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 진정한 순례자 -- > * 196화 *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사미르의 원한을 갚아줄 방법이 없는 겁니까?”
그때까지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강일이 사미르의 생기 없는 머리를 안아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손에 들고 있는 주검 일부 때문인지, 그도 덩달아 기력이 없어보였다.
바츠는 그에게 쉽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목소리를 높이며 몰아세운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너무도 난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버니에투와가 떠날 때 벌써 체념한 것으로 보였다. 단지 억울함에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무력함에 실의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비단 강일뿐만이 아니었다. 바츠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를 위해 어떤 것도 자신해줄 수 없었다. 그저 애석하게 탄식을 말해야 했다.
“미안하군.”
바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차마 위로도 건넬 수 없을 만큼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강일은 그 배려를 위로로써 조용히 받아드렸다. 그의 가슴이 사미르의 적막을 머금은 얼굴처럼 허전하게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진저리가 쳐질 만큼 서늘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사미르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눈이 내릴 정도의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값비싼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신중하고도 조심스런 손길이었다. 바츠는 그가 사미르와 함께 돌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옆에서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아델리나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패토스가 입을 다문 것도 그때였다. 그는 버니에투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도 계속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아델리나의 관심이 없으니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지겨워질 때까지 목적 없이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중에는 빠꼼 고개를 내미는 주민들을 목표로 했다. 주민들은 그의 고함에 황급히 다시 안으로 달아나길 반복했다. 아델리나의 품안에서 잠들어 있던 스팸이 얼마 있다가 깨어난 것이, 전부 짐승 같은 그의 울부짖는 소리 때문이었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는 건강했다.
“그만 돌아가시죠.”
강일이 패토스가 입을 다무는 것을 신호로 먼저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올 때와는 다르게 가장 앞에 섰다. 굵어지는 눈발 사이를 꿰뚫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서럽게 보였다. 바츠는 그 뒤를 쫓으며 가슴이 무거워지는 걸 느껴야 했다. 밀려드는 죄책감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옆에서 아델리나가 가끔은 손을 잡아주고 가끔은 시선을 교환해주지 않았더라면, 중간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야만 했을 것 같았다. 그녀 덕분에 힘을 낼 수가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 힘을 내야 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일이 온몸으로 뿜어내던 우울한 기운이 도시에 먼저 도착해 있었던 것 같았다. 도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수선함으로 가득했다. 입구에서부터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들 초조함에 젖어있었다. 정말 부산스럽게 달려 다니는 사람도 있었지만, 평범하게 걷는 사람들조차도 허겁지겁한 것처럼 매우 산만하게 느껴졌다. 두 눈에 두려움이 서린 그들의 초조한 표정 때문이었다. 매우 심란한 분위기였다. 강일의 짐과 남은 아이를 돌려받기 위해 크레타 여관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인이 짐과 아이를 내어주며 말했다.
“엄청난(great) 헌터가 와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와서도 행패를 부렸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코를 킁킁대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여러분이 머물던 방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꼭 여러분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아, 물론 그냥 제 추측일 뿐입니다! 절대 모함하려는 건 아닙니다! 전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바츠는 짐을 건네는 그의 얼굴에 서운함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내부 여기저기와 집기 일부가 부서진 것 때문인 것 같았다. 바츠는 그에게 애니밀 몇 개를 건네며 물었다.
“엄청난(great) 헌터라고? 정말 큰(big) 헌터가 다녀갔다는 소리인가?”
“네, 정말 큰(great) 헌터였습니다. 그렇게 강해보이는 헌터는 처음 봤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다들 겁을 집어먹게 만들었죠. 물론 여기 계신 분들도 충분히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아마 붉은 얼굴님의 거처(den)는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가 애니밀을 받고는 허리를 연신 구부리며 말했다.
“왜지?”
“그가 가장 최근에 왔던 헌터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거든요...전 말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저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붉은 얼굴님의 거처에 간 걸 며칠 전에 봤다고 했죠. 정말 제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을 뿐이잖습니까? 그래도 여기에 짐을 맡겼다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가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말하다가, 나중에는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며 말했다. 자신의 진심을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는 어깨를 펴며 우쭐했다. 비록 그 와중에도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이 엿보였다. 스스로가 대견한 것 같았다. 바츠는 그런 그를 달래듯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주민들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도로는 하얗게 덥혀가고 있었다.
“버니였을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델리나가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버니였더라면 굳이 우리를 찾을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를 만나기 전에 다녀간 것 아닐까?”
