던 거지? 진즉에 알고 있었어. 헌터라는 놈들은 항상 그러니까.”

바츠는 몸을 돌려세우자, 그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옆에서 겁을 먹고 움츠려있는 두 여인을 어깨를 다독여 달래주고는 똑바로 섰다. 그런 그의 손에는 60cm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이 들려있었다. 뒤늦게 두 여인이 그의 다리를 붙들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는 그 둘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 걸음 내딛었다.

“원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네 놈들 뜻대로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어. 네 놈들의 그 횡포는 지긋지긋하니까.”

“당신...아르크 사람이로군.”

바츠가 그런 그를 향해 검을 세우며 말하자, 그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대답했다.

“그래, 아르크에서 추방당했지. 아주 오래 전에 말이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난 헌터가 될 몸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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