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94화 *
그가 자리를 박차고 바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텁게 쌓인 담요가 그의 발을 밑으로 잡아끌었지만, 움직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똑바로 달려왔다. 안쪽으로 고정된 팔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만도 한데, 매우 안정적인 몸놀림이었다. 거리를 좁히고는 끄트머리에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불편한 몸 때문인지 체공 높이는 낮았지만, 보다 더 힘을 실어 검을 휘두르는 데는 충분했다. 그가 평소보다 부족한 완력을 나름 영리하게 보완하고 있었다. 몸이 온전했더라면 꽤나 위협을 느껴야 했을 것 같았다.
바츠는 그의 칼날을 피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카니지로 받아냈다. 그가 너무 빨랐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의 공격이 너무 맹렬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그의 움직임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딪힌 칼을 통해 그가 생각보다 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이는 것보다도 부상의 정도가 더욱 깊은 모양이었다. 탄력적인 움직임을 바로 잇지 못하고, 준비동작을 다시 가져가고 있었다. 그의 낯빛이 심각하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는 더욱 강하게 압박해왔다. 마치 망치로 내려치듯 검을 반복적으로 휘둘렀다. 궁지에 몰려 판단력이 흐려진 상대에게서 으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초조함에 쫓기기 시작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조급해하면 조급해할수록 그의 동작은 점점 더 커져갔다. 어깨를 완전히 뒤로 뺐다가 이를 물고 잡아당기는 모습이 매운 불안정하게 보였다. 그가 초조함을 떨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선택이 자신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모른다기보다는 느낄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는 매우 다급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한 공격이 바츠의 방어에 번번이 무산되고 있었지만, 바츠는 여전히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걸음을 옮겨 혹시 모를 기회까지도 피해내고 있었다. 그가 정상적인 몸 상태였다면 현재보다는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충분히 민첩했고, 힘이 있었다. 붉은 얼굴이 곤란해 한 것이 이해가 될 만큼 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차이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 지금까지 검을 쓰던 야인 중 가장 훌륭한 모습이었지만, 오래 전 키예프 시티에서 만났던 칼리에와 넓은 간극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였을 뿐이었다. 아마도 헌터 훈련 과정을 절반도 수료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바츠는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작은 머리를 지켜보며 문득 떠오른 그때 그 칼리에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작은 총을 겨누고는 내내 빈정거리던 사내가 했던 말이었다.
‘살아서 나를 만나러 와라.’
블러드 케찰이라는 자가 전하라고 한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이유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생각해보니 몹시 궁금해지는 일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나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지 많은 부분에서 의문이 생겨났다. 하지만 여기서 고민한다고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은 눈앞에서 목숨을 빼앗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그를 상대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바츠는 그에게로 다시 천천히 집중했다. 그의 표정이 절박함으로 가득했다. 검은 억울함이 좌절의 그림자가 되어 그의 얼굴에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좌절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라져야만 했다. 대신 그보다 훨씬 진한 절망이 그의 얼굴을 수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또 한 번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뒤로 바짝 당겨진 그의 어깨가 힘차게 앞으로 이동했고, 그의 팔이 크게 반월을 그리며 날아왔다. 조금 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느려진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함께 이어져 따라와야 할 그의 팔꿈치가 모습을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깨끗이 잘린 팔뚝 일부분만 앞으로 내둘러졌을 뿐이었다. 그의 붉은 혈액이 칼날 대신 허공에 뿌려졌다. 바츠의 가슴에 사선으로 길게 흔적을 남기며 칠해졌다.
“젠장!”
그가 밀려드는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서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는 걸로 상쇄하려고 노력했다. 극심한 통증이 오감을 쥐어짜는 모양이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는 그의 입에서 뜨거운 물이 끓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다. 뒤늦게 어금니를 물고 버텨내는 그의 마지막 발악을 가볍게 비웃고 있었다. 그가 눈에 초점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 주저앉으며 휑한 눈으로, 자신의 잘려나간 팔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몹시 처량하게 느껴졌다.