바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 상 그가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횡포를 부린 것이라면 모를까, 그 전에 소란을 일으켰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확인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정 짓기에도 무리였다. 그곳에서 그보다 늦게 출발했을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도중 지상에서 밤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가 쉬지 않고 서둘러 돌아갔다면, 도시로 돌아왔을 자신과 아델리나를 찾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즉, 그의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벌어졌을 촌극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붉은 얼굴을 만나봐야 알 것 같아. 주인이 그에게로 안내해준 모양이야. 그라면 뭔가 알겠지.”
“그 다음에는? 버니가 맞다면 어떻게 할 건데?”
바츠는 그녀가 되묻는 말에 잠시 입을 닫았다. 사실을 확인한다고 해서 당장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추적하기도 힘들었고,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있을 수도 없었다. 이곳을 습격했다는 것은 정말 그가 살의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분명 그는 떠나기 전 마지막에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르크에서 그에게 뺨을 얻어맞을 때처럼 그냥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르겠어. 그래도 우선은 붉은 얼굴을 만나보자. 버니가 맞는지 확인은 해야 하잖아.”
바츠는 크레타 여관 앞에서 강일과 헤어졌다. 그는 스톡홀름 시티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는 홀로 빅도그를 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바츠가 함께 가자는 부탁은 또 한 번 거절한 뒤였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사미르의 가족들을 위해서 자신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미르의 시신을 가져온 머리와 함께, 불에 태워 도시 공동묘지에 묻던 그의 모습이 매우 결연했다. 사미르의 노예였던 두 아이는 크레타 여관의 주인에게로 맡겨졌다. 강일은 아이들을 혼자서 모두 보호할 여력이 없었고, 아이들에게도 이곳에 남아 생활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그의 결정이었다. 놀랍게도 오히려 아이들이 그에게 눈물을 쏟으며 헤어지기 않기 위해 달라붙었지만, 그는 냉정하게 아이들을 떼어놓았다. 주인에게는 약간의 돈과 전에 야인들에게 값싸게 매입한 카니지를 양육비로 건넸다. 여관 주인은 너무 많은 액수에 질겁했지만, 강일의 간곡함에 결국 모두 받아야만 했다. 강일은 그를 매우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보여준 모습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아쉽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강일이 떠나가자 아델리나가 진심으로 섭섭함을 표했다. 그의 냉철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은 지상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것이었다. 패토스도 그가 떠나가는 것을 슬퍼했다. 처음에는 멀어지는 그를 보고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나중에야 그 의미를 알고는 그를 쫓아 한참을 달려갔을 정도였다. 물론 아델리나에게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가 강일과의 이별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바츠도 그에게 정말 미련이 남았지만, 그의 뜻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미르 가족들을 위한 마음에서 케일리를 위해 모질게 마음을 먹었던 자신이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애써 서운함을 감추고 발걸음을 반대로 옮겨야 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붉은 얼굴의 소굴에 도착하자, 여관 주인의 예상대로 처참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혈흔이 낭자해 있었고,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시신들이 바닥에 즐비했다. 붉은 얼굴 역시 한쪽 팔이 잘리는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헌터가 다녀갔습니다. 지난번에 왔던 헌터였죠. 당신들을 찾았습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죠. 목숨이라도 건진 것이 다행입니다. 불쌍하게 살해당한 친구들이 많지만 말이죠.”
아델리나가 씁쓸하게 내뱉는 그의 말을 듣고는 바츠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델리나의 말대로 버니에투와일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은 많았다. 다시 찾아올 것이었다면, 왜 하필 도시로 왔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샅샅이 뒤지듯이 헤맸던 것일까? 설마 도시 전체가 자신을 숨겨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때 본 그의 모습이라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뭔가 대단한 망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불안한 말들로 불행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돌아가야 하는 거야?”
아델리나가 심각한 눈으로 물었다. 바츠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하고 싶어?”
“아니, 우린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난 그게 옳다고 믿어. 네가 그때 내게 말한 것이 전부 진실이라고 믿어.”
바츠는 고민도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를 보자, 너무 자신의 입장만 고려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림 없는 그녀가 매우 고마웠지만, 그녀는 자신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건네는 바츠의 목소리가 전보다 조금 무거워졌다.
“아델리나...그렇게 속단할 문제가 아니야. 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네 부모님은 아르크에 계시잖아. 넌 나처럼...나처럼 혼자가 아니라고. 넌...”
아델리니가 바츠의 말을 가로막으며 대답했다.
“상관없어. 나 버림 받았는 걸? 너처럼 혼자나 마찬가지야. 우리 가족에 대해서 네게 몇 번이나 말했었지? 난 정말 지쳤어. 내가 헌터가 되고 싶어 했던 이유 기억해? 난 늘 혼자였다고. 그곳은 내 숨통을 조이고 있었어. 난 이곳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껴. 마음껏 숨 쉴 수 있다고. 거기다 너도 내 옆에 있잖아. 넌 내 곁에 있어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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