바츠는 그에게서 눈을 떼, 그 뒤로 어느 틈에 달려온 아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그의 뒷모습을 냉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발 앞에는 그가 조금 전까지 휘두르던 검을 쥐고 있는, 주인 잃은 팔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사실을 말해. 그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잔인했다.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빗물 같았지만, 한 겨울에 쏟아지는 호우처럼 싸늘했다. 하지만 기운을 완전히 상실한 작은 머리는 그에게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그가 주저앉은 바닥은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고, 그의 얼굴은 빠른 속도로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
그때였다. 저쪽에서 한 여인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그의 몸을 감싸 안으며 앞을 막아섰다. 담요 더미 위에서 그의 옆을 지키던 여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대신해서 먼저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는 모습이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치켜 올려다보는 모습이 바늘처럼 뾰족했다.
“함께 죽고 싶은 거야?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뜻대로 해주겠어.”
“우리에게 왜 그러는 거예요! 이미 다 말했잖아요! 미풍의 칼날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아델리나의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가 발악을 하듯 외쳤다.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매우 처절했다.
“엑소시스트를 살해해서 그런 건가요? 헌터들과 엑소시스트들은 친하다죠? 하지만 미풍의 칼날은 잘못이 없어요! 그들이 잘못한 거예요! 보세요!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녀가 감싸 안은 그를 내려두고, 자리에 무릎으로 서더니 웃옷을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아델리나와 바츠를 향해 차례로 그리고 반복해서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복부에 남겨진 오래된 흉터가 그 말을 너무도 명확하게 전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새긴 것으로 보이는 문신이, 그녀의 복부 한 가운데에 낙인처럼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낙인은 그녀에게 너무도 가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창녀(whore).'
그녀가 또 한 번 울부짖었다.
“그들은 지상에 사는 사람 모두에게 이런 짓거리를 하죠! 미풍의 칼날은 우릴 그런 놈들에게서 보호해주고 있어요! 그게 무슨 잘못인가요? 그게 왜 잘못인가요! 당신들이 원하는 게 대체 뭐에요! 아르크는 우리를 존중해주는 것 아니었나요? 당신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존재들 아니었나요? 대체 우리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당신의 딱한 사정은 잘 알겠어. 하지만 잘못 집어도 너무 많이 잘못 집었어. 저자가 죽어야 하는 건 칼맨을 살해하고 아이를 납치해 갔기 때문이지, 우리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 아니야.”
아델리나는 그녀의 간절한 외침마저도 싸늘하게 내쳤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델리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미풍의 칼날은 식당을 운영하고 다리 통행세를 받아요! 강도들이 습격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고 헤러티커가 나타나는 것을 알려주죠! 먼저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면 절대 해치지 않는다고요! 아이를 납치하는 일은 더더욱 없죠! 당신들을 위협해서 그러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당신들이 먼저 우리에게 겁을 줬잖아요! 당신들이 먼저 식당에서 살인을 저질렀죠!”
“안타깝게도 당신은 저자에게 속고 있는 것 같군. 저자는 그곳에서 강도질로 벌어먹고 있었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당신들이 바로 강도들이란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가 너무 길어지는 군. 아이를 당장 내놓지 않으면 너희 둘은 물론이고 여기 남은 사람 모두가 무사하지 못하게 될 거야.”
아델리나가 그들을 향해 무섭게 말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자신의 카니지는 높이 치켜들고, 단숨에 둘을 두 동강 낼 기세였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말려 세워야 했다.
“아델리나, 그만해. 거기까지야.”
아델리나가 다가서던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이야. 그리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고 말이야.”
“바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바츠는 그녀가 답답해하는 모습을 고개를 끄덕여 이해하고는 대답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 여기 어디에도 사미르의 노예는 없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우린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지. 뭐가 문제인 것 같아? 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글쎄, 이렇게까지 되면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사실을 고백하면 우리에게 혼구멍이 날까봐 겁이 나는 거겠지! 그래서 이렇게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거라고!”
“아델리나, 보라고. 여기 사람들을 봐. 다들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이 사람들을 보고나서 말하라고.”
바츠는 그녀에게 최대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자칫 정말로 이곳에 모두를 학살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바츠의 간절한 눈빛을 받아드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좌우로 늘어선 문이 없는 방에서, 사람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까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체...”
아델리나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제야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치 이들이 사미르를 살해하고 그의 노예를 훔쳐갔다고 단정 짓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이곳에 온 이유가 그런 이들을 벌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들이 그 몹쓸 짓을 했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라는 걸 잊은 듯 보였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일이었다. 진실은 이미 훨씬 전에 드러나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 잠시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바츠는 그녀와 함께 완전히 자리를 떠났다. 강일과 패토스도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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